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 맥주로 남은 그녀

by 소란

수미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깟 한 사람 때문에 이토록 낭패감이 들다니. 이건 자신이 오랜만에 품은 순수한 ‘화’였다. 수미는 어떤 식으로 나현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대갚음해야 할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어떻게 포장하고 승화해야 할지 몰라 누운 채로 휴대폰만 노려봤다.


그해 수미는 둘째 아이인 준이를 가까스로 병설 유치원에 입학시켰다. 연달아 2년을 실패하고 재도전한 결과였다. 유치원비도 공짜였지만 아파트 바로 옆이라서 수미는 로또에 맞은 것처럼 기뻐했다. 곧 3학년이 되는 수미의 첫째 아이 채아가 다니는 초등학교였다. 채아와 준이를 사이좋게 등교시키고 수미는 드디어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인생의 한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수미는 집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일했다. 동네에 유일한 독립서점이면서 그 지역 유명인인 한 시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저녁형 인간인 시인 덕분에 아침 열 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서점을 도맡을 직원이 필요했다. 수미에게는 딱 좋은 시간대였다.

한때 문학소녀였던 수미는 서점 일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일하면서 책을 읽을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다양한 신간 정보와 미처 알지 못했던 고전들을 접할 수 있었다. 간혹 시인이 작가를 초청하거나 독서 모임을 할 때면 수미도 자연스럽게 무리에 끼어 교양을 넓힐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시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간간이 잡지 기자나 유튜버들이 서점에 들르는 일이 있었다. 시인은 사람들의 관심에 적당히 대응하고, 소셜 네트워크에 자신을 우아하게 드러낼 줄도 알았다. 수미는 자신보다 겨우 두 살이 많은 시인이 시집을 벌써 두 권이나 내고 명성을 쌓아가는 것이 부러웠다. 때때로 부러움이 자격지심으로 변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수미는 휴대폰 속의 아이들 사진을 뒤적거렸다. 자신이 이 땅에 이루어놓았다고 자부할 만한 건 아이들뿐이었다.

시인은 자기와 똑 닮은 고양이를 키우며 혼자 살고 있었다. 수미는 가끔 자신이 선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혼자 살거나, 젊거나, 아이가 없는 것에 안도하는 버릇이 있었다. 수미는 자신도 혼자 살았다면, 아니 아이들만 없었다면, 그들만큼 세상에 뭔가를 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는 했다. 혼자 식당에 가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외로움이란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준이의 입학식은 감염병 유행으로 간단하게 치러졌다. 준이의 담임인 나이 든 선생이 행사를 주도했다. 담임은 행사에서 학부모 동아리를 공들여 소개했다. 동아리가 유치원 소통에 큰 역할을 할 거라는 말에 수미는 참가 신청을 했다. 수미가 원하는 동아리의 희망 형태는 역시 익숙한 독서 모임이었다. 새로운 유치원에서 준이의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고, 엄마들하고도 한두 명쯤은 정말로 친해지고 싶었다. 책을 통한 만남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전제돼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독서동아리의 명목으로 만들어진 동아리는 결국 가족 모임의 형태가 되었고, 여덟 팀이나 됐다. 수미는 자신이 만든 거나 다름없는 그 동아리에는 꼭 참석했다. 엄마들은 대부분 수미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다. 수미는 결혼을 늦게 한 편이었고 아이도 둘째였다. 나이도 많고 자기주장이 강한 수미가 모임의 리더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몇 번의 만남만으로도 엄마들끼리는 가까워졌다. 모임 내에서도 친한 무리들이 조금씩 나뉘었지만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여름을 그대로 보내기가 아까웠던 엄마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물총놀이를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수미는 은영을 제대로 보았다. 은영은 수미보다 두 살이 어렸고 모임에서도 말이 잘 통하는 사이였다. 은영은 수미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마치 난생처음 듣는다는 듯이 호응하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은영은 평소에 자기 아이가 준이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먼저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이들끼리 잘 지낸다는 건 엄마들이 친해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더군다나 은영도 둘째 아이였고 워킹맘이었다. 공통점이 많았던 수미와 은영은 이참에 사적으로 만나자며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실제로 따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가 되었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미는 은영이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수미가 언제나 만만한 것들을 선택하며 안정을 최우선으로 두는 자수성가형이었다면, 은영은 출발 지점부터 은수저쯤은 되는 모범생형 인간이었다. 은영은 오랜 시간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은영은 자신감이 몸에 배어 있었고 편견도 구김살도 없이 투명해 보였다. 수미는 그런 은영을 함께 하며 가끔은 질투 비슷한 공허함을 느꼈다.

