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세상에, 영광은 이 순간을 수천 번은 상상했었다. 1등이 보통 16억 원이라고 하니 당첨이 된다면 우선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집을 사고 차를 사야지, 2등 4천만 원이라도 타게 된다면 그건 그냥 빚을 갚아야지,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영광은 근 십 년 동안 매주 5천 원을 투자했다. 그동안 자신의 최고 당첨 금액은 5만 원이었다. 그것도 딱 두 번. 영광은 그때마다 당첨금을 돈이 아니라 새로운 로또 용지로 교환했지만 더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당첨금이 이월된 건 근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 로또 시장은 회당 당첨자가 너무 많아서, 당첨금이 너무 현실적인 금액이라서 비판을 받고 있었다. 로또가 3주나 이월되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또 로또를 사는 사건이 벌어졌고, 덕분에 영광의 당첨금은 무려 478억 원, 세금을 제해도 320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번개를 맞을 확률보다 더 낮다고 알려진 로또 1등에 당첨되다니, 영광은 방바닥이 자꾸만 승천하는 것 같아 어지러웠다. 전날 특별한 꿈을 꿨던 기억도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과 여느 날과 같은 토요일을 보내고 느긋하게 맥주를 한잔 하며 습관처럼 당첨번호를 확인했던 것이다.
영광은 우선 아이들을 재우다 같이 잠이 든 아내, 재수를 깨워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을 땅으로 끌어내릴 매개가 필요했다. 하지만 재수를 깨운다는 건 또 대단한 문제였다. 재수는 밤에 영광이 건드리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시국에서는 재수의 얼굴에 물을 들입다 붓는대도 이상하지 않을 거였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재수의 다리를 영광은 살살 흔들었다.
-일어나 봐, 얼른. 일 났어.
놀란 재수가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뭔데?
-나와 봐, 잠깐.
재수는 금세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이 사십을 넘기면서 재수의 얼굴은 보기 좋게 살이 올랐던 볼이 홀쭉하니 늘어졌고, 몸매는 점점 둥글어져서 동네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 구분이 어려울 것 같았다. 영광은 그런 재수를 슬쩍 훑으며 곧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당면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광은 조심스레 로또 용지를 내밀었다. 마치 방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을 살피기까지 했다.
-이거 보여?
-뭔데? 당첨이라도 된 거야?
-당첨! 그래 당첨이야.
영광의 낮은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얼마?
-1등!
영광은 컴퓨터 앞으로 재수를 이끌었다. 모니터 안에는 기다란 숫자가 쓰여 있었다. 푹 꺼진 재수의 눈이 점점 커졌다.
-뭐야? 진짜야?
재수가 눈을 비비며 재차 물었다.
-어.
재수는 영광의 손에 들린 로또 용지를 빼앗았다. 컴퓨터 화면 속 숫자와 종이 속 숫자를 맞추는 재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진짜네? 어떡해? 어머나 어떡해?
재수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 영광도 마찬가지였다. 흥분한 재수가 거실을 오가며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영광은 다시 어지럼증이 일었다. 영광은 뭐든지 감정이 앞서는 재수에게는 당분간 알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영광은 회사에 병가를 냈다. 영광은 같은 회사를 벌써 십오 년째 다니고 있었다. 영광의 고향은 대규모 온천 관광단지였고 영광의 부모 역시 그 안에서 제법 규모 있는 식당을 운영했다. 영광은 관광 리조트에서 일했다. 고향 근처 전문대학의 호텔관광학과를 졸업하자마자 구한 일자리였다. 고객 응대를 시작으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다가 과장이 된 건 3년 전이었다. 영광은 리조트의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홍보를 담당했다. 공휴일과 저녁이 없는 삶, 젊은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 따분한 일이었지만 영광은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본 적이 없었다.
가족을 지키는 일이란 영광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안락하게 신혼집만 만들어놓으면 되겠다는 생각은 아이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새로 쓰기를 해야 했다. 분유, 기저귀를 시작으로 장난감, 동화책, 유모차 등 하나하나 필요한 것이 생기더니 자동차, 집의 평수 등 규모를 늘려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영광은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남들의 당직 근무도 대신하는 일이 흔했다. 멀쩡하게 가족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그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영광과 재수는 최대한 단정하게 차려입고 자신들의 애마, 소나타에 올랐다. 십 년 가까이 17만 km를 탄 차였다. 중고로 소나타를 샀을 때 영광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재수와 아이들을 태우고 안 가본 곳이 없는 차, 4인 가족이 타기에 좁은 감이 있었지만 차는 여전히 튼튼하게 잘 굴러갔다. 새 차를 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보다 시급한 문제가 차고 넘친다는 게 문제였다. 그랬던 그에게 300억이라니, 억!, 새 차뿐이랴, 영광은 재수의 장롱면허도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새빨간 포르셰를 재수에게 선물할 것이다.
출발 전 두 사람은 약국에 들러 우황청심환을 샀다. 차 안에서 우황청심환을 까먹으며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마주 보고 웃었다. 최대한 평소와 다름이 없어야 했다. 돈이 통장에 입금될 때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영광은 내비게이션에다 농협중앙회 본부를 찍고 차를 출발시켰다. 도착 시간은 두 시간 후였다.
