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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Aug 21. 2024

교실의 턱

[교실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6)

선생이 되는 일을 우리는 교단에 섰다 혹은, 교단에 올랐다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교단에 선다는 것은 교실에서 늘 어린이로만 역할했던 누군가가 그 역할의 경계를 넘어 어린이를 마주하는 선생으로 올라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선생이 되어 교단에 서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금단의 영역에 침범하는 반항아가 된 느낌이랄까.


어린이도 선생을 꿈꾸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외재적 열망일 수도 있겠으나, 선생만이 존재할 수 있는 저 교단에 올라 어린이가 아닌 어른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내재적 충동인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선생이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역할극을 엿들으면 (그런 선생은 만나본 적 없으면서도) 교단처럼 살짝 높은 위치에서 어린이 역할을 하는 순진한 어린이들을 내려다보며 찍어 누르는, 세상 엄하고 언사가 폭력적인 선생이 다수 등장한다. 그러니까 교단은 교실에서 선생과 어린이를 구분하는 권위의 턱이다.


그렇지만 요새의 교실에는 교단이 없다. 교실에 내재된 선생의 권위 의식을 부러 지우기라도 하듯 교실 곳곳은 평평하게 짜여 있다. 어린이가 사는 공간이나 선생이 지내는 공간이나 미끄러지듯(실제로 아이들은 슬라이딩을 자주…)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 그러면서 선생을 꿈꾸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는데, 공무원이라는 직장에 대한 사회적 회의감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선생만이 존재할 수 있는 저 교단이 없어지면서 교실 안의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까닭도 일부 있다. 


아직 직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뭐든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른이라는 위치에 오르고 싶은 어린이들이기에 자신들도 능히 넘어갈 수 있는 선생의 영역에는 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든, 모종의 이유로 교실에는 점차 교단이 사라졌고 그러니 선생이 되는 일을 교단에 섰다 혹은 올랐다고 표현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말이 되어 다만 관용어로서만 작용하는 말이 되었다.


교실에서 교단이 없어졌다는 것은 다시, 선생과 어린이들의 만남이 수직의 관계에서 수평의 관계로 재조직되고 있음을 뜻한다. 선생-어린이 간 관계의 재조직은 교실의 모습을 상당 부분 바꾸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은, 몽둥이의 종말이었다. 라떼(아차, 나 때)만 하더라도 체벌이 왕왕 집행되던 시절의 교실을 겪었고 나보다 이전 세대의 교실 이야기는 정말이지, 듣는 것만으로도 지칠 정도로 암담한 일들이었노라. 체벌로 대표되는, 일방적인 소통 구조였던 교실은 양방향 소통 구조로 재조직되었다. 선생은 재조직된 교실에서 어린이에게 지시하는 역할 대신 어린이를 설득하는 역할을 요구받았다. 때문에,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에 어린이들의 동기가 강조되었고 그러한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지가 선생의 중요한 역량이 되었다.


이렇듯 교실이 평평하게 짜이면서 교실은 민주화의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동안 선생이 교실에 필요한 규칙들을 만들어 통치하는 독재 혹은 철인통치였다면, 요새의 교실은 작은 아고라 광장에 더 가깝다. 교실 아고라에서는 더 나은 교실 운영을 위한 열띤 토론… 대신, 숱한 고자질과 체육을 더 하고 싶다는 둥, 숙제를 내지 말아 달라는 둥, 부정한 청탁이 오가긴 하지만,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여론이라는 힘을 갖기 시작했다.  여론이라는 선생이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 어린이들은 교실의 많은 영역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가져오고 자신들이 유리한 편으로 바꾸었다. 선생으로서는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을 마주해야 했고, 그것을 가만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예를 들어, 교실에서 이런 질문이 날아든다면, 뭐라 답하겠는가? 


“선생님은 왜 교실 청소 안 해요?”

“선생님만 슬리퍼 신으라는 법 있어요?”

“왜 브금(Background music)은 선생님이 좋아하는 것만 틀어요?”

“선생님도 아침 활동 시간에 책 읽어요.”     