아이들 사이에서 아빠가 없는 아이 한 명이 이슈가 될 때였다.

“왜 아이를 놔두고 이혼을 했을까? 쟤 너무 불쌍하다.”

은영은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너무도 쉽게 그 아이를 동정했다. 황혼 이혼한 부모에 형제 중에도 이혼 경력자가 있는 수미는, 자신도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벌써 이혼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순간 수미는 은영의 무지를 상처 입히고 싶었다.

“왜? 우리 부모도 이혼했는데? 우리 언니도 이혼하고! 요새 이혼은 너무 흔한 일 아닌가? 오히려 한 사람하고만 평생을 산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수미가 정색하고 말하자 은영은 잠시 멍한 얼굴이 되어 수미를 쳐다봤다.

“그런가? 제 주변에서는 이혼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못 했나 봐요. 언니같이 밝은 사람이 이혼가정에서 자랐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수미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참았다. 어차피 은영 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신이 겪어보지 않았다고 세상의 그 많은 불행을 마치 없는 일처럼 여기는 이들을 살면서 너무 많이 보아왔다.

감염병으로 학교가 문 닫는 일이 빈번해지자 수미도 시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가 많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수미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아이들만 집에 두고 출근하는 날이면 수미는 우울했다. 그렇다고 이십 년 가까이 한 직장에 다니는 남편에게 일을 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실제 남편은 언제나 수미의 배에 가까운 월급을 받았고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 다녔다. 그렇다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도 아니었다. 결국 수미가 서점을 그만두기로 했다. 시인은 아쉬워하며 언제든 돌아오라고 말해주었지만, 수미는 그 자리가 금세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수미가 일을 그만두자 아이들은 좋아했다. 아직 부모가 세상에서 전부인 아이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아이들을 보며 수미는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수미는 그동안 알고 지내던 주변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 놀 계획을 세웠다. 아무리 감염병이라도 가까운 사이들은 소규모로 모여서 어울리기도 했다. 장소는 감염병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각자의 집이었다. 그들끼리는 번갈아 서로의 집을 내외하며 더욱 친밀해지는 기회를 가졌다.

수미가 제일 먼저 손을 내민 건 역시 은영이었다. 하지만 은영은 직장에 다녔다. 누가 봐도 믿음직스러운 직장이었다. 그런 은영을 지원하기 위해 아예 친정엄마가 짐을 싸서 내려와 있었다. 은영은 결혼한 지 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친정에서 용돈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 사소한 말들이 수미에게는 상처가 됐다. 그럼에도 특별한 대안이 없었기에 수미는 은영과 예전처럼 주말만이라도 만났으면 했지만, 은영은 주말에는 친정엄마 눈치를 봐야 했다. 이래저래 수미는 은영이 부럽고 얄미웠다. 몇 번의 거절을 받은 수미는 서운했지만, 또 서운하다고 말해버리면 불편해질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그때 수미의 레이더에 덜컥 걸린 사람이 있었다.