-괜찮아?
영광이 먼저 물었다.
-어, 괜찮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인생 한 방이라더니, 일이 이렇게 풀리네.
-그러게, 자기도 고생 많았어. 살면서 신영광이 제일 잘한 일이네. 흐흐. 근데 돈이 통장에 입금돼야 실감이 날 것 같아.
-그래, 서울까지 좋은 생각 하면서 가자. 앞으로 우리 어떤 식으로 돈을 쓸지 생각해 봤어?
-어제부터 밤새 그 생각을 했는데, 우선 빚을 갚아야지.
-빚 갚는 건 당연하고, 그다음엔?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나?
영광과 재수는 불과 일 년 전에 지금 사는 집을 마련했다. 결혼하고 오래된 빌라, 아파트 월세, 전세, 차근차근 순서를 밟으며, 살림 늘리는 재미를 소소하게 느끼던 차였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와 가까운 아파트 단지의 저층이 급매로 나오는 바람에 건진 뜻밖의 소득이었다. 지방 신도시라서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재수는 아이들이 성장해서 독립할 때까지 더 이상 이사 다닐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새집이라니, 그렇다면. 재수는 관성의 법칙을 깨부술,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자기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기는 우선 직장을 그만둘 거지?
재수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래, 그럼 우리 살 곳부터 생각해 보자. 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역을 바꿀 수도 있는 거잖아.
-나도 그 생각했어. 애들 교육도 그렇고, 내 직장 문제만 아니라면 아예 다른 곳에서 살 수도 있지.
-지역이 아니라 나라를 바꾸는 건 어때?
-이민을 가자는 거야?
-가능하지, 이모가 있는 호주나 파라다이스 뉴질랜드, 아니면 찬이가 있는 스페인으로?
결혼해서 호주에 정착한 이모 덕분에 재수에게 꿈의 나라는 언제나 뉴질랜드였다. 이모의 말에 따르면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가 바로 뉴질랜드였다. 무한 경쟁과는 거리가 먼, 미세 먼지가 없는 나라. 이민자에게도 친절한 나라.
스페인에 사는 찬이는 재수의 사촌동생이었다. 재수와 고향에서 함께 자란 찬이는 대학 졸업 후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다음 아예 스페인에 눌러앉았다. 그곳에서 작은 여행사를 차린 찬이는 십 년이 넘도록 그 나라 영주권을 갖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는지 아름다운 사진과 영상을 자주 SNS에 올렸다. 찬이가 한번 놀러 오라고 말할 때마다 재수는 자신의 이번 생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인 것만 같아 입맛만 다셨었다.
-이민은 어렵지.
영광이 말했다.
-뭐가 어려워?
-애들은 어떡할 건데?
-애들이 왜? 아이들도 선진국에서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지.
-선진국 같은 소리 하네. 이번에 코로나 터져서 못 봤어? 이민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이 나라에서 모국어를 쓰며 사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몰라서 그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게 다 돈 없이 이민을 가서 그래. 세탁소나 웨이트리스 같은 일하면서 살아가니까. 다 돈 문제, 계급의 문제라고.
-우리는 뭐 다를 것 같아? 자기 영어 잘해? 말이 안 통하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어?
-일을 왜 해? 여행 다니고 언어 배우고 놀러 다닐 건데, 나는?
-철없는 소리 하고 있네. 또.
-뭐? 내가 철이 없어?
-일이 사람한테 얼마나 중요한 지 알아? 소일거리라도 자기 일을 해야 한다고 사람은.
-좋아. 자기는 좋아하는 일 실컷 해. 나는 일 안 할 거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영광은 차창을 다 내리고 환기를 시켰다. 6월의 창밖은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영광은 재수의 손을 잡았다. 재수는 영광의 손을 뿌리치고 영광의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
-아아.
영광은 소리를 지르며 웃었다. 재수도 웃었다. 재수는 오랜만에 영광이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살았던 영광은 다른 남자애들과 다르게 성질이 온순했고 재수가 힘들 때마다 곁에 있어주던 아이였다. 이성이라기보다는 동성 친구에 가까웠던, 결혼으로 엮이지 않았더라도 평생 친구로 남았을 것 같은 사람. 하지만 그와의 결혼 생활은 재수가 상상한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결혼의 낭만은 진즉에 사라졌고 그들 두 사람에게는 이제 아이들 부모로서의 책임감만이 남은 것 같았다.
그런데 로또 당첨이라니, 재수는 영광이 평소에 로또를 사는 습관도 반기지 않았었다. 어딜 가나 로또 명당만 나오면 사 나르던 종잇조각, 그의 바지나 셔츠 주머니에서 그 조각을 발견할 때마다 재수는 영광의 지질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혀를 찼었다.
-재수야, 흥분하지 말자. 천천히 생각해도 돼. 그런 거는.
-알아. 나도. 근데 자기하고 의견 맞추기는 쉽지 않을 것 같네. 결국 모험심의 문제인 듯해. 나는 또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한 미래를 꿈꾸는데, 자기는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의 행복을 논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팍팍 드네.
-빙고!