이런 어린이들의 타박, 아니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말문이 턱 막혔더랬다. 더러는 어찌 설득하고 더러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왜 선생은 어린이가 뽑을 수 없는 거냐는 물음까지 받은 적도 있었다(그렇다고 선생이 어린이를 뽑은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교실 청소를 한다. 나도 어린이들처럼 당번 날짜가 정해져 있어, 때에 맞게 청소를 해야 한다. 브금도 어린이들이 직접 신청을 받아 틀어주는 식이다. 내가 듣고 싶은 통기타 노래도 듣고 싶거들랑 신청서를 꼼꼼히 적어 제출해야 한다. 한편, 슬리퍼는 여전히 신고 있고(위급한 상황에 빨리 실외화로 갈아 신고 나가야 한다는 허술한 핑계로), 아침 활동 시간에는 컴퓨터 보는 시간이 더 많다(밀린 업무가 산더미라는 과장된 핑계로).


한편, 교실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바람은 어린이들에게도 새로운 어린이상(像)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어른 같은 어린이가 되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은 여태껏 어른의 유산을 물려받아 묵묵히 배워 바르게 자라나는 것이 제일이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다그쳐 자라야 하는 어른의 면모를 요구받게 되었다. 교단이 사라지고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가 평평해졌으니 자연히 한 사람의 역할을 어린이로서 감당해야 했다. 더러는 역할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지위를 상실하기도 하겠으나 대부분은 교실 속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스스로 채근한다(거창하게 교실의 민주화에 대해 서술했으나, 교실의 민주주의는 소박한 수준이라는 점을 양해 바란다.).


교단이 없어진 요새의 교실 이야기를 들으면 교실 밖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찬다. 선생 그림자도 밟지 않던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지금의 교실은 대단히 낯선 모습일 것이다. 선생의 마음을 무참히 꺾어 놓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을 때도 교단이 없어진, 아니 무너진 까닭에 교실이 이렇게 된 것이라고, 어린이들은 매를 좀 맞아야 한다고 말하는 교실 밖의 어른들이 꽤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교사가 교단이라는 권위에 올라 때론 어린이들을 매질하며 일방적인 소통 구조의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너진 교단을 새로이 세워야만 한다는. 그러나 교실 밖의 어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선생이 교실 속에서 되찾고 싶은 것은 권위가 아니라 존중이라는 것이다.


평평하게 짜인 새 교실의 모습이 말 그대로, 기어오르는 어린이들을 양산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선 내가 옮겨 적은 어린이의 질문을 읽으면서도 요새 애들 버릇없네, 싶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기어오르는 어린이들, 그러니까 선생을 무례하게 대하는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건, 권위가 아니라 존중이다. 평평한 교실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서로를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존중의 약속이 필요하다.


교실의 갈등은 그저 하나의 갈등이다. 욕이든, 손찌검이든, 문제 행동이 선생을 향했을 때, 어찌 어린이가 어른에게 그리할 수 있냐며 비난을 늘어놓지만, 욕이나 손찌검은 그것의 대상이 선생이 아니라 친구인 경우에도 비난받을 만한 것이다. 그저, 하나의 갈등인 것이다. 선생에게 몽둥이를 다시 쥐어 준다면, 어찌어찌 어린이가 선생을 막 대하는 상황은 급히 막을 수도 있겠으나, 그들을 결국, 가르칠 수는 없다.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반성하도록 설득할 수가 없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그야말로 교실을 호령하던 선생님이 있었다. 단단한 막대기를 들고 다니던 그는 수업을 듣지 않는 학생, 조는 학생, 떠드는 학생 할 것 없이 매를 들었다. 우리는 숨죽였고, 눈치를 보며 수업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고 뒤에서 온갖 짓궂은 별명을 지어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유독 힘들어했던 시기의 나를 따로 불러, 코코아 한 잔을 건넨 적이 있었다. 코코아를 받아 들며, 처음으로 몽둥이가 곁에 없는 그의 손을 보았다. 투박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군고구마 같은 따뜻함이 한겨울 코코아만큼이나 좋았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내게 보인 존중의 첫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때부터 그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교단으로 대표되는 교실의 턱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 그것은 선생 스스로 걷어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교실에 사는 사람 마다마다 조그만 턱을 세우기로 했다. 교실의 턱은 존중의 턱이다. 어린이들이 교실 밖에 나가서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건, 나이가 적은 사람이건, 어떤 위치나 차림, 성별의 사람이건, 존중의 턱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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