심심하다고 징징대는 준이를 데리고 수미가 놀이터에 나간 날, 마침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나현이 딸과 나와 놀고 있었다. 모임에서 가장 수줍음을 많이 타던 나현은 나이가 어렸지만 생각이 깊어 보였다. 나현은 모임에서 말이 거의 없는 편이었고 적절한 타이밍에 조심하며 자기 의견을 내놓을 줄 알았다. 남편 동반 모임에도 항상 아이를 혼자 데리고 나왔는데 가끔은 빠지기도 해서 그나마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나현이 수미의 눈에 띄었던 건 책을 고를 때였다. 학교에서는 독서동아리를 지원하기 위해 부모들에게 책을 한 권씩 사준다고 했다. 엄마들은 각자 서점으로 찾아왔다. 나현은 오래도록 책을 둘러보다가 작은 시집을 골랐다. 수미도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비싼 책을 고르기 위해 서성이던 엄마들하고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후로 수미는 나현을 그윽하게 쳐다보게 되었다. 키가 크고 스타일이 좋은 데다 시집을 읽는 엄마라면 믿을만하다는 게 수미의 분석이었다.

“평소에는 뭐 하고 놀아요? 심심하지 않아요?”

수미가 친근하게 물었다.

“심심해요, 근데 준이 어머니는 오늘 서점 쉬는 날이에요?”

“그만뒀어요. 자꾸 빠지게 돼서…….”

“그러셨구나.”

“성아가 엄마를 쏙 빼닮았네요. 가끔 준이가 성아 얘기해요. 유치원에서 순하고 자기도 잘 챙겨준다고.”

“어머, 그래요? 성아도 준이 얘기 많이 해요. 너무 귀엽다고, 재미있다고. 아참 여기 영민이랑 승주도 준이랑 친하다고 하던데요? 그 엄마들도 준이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영민이와 승주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준이의 친구들이었다. 나현은 그 엄마들하고도 친한 모양이었다.

“요즘 유치원에 안 가니까, 지금 준이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저희도 놀이터에서 친해졌거든요. 다음에는 준이도 함께 해요. 언니들이 좋아할 거예요.”

“아, 언니들이에요? 나이들이 어떻게 되는데요?”

“승주 어머니는 준이 어머니보다 두세 살 어릴걸요? 한 분은 좀 더 어리고.”

“그래요? 잘됐네요. 남자아이들이라 준이가 좋아할 거예요. 준이가 지금 가깝게 지내는 아이들이 온통 다 여자아이들이라서…….”

수미는 은영의 아이를 염두에 두고 말했다. 준이가 이 기회에 남자 친구들까지 생긴다면 초등학교에 가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이 기쁜 소식을 언니들에게 얼른 전해야겠네요. 저희끼리는 ‘언니 동생’하고 지내요.”

나현은 수줍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수미는 나현과 은영을 비교해 보았다. 어여쁘고 섬세한 기질의 나현과 수더분한 외모에 거칠 것 없는 성격을 지닌 은영, 나현과 친해질 수 있다면 은영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미와 나현은 아이들이 추워서 집에 가자고 할 때까지 수다를 이어갔다. 수미는 내친김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혹시 나현 씨는 이번 주말에 뭐해요?”

“저요? 음……아무 계획이 없긴 한데, 준이네는 무슨 계획이 있으세요?”

“여기 읍성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잘 꾸며져 있다고 해서요. 남편이 주말 근무를 하는 날이라서 나현 씨랑 성아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좋아요. 근데 저는 차가 없어서, 그럼 준이네 차를 얻어 타도 괜찮아요?”

“그럼요.”

수미는 오랜만에 설레었다. 드디어 주말 약속도 생기고, 새로운 인연도 만들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우선 나현과 친해지고, 나현의 주변 인맥까지 섭렵하리라는 포부가 막 생겨난 참이었다. 그날 밤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에 수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현이 보낸 문자였다.

“준이 어머니, 너무 늦었나 모르겠네요. 오늘 영민이 엄마, 승주 엄마랑 번개 모임 가지려고요. 괜찮으시면 제가 준이 어머니를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데, 맥주 한잔하실래요?”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갑작스러웠다. 나현과 가까워지기도 전에 두 사람이 끼어들었다는 생각에 수미는 살짝 불쾌했다. 수미는 잠깐 무리를 해서라도 준비해 볼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웠다.

“아이고, 지금 자려고 누웠어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좋겠다. 재밌는 시간 보내세요.”