농협 본사 3층 복권사업팀에서의 당첨금 입금 수순은 빠르게 진행됐다. 이번 당첨금이 이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주 로또 당첨이라는 사건은 그들에게 하나의 사무일 뿐인 듯했다. 텔레비전에나 나올 법한 잘생기고 믿음직스럽게 생긴 남자 직원이 보험 상품과 투자 상담을 해주었다. 버퍼링 과부하가 걸린 두 사람은 그것까지 생각할 경황이 없었다. 영광은 그래도 직원의 마지막 말 정도는 가슴 깊이 간직하기로 했다.
-로또의 저주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로또 당첨금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은 불행하게 산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돈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죠. 그나마 그것을 극복하고 소소하게 살아가는 분들도 당첨금 이상의 재산을 증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특별한 소신이 없으시다면 저희 금융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직원은 영광과 재수의 얼떨떨한 표정을 잠시 살피고 말을 이어갔다.
-많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예외가 없다고 하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명함을 내밀며 고개를 숙이는 직원은 영광과 재수를 못 배운 사람 군에 포함시켜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것보다는 당장 통장 잔액을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느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영광의 통장에 찍힌 돈은 정확히 320억 5천9백만 330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소나타에 올랐다.
-사모님,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영광이 장난을 쳤다.
-음……. 우선 내려가는 길에 차를 바꾸자.
재수는 재빠르게 돈 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돈을 쓰자고?
-어때?
-아니야, 며칠 시간을 벌자. 지금부터 큰돈을 쓰면 로또가 당첨됐다고 광고를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우리가 로또가 된 줄을 누가 알아?
-요새는 어느 지역에서 누가 얼마를 탔는지 다 나와서 금방 알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아주 골치가 아파진다고. 아마 자기 지나간 첫사랑도 찾아올걸?
-그럼 방방곡곡에 알려야겠네.
두 사람은 실없이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할 계획이야?
재수가 물었다.
-우선 잠잠해질 때까지 며칠만 참자. 그리고 집에 가서 우선 지금까지의 삶을 좀 정리하자.
-정리?
-어. 회사도 정리하고, 이사도 가고, 빚도 청산하고. 천천히 결정해도 절대 늦지 않아.
-그렇긴 하네. 좋아. 그러자.
-우선 점심을 먹자. 평소에 먹고 싶었는데 비싸서 못 먹은 거 한 가지만 말해봐.
영광이 호기롭게 말했다.
-당신은?
-그대가 결정해. 오늘은.
-음……. 그럼 소갈비 먹자. 어제부터 머리를 너무 굴렸더니 기 딸려. 남의 살을 좀 먹어야겠어.
두 사람은 결국 집 근처까지 내려와서 평소 비쌀 것 같아 간판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식당에 들어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소갈비를 4인분이나 먹어 치웠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전 상견례 때 먹고 한 번도 제대로 양껏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었다. 갈비 맛은 역시나 기가 막혔다. 소갈비 값을 지불하는 영광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해 보였다. 생애 최초로 돈의 위력을 소고기 몇 그램으로 체감하다니, 재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녁은 뭐 먹을까?
영광이 들쑥날쑥한 이를 드러내고 자동차 룸미러를 확인하며 물었다.
-뭐야? 점심을 먹자마자 다음 끼니 걱정을?
-으하하, 어때? 그동안 못 사준 거 다 사주고 싶어서 그렇지.
-그럼 저녁엔 애들 데리고 랍스터 먹으러 가자.
-오, 랍스터?
아이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음식은 언제나 랍스터였다.
-나는 이제 살을 좀 제대로 빼야겠어. 오늘 랍스터까지만 푸지게 먹고 내일부터는 진짜 한방 다이어트라도 알아봐야겠다. 미희 보니까 진짜 살 많이 빠졌더라, 피부도 탱탱하고. 걔가 추천해 준 거 나도 해보려고. 그래도 되지?
-당연하지. 그런 거야 문제없지. 제일 좋은 거 받아. 이왕이면.
미희는 재수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어릴 때부터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늘 재수의 라이벌 상대였고, 고등학교 때 재수가 좋아하던 교회 오빠와 사귀기까지 했던 눈엣가시 같은 친구였다. 재수는 몇 달 전 모임에서 만난 미희의 군살 하나 없는 몸매와 더욱 우아해진 얼굴을 마주했던 것이다. 그날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미희가 앉자마자 질문들이 쏟아졌다. 미희는 수줍음도 없이 자신이 유지하는 미의 노하우를 공개했다. 재수는 휴대폰이라도 꺼내서 메모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재수는 티 내지 않으며 귓등으로 들리는 화장품 브랜드와 유튜브 채널을 외우려고 노력했었다.
-돈이 좋긴 하구나. 선진국에서도 최상층은 비만이 없다고 하잖아. 우리 지민이도 요새 살이 너무 붙었어. 가난이 대물림되듯이 비만도 대물림되는 게 맞는 것 같아.
재수는 첫째 아이 지민이 최근 살이 부쩍 올라 반찬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영광의 부모는 물론이고 재수의 엄마 그리고 재수의 자매들은 대부분 과체중이었다. 과체중일 뿐만 아니라 피부며 머리숱, 건강관리, 모든 면에서 허술했다.
-왜 혼자 웃고 있어? 뭐 좋은 생각이라도 들었어?
