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상적인튀김요리 Aug 07. 2024

교실이 운동장이라면

[교실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4)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어디야?” 

    

물으면서도 선택지가 별로 없는 닫힌 질문인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뭐, 도서관, 과학실, 컴퓨터실 그런 이름들이 나오겠거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차, 질문 자체가 어려웠다. ‘공간’ 개념은 아직, 낯선 개념이다. 쉽게 설명해 주기로 한다.     


“그러니까, 음, 너희들이 자꾸 가고 싶은 곳? 거기가 어디야?”     

“아! 뒷마당이요. 항상 그늘이 있어서 시원하게 피구 할 수 있어요.”

“그 도서관 넓은 의자요. 의자 되게 푹신해요.”

“당연히 신발장이죠. 신발 갈아 신으면 신나는 일이 생기잖아요.”

“저는 신발장 쪽 돌담이요. 만날 학교 끝나면 거기서 놀아요.”

“작년 선생님네 교실요. 아직도 거기서 모여요.”     


누군가 역동성은 답변이 만든다고 했는데, 누구더라. 오히려 내가 ‘공간’ 개념을 너무 좁게 생각한 건 아닐까. 기껏해야 몇 군데로 답변이 맴돌 줄 알았는데 짐짓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내가 부끄러워져 머쓱해진다. 선택지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공간, 실은 내겐 공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공간들이 어린이들 입가에 떠올랐다. 선생인 내가 바라보는 학교와 어린이들이 생각하는 학교는 아무래도 다르다. 


어린이들이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엉뚱하다. 벽과 기둥, 문과 창 따위로 구분 짓는 대신 자신을 가운데 두고 새로이 공간을 해석한다. 그것이 어린이들이 학교 속 공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일 것이다. 사실, 엉뚱한 건 어린이들이 아니라 내 굳어버린 공간 개념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누구 하나 우리 교실을 답하는 어린이가 없다. 섭섭하네. 그새를 못 참고 되묻는다. 어쩌면, 유도 질문이랄까.     


“그럼, 우리 교실은 어때?”

“음, 좋죠?”     


눈치 좋은 어린이 몇이 좋다고 답해준다. 그러면서도, 결코 뜻을 굽히지는 않는다.     


“그런데 밖에 나가는 건 더 좋죠.”     


확실히, 교실보다는 교실 밖이 좋은 어린이들이다. 사실, 어린이들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교실이다. 그렇지만 가장 좋아하는, 좋아했던 공간으로 교실을 뽑는 이는 많지 않다. 어린이들도 그렇고, 어른들도 그렇다. 나 역시, 교실 밖 운동장이나 급식실, 매점 등이 떠오르지, 교실은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교실이 주는 막막함 때문일까.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에도 형광등에 의지해 가만히 책상에 앉아야만 하는 억울함 때문일까. 우리는 늘 해방을 꿈꾼다.


그런데 막상 해방되고 나면, 청개구리처럼 학교가 애틋해진다. 떠나온 학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치열했던 그때의 순간 대신, 마음속엔 평화로움이 절로 핀다. 해가 기울어 갈 즈음. 해가 넓게 들어 기분 좋은 따뜻함이 비치는 운동장. 창문에 걸려 누군가를 향해 기분 좋은 손을 흔드는 선생님. 옹기종기 모여 재잘대는 새들처럼 웅성거리는 어린이들. 매번 골대를 빗나가는 축구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흘리는 어린이들. 주인을 알 수 없는 책가방들이 아무렇게나 모여있는 농구대. 술래잡기의 무대가 되기를 기다리며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놀이터. 모든 학교 풍경은 한데 모여 저마다의 평화로움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바랐던 해방은 뭘까? 이것이 바로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건가.


언젠가 EBS에서 수능을 앞둔 한 수험생이 자신은 하늘을 보지 않는다며, 수능을 앞두고 괜히 동요할까 두려워서 그렇다고 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스치듯 지나간 순간의 장면인데 아직까지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이후로, 나는 맑은 하늘을 보면 내 삶과는 상관없는 그가 떠오르곤 했다. 학생으로서의 고된 날들을 맑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교실에서 견디고 견뎠을, 그가 떠올랐다.


유난히 맑았던 하늘 아래 넓게 뛰노는 우리 반 어린이들을 보면서, 이 어린이들도 점점 하늘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겠지 싶어서, 두려웠다. 난 결국 하늘을 보는 걸 가르치는 선생인가, 하늘을 보지 않는 걸 가르치는 선생인가 망설였다. 그리고 내 기억 속 그 수험생도, 수능이 끝나 어쩌면 이제는 대학 생활도 마쳤을 지금도, 교실을 영영 떠났을 지금도, 여전히 늘 그랬듯, 하늘을 보지 않고 있을 것만 같아서 쓸쓸했다.


그러면서도 문득, 내가 하늘을 보며 그를 떠올리는 건 그가 기억에 남아서가 아니라 나 역시 하늘을 보며 그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무언가에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겨우 해방된 학교라는 공간을 멀리서 바라보며 평화를 얻는 건 그곳에서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저마다의 아이다움을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순간마다 순수하고, 솔직했던 그때가 떠올라 조금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란 걸. 내겐 학교가 직장이지만 그런 나 역시 퇴근길에 멈추어 서서 돌아보는 학교의 모습에서 늘 위안을 얻는다.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하면서도 여전히 순수했던 기억이 어른이 된 나와 함께 하는 것 같아 그렇게 내심 안심한다. 교실에서의 해방, 학교에서의 해방이란 결국, 나다움을 찾는 것이리라.


교실이 운동장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누구나 교실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어린이들이 자유와 행복, 즐거움, 흥미를 느낄 수 있을 운동장 같은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하늘 아래, 자유롭게 살아가며, 마음껏 동요하는 어린이들이었으면, 그렇게 하늘을 떠올리고, 하늘을 보며 사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물며 그렇지 않더라도, 학교를 보는 순간만이라도 자신의 어린 시절의 평화를 추억하면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느닷없이 계획에도 없던 말로 화답한다. 하늘을 보는 걸 가르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 그럼 3교시는 밖에서 수업할까?”

“우와! 너무 좋아요!”   

이전 03화 학교 괴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