수미는 답장을 보내고도 자신이 쓸데없이 말이 길다고 느꼈다. 왠지 나현에게만은 이토록 신경이 쓰인다는 생각에 피로감을 느끼며 수미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일찍, 수미가 창밖을 내다봤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미 십 센티미터는 쌓인 것 같았다. 수미는 아이들과 눈놀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현을 떠올렸다. 밤새 맥주를 마셔가며 자기 얘기를 했을 세 사람. 그들과 이번 기회에 친해지자는 생각이었다.

수미가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 눈놀이를 하자고 문자를 보내자 나현은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고, 다른 엄마들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다. 수미는 그들의 단체 대화방에 왜 자신이 초대되지 않는지 의아했다. 이런 경우에 대개는 새로운 사람을 단체 대화에 끼워주며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는데, 그들 사이에는 어떤 통과의례가 있는 것 같았다.

운동장에는 이미 아이들이 많았다. 나현은 다른 엄마들하고는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고 쉴 새 없이 깔깔대며 아이들에게 눈 뭉치를 던졌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수미는 왠지 기분이 나빴다. 자기가 이 만남을 주선해 놓고도 왠지 그들 사이에 끼어 노는 기분이었다. 수미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나현은 신경 써서 말을 걸어왔다. 나머지 엄마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불편해진 수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애써야 했다.

“오늘 덕분에 너무 즐거웠어요. 준이 어머니, 죄송하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내일 읍성 가기로 한 건 다음으로 미룰까요? 눈 때문에 운전하시는 것도 어려울 것 같고……오늘 아이들이 만나서 실컷 놀았으니까 잠시 텀을 둬도 되겠다 싶어서요.”

그날 밤 나현의 문자였다. 수미도 은근히 다음 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몸도 피곤했지만 막상 나현과 독대할 생각을 하니 부담이 되었다.

“나도 즐거웠어요. 아이들끼리도 잘 놀고 엄마들도 다 좋아 보여서 좋았어요. 그럼 우리 날 좋을 때 다시 만나요. 커피도 진하게 마시고.”

나현은 대답 대신 긍정의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수미도 질세라 감정 과잉의 이모티콘으로 응답했다.

“역시, 준이 어머니는 저랑 코드가 잘 맞는 것 같아요.”

나현도 역시 더 재밌고 능청맞은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한참의 이모티콘 행렬 이후에야 대화창은 마무리됐다.

오랜만에 유치원 정상 수업이 결정됐다. 준이 하원 시간이 다가오자 수미는 간단하게 몸치장을 마쳤다. 마침 준이가 하원하는 시간에 나현도 아이를 데리러 왔다. 반가웠던 그들은 아이들을 운동장에서 놀게 했다. 은영도 잠깐 짬을 내어 아이를 데리러 왔다. 수미는 보란 듯이 은영에게 나현을 소개했다.

“성아 엄마 알지? 요새 그대의 빈자리를 성아 엄마가 채워주네.”

“잘 됐네요.”

은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수미는 내심 은영에게는 나현을, 나현에게는 은영이 있음을 알리며 자신은 아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고 싶었다. 곧 승주도 끼게 되었고 은영은 더 놀겠다는 아이를 간신히 달래서 돌아갔다. 하지만 정작 승주는 태권도 학원 차를 타고 금세 사라지고 운동장에는 준이와 성아, 그리고 승주의 다섯 살짜리 동생만이 남아서 놀았다.

겨울 해는 짧았다. 아이들을 앞세운 수미와 나현, 유모차에 승주 동생을 태운 승주 엄마는 아파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미는 나현과 승주 엄마 사이의 친밀한 기류에 자신이 왜 언짢은지 곰곰 생각하며 그들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하원 길에서 가장 가까운 건 수미의 집이었다. 준이와 성아가 쭈뼛거리며 헤어지길 싫어하자 수미는 마침내 나현과 긴밀해질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수미의 남편은 그날 일찌감치 회식이 있다고 했었다.

“나현 씨, 저희 집에 가서 아이들 좀 더 놀릴까요?”

“네? 괜찮으시겠어요?”