명예 회복의 순간을 즐겁게 상상하던 재수에게 영광이 물었다.
-아니, 그냥. 돈 쓸 생각에 좋아서.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은 돈 쓰는 일이 확실해 보였다.
영광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빚을 청산해 나갔다. 은행 빚이며 당일 카드 값까지 모두 깨끗이. 하나하나 정리될 때마다 영광은 대단한 희열을 느꼈다. 자신이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돈이었다. 영광은 빚 걱정으로 자면서도 가위에 눌렸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평생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처럼 간직했던, 무덤까지 따라올 것 같았던 어마어마한 숫자에서 드디어 해방이라니.
영광은 얼마 전 시작한 몇 안 되는 주식은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올라도 그만 안 올라도 그만인 돈이었다. 영광의 마지막 희망이자 신분 역전의 꿈을 대변하던 주식은 더 이상 영광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빚이 청산되고 나서야 비로소 영광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려서부터 영광은 특별한 꿈이 없었다. 장래희망을 집요하게 묻는 어른들에게 영광은 언제나 ‘회사원’이라고 대답했다. 회사원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슨 회사원이라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그냥’이라고 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저마다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들, 일이 끝나면 회식도 하고 주말에는 가족동반으로 야유회도 가는 그런 회사. 영광은 자신이 커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꿈이 없었다면 뭐 하고 싶은 거 없었어? 뭐 할 때 제일 신났다던가, 그런 거는?
서로에 대해 궁금증이 많았던 시절에 재수가 물었었다. 장래희망이 회사원이었다는 대답을 듣고 한창 배꼽을 잡고 웃은 다음이었다. 영광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게 뭐였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냥 친구들하고 피시방에 다 같이 모여서 게임하고 그럴 때? 아니면 농구할 때? 스포츠 경기를 볼 때?”
영광은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영광은 허약한 체질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농구를 좋아했다. 영광은 그나마 자신이 어린 시절 밤낮 농구라도 해서 이 정도 큰 거라며 자신의 175cm의 키가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재수도 영광이 동네 아이들과 농구하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골 성공률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팀원들에게 요리조리 패스하며 센터에서 활약하는 영광에게 재수는 처음으로 남자다운 매력을 느꼈었다.
-음……. 그렇다면 게임 프로그래머나, 농구 선수, 스포츠 관련 일을 했으면 좋았겠네.
-구재수 너는? 어려서부터 뭐 하고 싶은 게 있었어?
-나? 나는 너무 많아서 탈이었지. 선생님도 되고 싶었다가 언론인이 되고 싶었다가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가 작가가 되고 싶었다가…….
재수가 허공을 보며 몽롱하게 말했다. 영광은 재수의 그런 허세와 낭만을 좋아했다. 자신에게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면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재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하나도 이룰 수 없는 인물의 대표 격이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대학도 바꿔가며 7년이나 다녔고, 아직도 작가가 되겠다며 어린애들을 놔두고 짬짬이 사라졌다. 겨우 하루를 못 참고 집으로 돌아온 재수는 잔뜩 히스테리를 부리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을 물고 빨았다.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언젠가는 책방을 해보겠다고 전국으로 책방 투어를 다니다가 방 한구석에 책만 잔뜩 쌓아놓기도 했다. 이참에 영광은 재수에게 근사한 책방을 차려주고 싶었다. 그곳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실컷 보고,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면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재수는 제 엄마 영숙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해 만 65세가 된 영숙 씨는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해 대기 중이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이 식당 저 식당에서 전전하며 생활비를 충당하던 그녀였다. 무릎 관절이 아파서 그마저도 쉬는 중이었지만. 영숙 씨의 평생소원은 마당이 있는 아담한 전원주택을 갖는 것이었다. 영숙 씨는 어딜 가나 근사한 집만 보면 같은 말을 했다.
-저런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술주정뱅이 남편을 만나 평생을 신용불량으로 살았던 영숙 씨. 영숙 씨가 지금 사는 17평짜리 낡은 아파트도 재수의 명의였다. 당연히 아파트 담보 대출자도 재수였고, 영숙 씨는 어렵게 이자만을 갚아 나가고 있었다.
-웬일이냐?
여느 때처럼 영숙 씨의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냥, 엄마 뭐 하나 해서…….
재수는 영숙 씨에게 로또 당첨 사실을 털어놓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영숙 씨의 빚을 갚아주고 그토록 원하는 집을 하나 사준다면, 하지만 그다음은? 재수의 언니들도 힘들게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들도 역시 나사가 하나둘 빠진 얼간이들과 결혼하더니 지금은 서로 연락조차 뜸한 사이가 됐다. 영숙 씨를 도와주고 나면 언니들도 하나씩 구제해 줘야 할 것이고, 돈을 준다고 해도 그들이 자기 삶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뭐 하기는, 근데 그거 수급자 신청한 거 되려나……자식들, 사위들 소득까지 다 본다고 하던데……. 망신만 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엄마 실제 부양 자식도 없잖아. 요새는 기준이 많이 완화돼서 될 거야.
-세상 창피해서…….
-아니, 왜 창피해?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운이 없어서 돈이 없는 거지, 그게 엄마 탓이야?
-그런 거니?
-그럼 당연하지, 그러니까 당당하게 도움받아, 엄마 평생 힘들게 일했잖아. 그럴 자격 충분히 있어. 나라가 돈을 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엄마, 나 돈이 좀 생겼어……엄마 아파트 대출받은 거 갚을 수 있을 만큼.
-돈이 어디서 생겨? 뭐 로또라도 됐어?
재수는 속으로 뜨끔했다.
-어, 뭐 비슷한데, 우리 영숙 씨 대출금 통장 메워주려고 전화했지. 이제 맘 편히 발 뻗고 자라고.
-아니, 그 큰돈이 어디서 생겼어? 정말이니?
-응, 신 서방 주식도 주식이고, 10년 만기 적금도 탔고, 이래저래 목돈이 생겼어. 빚 갚을 정도는 돼서, 대출 통장 이번에 다 없애려고 해.
-야무지게 언제 돈을 모았어……잘했네. 나까지 신경 써주고 신 서방한테 고맙다고 전해. 네 말대로 이제 발 뻗고 자겠다. 그거 이자만 안 나가도 살겠다. 이제.
재수는 영숙 씨와 전화를 끊고 한동안 부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한동네에서 살면서 알고 지내던 구 씨 집안, 버젓이 식당을 가지고 있는 영광의 가족과 사돈이 되면서 늘 주눅 들어 있던 영숙 씨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당분간 집 걱정만 없다면 영숙 씨는 정부에서 주는 노인수당과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고 앞으로 크게 건강이 훼손되지 않을 때까지 무난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재수는 영숙 씨에게 말한 것과 달리 누구나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부엌에 난 창으로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파트 저층에 살면서 불편한 게 있다면 바로 소음이었다. 앞뒤로 뻥 뚫린 공간에 마련된 아파트 놀이터에는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북적였다. 심심찮게 지나다니는 오토바이도 문제였다. 아파트 지상 공원은 분명 차량과 오토바이 출입 금지 지역이라고 쓰여있지만, 공공연히 배달음식은 지상으로 오갔다. 입주 초기에 재수가 관리 사무실에 드나들며 아무리 건의해도 고쳐지지 않은 문제였다. 분명히 큰 희생을 치르고서야 고쳐질 문제라고 재수는 생각했다.
재수는 이제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이 지역 사람들의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농토였던 곳을 개간해 급하게 구색만 갖춘 신도시. 그들은 재수처럼 새 아파트에 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형편이었고, 남의 일에는 관심을 둘 여유도 마음도 없어 보였다.
영광은 여느 때처럼 출근을 하고도 머릿속으로는 갖가지 집을 짓고 있었다. 최대한 표 나지 않게 삶을 업그레이드해야 했다. 영광 나름대로 가족 챙기기에도 나섰다. 오래도록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늙은 부모를 위해 드디어 효도다운 효도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영광은 식당을 하지 않는 제 부모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돈을 쌓아놓고 집에서 마냥 놀고 있을 두 사람, 그들의 미래까지 자신이 책임질 수는 없었다. 식당은 영광의 부모가 평생 일군 일터이자 삶의 터였고, 그들의 평생지기들이 모여서 먹고 떠들 수 있는 사랑방이었다. 그 안에서 제 부모의 삶은 그리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식당이 없어진다면 그들은 금세 시들해질 것이다.
영광은 제 부모의 삶은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시간차를 두고 목돈을 좀 내놓는다면 그들은 좀 더 여유 있게 장사도하고 여행도 가고 할 것이다.
영광은 최대한 울적한 얼굴을 하고 팀장에게 사의를 표시했다.
-무슨 일인가?
팀장은 정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제가 실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아니 사회생활이라고 해봐야 여기가 전부인 사람이, 몸이 안 좋으면 며칠이고 몇 달이고 휴직을 하지, 회사를 그만둘 것까지 있나?
-부모님도 이제 일이 힘에 부치셔서, 쉬면서 식당 일을 좀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역시, 그거구만? 믿는 구석이 있었지, 처음부터?
일을 그만두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팀장의 말대로 영광은 내심 힘들면 식당이라도 물려받으려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마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기댈 곳은 부모밖에 없었다.
영광은 자신이 십오 년을 일한 곳인데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 회사에 약간 서운했지만, 그게 다였다. 더 이상 남이 만들어놓은 규칙이나 제도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돈의 가치는 충분했다.
그들이 비행기를 탄 건 신혼여행 이후로 처음이었다. 심사숙고해서 고른 첫 번째 여행지는 발리였다. 비행시간도 적당하고, 아이들이 종일 바다에서 수영하고 스노클링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재수의 주장이었다.
비행기에 처음 탄 아이들은 일등석이 당연한 양 신이 났다. 재수는 신혼여행으로 갔던 유럽여행을 생각했다. 14시간 동안 좁은 좌석에서 견디던 시간,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생생했다.