나현은 승주 엄마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수미도 승주 엄마가 신경 쓰였지만, 감염병이 엄중한 상황에서 다섯 살 아이까지 챙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때 말이라도 ‘다음에는 승주 엄마도 함께 하자’라고 할 걸 그랬다고 수미는 한참 뒤에야 생각했다.

“저희 집에 고양이도 있어요.”

신이 난 준이가 말했고, 성아도 고양이라는 말에 반색하며 준이를 따라갔다. 승주 엄마와 어색하게 작별하고 수미와 나현은 집에 들어왔다. 하지만 막상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미는 후회했다. 집은 정돈돼 있지 않았고 나현에게 너무 내밀한 것을 들킨 것 같은 기분에 금세 불편해졌다.

“아이들 치킨 사줄까요? 나현 씨 그냥 저녁도 먹고 가요. 저희 신랑 오늘 늦는다고 했어요.”

수미는 보이는 대로 정리를 하며 말했다.

“진짜요? 집에 초대해 주신 것도 감사한대, 그럼 저 집에 가서 옷 좀 편한 거 입고와도 돼요? 운동 갔다가 바로 와서 지금 안에 입은 옷은 민망하거든요.”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나현이 대답했다. 나현은 아파트 헬스장에서 꾸준히 몸을 관리하고 있었다. 수미는 나현의 긴 생머리와 롱패딩 밖으로 살짝 드러난 얇은 발목을 훔쳐보며 그러라고 했다.

호들갑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막상 집안에서는 따로 놀았다. 동생을 기다리던 채아도 새로운 동생 친구인 성아와 놀고 싶어 했지만, 성아는 반응이 없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찬찬히 집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큰 자극인 것 같았다. 자신의 뜻대로 따라오지 않는 동생에게 채아도 금방 호기심을 잃었다.

금세 돌아온 나현의 손에는 커다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집에서 이것저것 챙겨 왔다는 나현은 아이들 간식거리와 맥주 캔을 내놓았다. 수미는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방콕에 갔다가 맛있게 먹은 맥주예요. 저는 이것만 먹어요.”

수미는 해외여행 경험이 없었다. 채아도 가끔 친구들 이야기를 꺼내며 해외에 가보지 않은 아이는 자기밖에 없다고 툴툴댔었다.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지 수미는 알 수 없었다. 몸매가 다 드러나는 수영복 차림으로 휴양지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나현을 수미는 잠깐 상상해 보았다.

엄마들끼리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되었다.

“우리도 말 편하게 해요.”

수미가 먼저 제안했다.

“그럴까요? 저희도 얼마 안 됐어요. 그 언니들이 원체 잘 챙겨줘서.”

“그렇구나, 나도 모임에서 알게 된 은영이하고, 은영이가 소개해 준 엄마들하고는 말 놓고 지내요.”

수미는 나현 말고도 친한 사람들이 많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럼 저도 편하게 해 볼까요?”

“그래요.”

“그럼 언니가 먼저 말을 놓으셔야죠.”

“그럴까? 흐흐”

“그러자……. 그래야 더 친해지긴 하는 것 같아, 흐흐. 근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수미가 먼저 말을 놓자 나현이 어색하게 대꾸했다. 수미는 어색해하는 나현을 향해 웃었지만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다.

나현은 불쑥 재희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재희 엄마라면 모임에서 나현과 가장 친하게 지내는 여자였다. 나이가 비슷한 그들은 아이가 하나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수미도 재희 엄마와 딱 한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재희 엄마가 모임에서 먼저 알은체를 했다.

“재희가 집에 와서 자기랑 같은 칫솔을 쓰는 아이가 있다더라고요? 그 아이가 준이였어요. 그래서 제가 무조건 준이랑은 친하게 지내라고 했죠.”

한참 채식과 환경에 대한 책에 빠져있던 수미가 즉흥적으로 산 칫솔이었다. 칫솔을 알아봐 준 재희 엄마가 수미는 신기하고 고마웠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약간은 답답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 빛나는 여자였다.

“재희 엄마? 나현이랑 친하잖아? 애들끼리도 유치원에서 단짝이라며?”

“맞아……. 성아가 유난히 조용하고 소심해서 재희가 유치원에서 많이 챙겨주나봐……요, 흐흐. 거기는 첫째인데도 애가 야무지고 당차서……. 근데 재희 엄마도 언니처럼 친해질 기회가 몇 번 있었어……요. 승주 엄마랑 영민 엄마랑 다 같이 모이게 해 준 엄마도 사실 재희 엄마였어……, 흐흐. 근데 끝까지 말을 안 놓는 거야……어색하게……흐흐.”

이상하게 말하는 나현을 보며 수미는 과장되게 큰 소리로 웃었다. 무려 두 사람은 여덟 살 차이였다. 은영을 떠올려도, 주변에 친한 사람들을 떠올려도 반말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함께 한 시간과 소통의 깊이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수미는 자신이 답답한 재희 엄마와는 다른 사람임을 나현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하하, 그래도 재희 엄마! 내가 준이 대나무 칫솔 사서 보냈는데 바로 알아봐 주시고, 환경에도 관심이 많은 분 같았어.”

“맞아요. 되게 책도 많이 읽고 소신도 강하고, 왠지 언니랑 잘 맞을 것 같아요, 아니 같아, 흐흐. 아, 왜 이렇게 말이 안 놔지지?”

나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목청까지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언제 한 번 소개해 줘.”

“네, 근데 사실 저는 재희 엄마랑 지금 의절 비슷한 단계까지 간 상태라서……흐흐.”

나현은 고개를 돌리고 마치 연극 대사를 읊듯 말했다.

“아니, 왜?”

수미는 나현의 깜짝 발언에 놀라서 되물었다.

“사실, 우리 모임을 만들어준 것도 재희 엄마라고 했잖아. 그것도 처음에 영민이가 인사를 잘한다며 재희 엄마가 먼저 다가온 거였거든. 그래서 영민 엄마, 승주 엄마랑 나랑 재희 엄마 이렇게 몇 번 따로 만났는데, 뭔가 안 맞아. 자기 기준이 너무 확실해. 왜 있잖아요, 그런 사람, 흐흐. 사실은 영민 엄마가 진짜 예민하신 분이거든요? 근데 재희 엄마가 모임 때마다 뭔가를 가르치려고 들고 자기 위주로 모임을 주도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영민 엄마랑 한번 부딪혔어요. 저희는 중간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그때부터 재희 엄마 휴대폰 대문 사진이 시시때때로 바뀌는 거예요. 꼭 저희 보라는 듯이, 왜 경구 같은 거 있잖아요. 책 내용이나 명언 같은 말을 올리는데, 딱 우리한테 하는 말인 거야. 속 다 보이게.”

수미는 뜨끔했다. 자신의 휴대폰 속 대문 사진도 책에서 밑줄 그은 내용이 거의 전부였다. 그 내용들은 꼭 자신에게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에게 보란 듯이 내건 말들. 그 말로부터 누군가는 상처를, 누군가는 감동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도 모두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수미는 나현이 처음 재희 엄마랑 자신이 잘 통할 거라고 말했던 게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좀 그래 보이긴 하더라, 재희 엄마.”

수미는 재희 엄마의 형형했던 눈빛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근데 나는 둘이 잘 지내는 줄 알았어. 애들이 친하면 대개 부모도 잘 지내잖아.”

수미가 말했다.

“저도, 아니 나도, 흐흐. 애들이 친하니까 지금은 그냥저냥 지내는 거예요. 아니 지내는 거야. 흐흐. 근데 재희가 유치원에서 우리 성아 대변인인 것처럼 다 해주려고 하나 봐. 나는 그것도 좀 싫더라고. 조용한 애도 있고 소심한 애도 있고 그런 건데. 도와주는 것까지는 고마운데, 고맙지, 챙겨줘서. 근데 너무 다 해주려고 하니까, 또 부담스럽고. 암튼 어렵다, 어려워.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 언니가 읍성에 놀러 가자고 했던 날, 사실은 영민 엄마랑 승주 엄마랑 같이 놀이터에서 놀았거든요, 아니 놀았거든, 흐흐. 언니는 그날 여기 없었잖아. 제 대문 사진을 보고 이렇게 문자가 왔잖아?”