-일등석이 좋긴 좋다. 이렇게 넓고 호사스럽게 만들 수 있는 거라면 이코노미석은 뭐 하러 만든 거야? 여기를 좀 줄이고 이코노미석을 늘리던가, 아님 이코노미석 자체를 없애고 좌석 수를 줄여서 다 이렇게 만들던가,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재수가 영광에게 속삭였다. 영광은 주변에 아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라도 있는지 두리번거리던 참이었다. 진짜 부자들은 별로 표시가 나지 않는 것인지 특별한 인상착의는 없었다. 오히려 발리에 간다고 요란하게 꾸민 자기 가족이야말로 그 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안 그런 곳이 있나? 병원도 그렇잖아. 어디나 VIP는 따로 관리하지.
영광도 독심술을 하듯 작게 대답했다.
-아니, 왜 그렇게 하는 걸까? 갑자기 열받네.
-어디든 상위 20%가 먹여 살린다잖아. 다 똑같지.
재수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모든 것은 추억일 뿐, 재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누리기만 하자고 생각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언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장소였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없이 이어져 있고,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곳, 풀빌라에는 정원과 수목원, 수영장까지 갖춰져 있었고, 음식과 마사지는 언제든 신청할 수 있었다. 저녁 시간에 소개된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온 가족이 침을 튀기며 꼭 한번 가자고 했던 곳이었다.
여행 둘째 날 종일 수영을 하고 해산물 요리를 실컷 먹은 아이들은 이내 곯아떨어졌다.
-있잖아, 분명 통장에 돈이 충분히 있고 이렇게 천국 같은 곳을 여행하는데도 뭔가가 불안하지 않아?
와인을 마시며 재수가 말했다. 푹신한 리넨 소파에 느슨한 잠옷만 걸치고 있는 재수의 모습이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영광은 취해가고 있었다. 재수와 잠자리를 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영광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크음……. 나도 불안하긴 해. 이게 현실인지 잘 구분도 안 되고.
언젠가부터 재수는 영광과의 잠자리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영광은 늘 그게 불만이었지만 그저 참고 버틸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장난 삼아 영광이 먼저 재수에게 말을 꺼내면 재수는 나이 들어서 더 이상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며 얼버무렸다. 그때마다 영광은 왠지 자신이 너무 무능해서, 이제 자신에게는 성적 매력이 없다는 소리 같아서 상처를 받았다. 겨우 사랑에 성공하는 날은 재수가 기분 좋게 취한 날이었다.
-아무래도 일을 해야겠어.
재수는 야속하게도 다른 고민에 빠져있었다. 재수는 영광과 단둘이 있는 게 불편했다. 아마도 준호를 만나고부터였을 것이다.
준호는 독서 동아리 강사였다. 재수는 일 년 전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에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지역 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소설가가 육아휴직 기간에 시작한 재능기부라고 했다. 모임에는 재수와 비슷한 또래 여성 열댓 명이 꾸준히 참석했다. 준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준호를 흠모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문학을 전공한 재수가 단연 돋보이는 동아리였고 한 살 어린 준호와 재수는 말이 잘 통했다.
두 사람은 수업이 끝나면 사람들 몰래 따로 만나서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준호가 추천해 주는 책들은 하나같이 재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재수는 점점 뿔테안경 너머 준호의 갈색 눈동자를, 문화 연필을 멋들어지게 돌리는 기다란 손가락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준호도 재수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재수는 준호에게 열리는 마음과 성적 긴장감을 즐기고 있었다. 한동안 들끓다가 사라질 감정이라는 걸 알았지만 재수는 그때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행복을 연장하고 싶었다.
부작용은 부부관계에서 드러났다. 재수의 마음속에 준호의 지분이 커질수록 영광에 대한 마음은 딱 그만큼씩 작아졌다. 재수가 두 사람 모두를 마음에 담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능력자들의 영역이라는 깨달음만이 남았다. 준호와 영광은 이 세상 정반대의 사람들 같았다.
재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광은 아무런 전조 없이 틈만 나면 재수와 자고 싶다는 내색을 했고, 거부당하면 아이처럼 삐쳐버렸다. 재수는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기계적으로 부부 관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연애 기간과 결혼 생활을 거치고도 혈기 왕성하게 성생활이 하고 싶은 영광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끔 안쓰러운 마음에 영광과 관계를 가질 때면 재수의 마음속은 온통 준호로 가득 찼다. 지금 자신을 안고 만지는 남자가 준호라고 생각하면 겨우 마음이 열렸고, 동시에 그런 자신과 영광이 가엽게 여겨졌다. 그런 게 결혼 생활이라는 걸 알았다면 재수는 결단코 결혼이란 걸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수의 마음을 잡아주는 건 언제나 아이들이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들의 천진무구함, 사랑스러움. 재수는 남편 영광의 그늘이 아니고서는 그 소중함을 지켜줄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 이대로 여행만 다니며 살 수는 없지.
영광도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었다. 돈이라는 건 가만히 정체해 두면 도태되는 성질이 있었다, 현금을 잃지 않으면서 앞으로 꾸준히 돈을 불릴 수 있는 곳, 이 나라에서는 부동산 임대업이 답이라는 게 영광의 결론이었다. 영광은 가까운 도시의 목 좋은 곳으로 벌써 세 채의 상가 건물을 점찍어 두었다. 세 군데 모두 꼭대기 층은 영광의 가족이 언제든 기거할 수 있는 아지트로 꾸밀 작정이었다. 재수가 원한다면 글 쓰는 작업실로 주어도 좋을 것이다.