나현은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이 영상 보면 제 마음이 어떻겠어요? 배려가 너무 없다는 생각 안 드세요?’

자기 아이를 뺀 나머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눈썰매를 타는 영상을 보고 재희 엄마가 보낸 문자였다. 사실 그날 수미도 그 영상을 한참 쳐다본 기억이 있었다. 읍성 여행은 기껏 취소한 나현이 나머지 엄마들하고 신나게 놀았다는 증거였다. 영상 속에는 아빠들도 대동해 있었다. 아빠들까지 친할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닌 게 확실했다.

“아니, 배려 없는 게 누군데, 이날도 옛정을 생각해서 내가 물어봤단 말이지. 자기가 빠져놓고선 뭐라는 건지.”

나현은 술이 오르는지 새빨개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수미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수미는 잠시 집중력을 잃었다.

수미는 한참 만에야 그 얼굴의 정체를 생각해 냈다. 그건 수미가 결혼하기 전에 다녔던 전 직장 동료의 얼굴이었다. 여자 직원 누구한테나 추근대다가 조금만 비위가 상하면 상대를 깎아내리던 사람. 그가 과하게 의견을 피력할 때면 늘 짓던 표정이 딱 그랬다. 수미는 불쾌한 생각을 떨치려고 괜히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아는 여전히 쭈뼛거리며 채아와 준이를 따라다녔다. 조심스러운 만큼 의심도 많은 아이였다.

“아무리 속상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걸 저렇게 표현하는구나?”

“그렇죠? 저도, 아니 나도, 흐흐.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라.”

나현은 자신이 재희 엄마에게 보낸 긴 답장도 보여주었다. 답장 속의 나현의 말은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마치 다시는 안 볼 사이인 것처럼. 나현은, 아니 나현을 비롯한 세 사람은 재희 엄마를 영영 내친 거였다.

“재희 엄마는 처음부터 영민 엄마가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무시했다고 해야 하나? 왜 다 알면서도 그러는 사람들 있잖아.”

“뭔지 알지. 그래도 아이들이 여전히 친하잖아?”

“맞아요, 아니, 흐흐 맞아. 그래서 마음이 복잡해.”

“맞아, 어려워. 나도 애들 때문에 동아리를 만든 건데, 사실 모임이 너무 커지기도 했고, 안 맞는 엄마들도 있고 그렇더라고.”

수미는 화제를 바꿨다.

“그렇죠? 저도 죄송한 말이지만 그래서 자주 빠졌어요. 아니 빠졌어, 흐흐.”

“그치? 우리끼리 얘기지만 내가 상대하기 힘든 스타일은 사실 윤아 씨 같은 스타일이야.”

“윤아 언니는 왜요? 아니 왜? 흐흐”

윤아는 모임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솔선수범 형이었지만 남에게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너무 가식적이라고 해야 하나? 속이 뻔히 보이는데, 모든 이야기가 결국 자기 자랑으로 마무리되잖아. 매번 살짝 불편하더라고, 나는.”

“나도 나도, 느꼈어. 와, 소름. 차마 한참 언니이기도 하고, 원래 저도 모임에서 별로 적극적이지 않잖아요. 그냥 잘 안 맞는 모임이다, 이런 생각? 언니가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제가 그나마 버티고 가끔 얼굴 비친 이유는 다 언니 때문이야, 흐흐. 근데 언니가 은근히 돌려서 윤아 언니 몇 번 깠어요. 우리 다 느꼈잖아.”

“그래? 어떻게 알았지?”

“와, 언니 안 그런 척하면서 윤아 언니 돌려서 까는데, 그것도 아주 교양 있게, 흐흐. 이 언니 보통 아니구나. 인간관계에 아주 도가 튼 여자다, 내가 딱 느꼈지.”

민망해진 수미는 일부러 큰소리로 웃었다.

“흐흐, 느꼈구나, 고마워. 나도 처음부터 나현이랑 친해지고 싶었지. 그때 나현이 서점에 왔을 때 시집 사 갔잖아?”