이참에 영광은 경제 공부도 제대로 해볼 생각이었다. 재수의 말대로 전문대학을 나온 이후로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요량이었다. 영광이 자기 계획을 늘어놓자 재수가 덩달아 흥분하며 말했다.
-나도 오래 준비했어. 이런 책방을 해볼까 해.
재수는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보여줬다. 유럽의 낭만적인 책방 사진들이었다. 스노볼 속 세상처럼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진 곳, 재수와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재수는 한동안 글을 썼었다. 글로는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했다. 재수는 글 속의 또 다른 자신에게 무한한 자유를 부여했다. 주인공들은 이혼을 하고 바람을 피우고 그것도 싱거우면 전혀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재수는 자신이 지극히 현실형 인간인 데다가, 극도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가 만들어 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결국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감정을 소모하고, 사랑에 빠지고, 그러다가 늘 현실 언저리에서 주저앉았다. 도로 답답해진 재수는 새 창을 열어 다시 쓰기를 반복했지만 그것들은 마치 단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질기게 맞물려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그녀의 인생처럼 이야기 역시도 특별해지지 않았다.
이참에 재수는 생각했다. 쓰기를 그만 포기하고 그냥 읽자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공감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팔고 나누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시 쓰고 싶은 날이 오겠지. 재수는 적어도 남의 글 안에 들어있는 보석을 찾아내고 남에게 전달하는 데에는 재능이 있었다.
-우리에겐 죽을 때까지 쓸 돈이 충분하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돈을 벌 목적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 취향에 맞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사는 게 좋겠어. 책방을 잘 꾸리면 청소년이 된 우리 아이들도 오가며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지역 사회에도 보탬이 되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돈은 지금부터 정확히 반으로 나눠서 관리하면 어떨까?
재수의 의견이었다.
-반? 그게 무슨 소리야?
영광은 당황했다. 당연히 가족을 위해 쓸 돈이었지만 부부가 반으로 나눠서 소유한다는 건 또 다른 의미였다. 엄연히 복권 당첨은 자신의 공이었다.
-자기는 부동산 임대업을 할 거라며, 나는 책방을 운영하고.
-그런데?
-재산을 아예 따로 관리하자고, 그래야 성과가 나든지 실패를 하든지 결과가 투명할 거 같아서. 일할 맛도 나고.
-그럼 애들하고 같이 살고 쓰는 돈은?
-그건 지금처럼 생활비로 쓰는 거니까 공동으로 내면 되지, 매달 정확하게 둘이 반씩 생활비를 충당하는 거야.
-음……우리가 같이 살긴 하는 거지?
영광은 웃으며 말했지만 불안해졌다.
-물론이지, 아이들 클 때까지는 같이 살아야지. 그 이후는 그 이후에 생각하자.
-또 그 소리야?
영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젠가부터 재수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만, 그 이후로는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자는 말. 농담 반 진담 반이라는 걸 알았지만 영광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황혼 이혼이나 졸혼 같은 건 텔레비전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영광은 재수가 없는 삶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십 년 후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고 나간 집에서 다시 재수와 신혼 때처럼 알콩달콩 사는 게 영광의 꿈이라면 꿈이었다. 지금까지 결단코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린 적도, 그럴 만한 사람이 나타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돈을 쌓아놓고도 재수는 같은 말을 하는 거였다. 그것도 재산의 반을 요구하면서.
-왜? 싫어?
재수가 단호하게 물었다.
-어, 싫어. 아이들 클 때까지만 같이 살자는 사람한테 왜 돈을 줘?
-헐……. 지금 ‘네 돈 내 돈’ 하자는 거야? 자기가 당첨됐으니까 자기 거라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그게 내 덕이지, 당신 덕은 아니잖아?
-아, 그래? 어이상실이다. 진짜. 돈이 생기니까 이제 아주 솔직해졌네? 지금까지 누구 덕에 이렇게 살림을 늘리고 남들처럼 버젓이 사는 건데, 이제 와서 네 돈 내 돈이야? 너 만나서 내 꿈 다 접고 집에 눌러앉은 게 누군데?
흥분한 재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또 그 소리, 지겹지도 않냐? 누가 눌러앉으래? 다른 사람들은 애들 키우면서 일만 잘하더라. 살림을 늘려? 우리 집에 빚이 얼마였는지 알아? 너의 그 허영심 때문에 남들 사는 거 다 사 나르느라 파산 직전이었어. 기사회생으로 벼락부자 만들어줬더니 겨우 한다는 말이 아이 클 때까지만 같이 살아? 그럼 너한테 나는 뭐야? 허수아비야? 진짜 쇼윈도 부부야 우리는?
난생처음 영광의 반격에 놀란 재수는 눈앞의 재산과 인생 역전의 기회가 날아가는 것 같아 아차 싶었다. 영광의 말이 다 맞는 건 결단코 아니었지만, 그동안 자신이 영광에게 원하던 게 진짜로 허수아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아빠로서의 본분과 허우대, 그 허우대 안에서 제도권 내의 안위를 누리며 산 것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억만 금의 돈이 주어졌대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 사이가, 앞으로 돈을 물 쓰듯이 쓰면서, 혹은 자기가 진짜 원하는 걸 하면서는 좋아질 수 있을까? 적어도 영광이 원하는 부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
물론 돈이 생기면서 영광이 달라 보이긴 했다. 적어도 무능력이라는 타이틀에서는 벗어났으니까. 하지만, 재수가 원하는 미래 청사진에 영광의 지분은 거의 없었다. 역시나 아이들 아빠로서의 본분과 허우대만 지켜준다면 재수로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 영광은 그걸 직시한 것이다. 재수는 정면승부를 걸었다.
-미안해. 쉽게 말해서. 나는 우리 미래를 확정 짓고 싶지 않았어. 아이들이 성장하려면 적어도 우리가 십 년은 더 메어있어야 할 거고, 나는 그때까지는 우리 둘이 함께 아이들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 둘 사이가 어떻든 그게 아이들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우리 관계도 그냥 물 흐르듯이 놔뒀으면 좋겠어. 자기 말대로 아이들이 큰 다음에, 아니 우리가 나이 들면서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 지금은 이런 국면을 맞은 거고. 자기가 싫다면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지금 헤어진다고 해서 좋아질 게 있을까?
-누가 헤어지재?
영광이 발끈했다.
-그럼 뭐야? 자기는 자기 덕이니까 자기가 재산 관리하겠다는 거잖아. 그럼 나는 경제권을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어? 자기가 주는 돈 받아서 예전처럼 살림만 하면 되는 건가? 돈이 얼마든 너의 보살핌 안에서 나는 또 숨이 막힐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돈을 반으로 나누면 어떻겠냐는 거야. 자기가 그게 아깝다고 하니까 내가 할 말은 없지만…….
-누가 돈이 아까워서 그렇대?
영광은 재수의 의견에 이미 반은 넘어온 것 같았다.
이듬해 영광과 재수는 무사히 광역시로 이사했다. 도심과 주변부가 적당히 발달해 있고 학군이 좋은 곳이었다. 서울까지는 KTX를 타고 50분 거리였다. 두 사람에게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돈만 믿고 진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이번에도 재수의 입김이 최대한 많이 적용됐다.
새로 집을 지을 돈은 충분했지만 영광과 재수는 건축을 새로 할 안목이 없었다. 대신 도심 가까운 곳에 3층짜리 상가주택을 매입했다. 1층은 재수가 운영하는 책방이었고, 2층부터는 복층으로 연결된 살림집이었다. 1층 뒷문으로는 널찍한 정원도 있었다. 재수는 그곳에 화단과 텐트를 칠 수 있는 야영장, 그리고 작은 수영장을 마련했다. 아이들은 무엇보다 크고 화려해진 집과, 활력을 찾은 제 부모의 분위기만으로도 매일매일이 설레는 듯했다.
재수는 책방의 가구나 조명, 작은 소품 하나까지 가장 희귀하고 좋은 것으로 채워 넣었다. 돈의 제약이 없으니 재수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재수가 가장 공을 들인 공간은 자신이 들앉아서 글을 쓸 작업실이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자신에 의한 글이 탄생하는 곳. 재수는 공간만 마련했을 뿐인데도 벌써 등단 작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을 옮기고 책방을 차리고도 영광이 반을 뚝 떼어준 통장 잔고는 충분했다. 재수는 마당에서 키우게 될, 곧 책방의 마스코트가 될 강아지도 한 마리 알아볼 작정이었다.
재수의 새로운 출발을 누구보다 응원해 주고 도와준 건 준호였다. 그는 책방의 구성과 연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재수는 책방에 준호가 주도하는 글쓰기 동아리도 개설했다. 꿈에서나 그리던 아늑한 공간에서 준호와 모임을 주도하며, 재수는 로또의 저주 운운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결국 행복의 모양도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평소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매기며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갖더라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재수는 만족스럽게 자신이 만든 공간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영광은 이사를 하며 조깅을 시작했다. 벌써 몇 달째 몸에 좋은 식단과 조깅으로 5킬로그램이나 체중이 줄었다. 새로운 취미로 골프도 시작했다. 골프장에는 영광과 말이 통할 것 같은 분위기 있는 여성들이 많았다. 영광은 햇빛과 운동으로 단련된, 생기 있는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들 중 한두 명은 실제로 언제든 영광이 원한다면 적당한 선에서 섹스도 가능했다. 쿨하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나이스 했다.
무엇보다 영광이 반가웠던 건 재수의 긍정적인 기운과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 언제나 자신을 깔아뭉개듯 쳐다보는 버릇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영광은 통장의 긴 숫자가 가족 구성원 각자의 행복한 시공간으로 빠르게 환산되는 걸 비로소 체감했다. 모든 것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지만, 영광은 그럴 때마다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
그날도 영광은 아침 일찍부터 강변을 뛰고 있었다. 매일 가던 코스가 지겨워서 시작점을 바꾼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였다. 강변 주차장에 눈에 익은 차가 보였다. 번호가 쉬워서 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검은색 SUV, 책방 앞에서 자주 보던 차였다. 차를 지나치면서 영광이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갑자기 사라지는 머리가 있었다. 불에 덴 듯, 이제 막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 강변을 뛰면서 영광은 중얼거렸다.
-담대하라, 담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