“맞아요……아니, 흐흐, 맞아.”

“시집 사 가는 사람은 없었거든.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했고, 시집을 읽는 여자라. 뭔가 나랑 통하는 게 있을 것 같았어.”

“정말? 아, 너무 좋다.”

수미와 나현은 어색해질 때마다 맥주를 홀짝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둘 다 치킨에는 거의 손도 안 댄 상태였다.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서로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안중에 없었다.

나현은 재희 엄마 말고도 알고 있는 유치원 엄마들을 소환해 냈다. 가장 흥미로운 대화는 역시나 아는 사람의 뒷담화였다. 나현은 자기뿐만 아니라 승주 엄마나 영민 엄마랑 부딪힌 적이 있었던 예민하고 모난 엄마들에 대해 떠들었고, 수미도 질세라 나현이 잘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까지 꺼내며 그들의 단점을 하나씩 까발렸다. 나현은 여전히 반말 반 존댓말 반을 섞어가며 수미의 말에 크게 동조했다. 그때마다 일그러지는 나현의 얼굴을 보며, 수미는 처음에 자신이 생각했던 순하고 섬세하고 사려 깊은 여자는 이제 없다는 걸 알았다.

수미는 은근슬쩍 시계를 봤다. 아홉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나현은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아마도 그건 먼저 수미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먼저 일어나겠다고 말하면 기껏 만들어놓은 친밀감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건 수미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생각들 속에서 수미는 점점 피곤해졌다. 결국 마침표는 수미가 찍었다. 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의 이 기쁜 소식을 언니들에게 꼭 알려야겠네요. 언니랑 진짜 친해지고 싶어 하거든. 내가 사랑의 오작교가 되어 보리라. 아 참,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뭐 할 거예요? 크리스마스이브에 승주네 집에서 작은 파티를 할까 하는데 같이 하자……요, 흐흐. 아오, 끝까지 이런다, 내가. 아무튼 그때도 눈이 오면 놀이터에서 좀 놀다가 승주네 집으로 들어가려고.”

수미는 드디어 그들에게 초대받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튿날 아침부터 나현은 문자를 보내왔다.

“언니, 잘 잤어? 나 정말 어젯밤 일이 꿈만 같아. 오랜만에 설렌다고 해야 하나? 막 이럼.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참.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그만큼 언니랑 정말 친해지고 싶어. 다음엔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 바쁜 하루가 시작됐네. 오늘도 내 생각하며 좋은 하루 보내.”

나현은 문자로는 정확히 반말을 사용했다. 수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나현이 문장을 여러 번 고쳤다 지웠다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나현의 감정, 수미는 이모티콘으로 적당히 대꾸했다. 기회가 되면 서로 ‘언니 동생’은 하되 말은 놓지 말자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천천히 친해져도 됐을 텐데, 수미는 지난밤의 모든 것을 후회했다.

감염병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수미는 여전히 준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럴수록 수미는 조바심이 났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수미는 준이를 학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미술, 태권도, 피아노, 영어 등 예비 초등학생인 준이에게 필요한 학원은 많았다. 우선 준이가 좋아하는 미술을 시작했다.

첫 미술수업에서 돌아오는 길에 수미는 나현 일행과 마주쳤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이터에서 뭉친 듯했다. 멀리서부터 수미를 알아본 그들은 웃는 것 같았다. 수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언니다! 나 언니 생겼잖아! 수미 언니!”

나현은 옆에 있는 영민 엄마의 등을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도 수미 옆으로 선뜻 오지 못하고 누가 봐도 어색하게 굴었다. 수미는 그게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다른 엄마들의 눈치가 보였다. 수미는 이참에 말을 꺼냈다.

“잘 있었어요? 우리, ‘언니 동생’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말은 그냥 존대할까요? 이렇게 어색해서야.”

수미는 웃으며 말했고, 다른 엄마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만으로도 수미는 지금까지 그들 화제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미는 나현이 난처해졌을까 봐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준이가 얼른 집에 가자고 졸랐다. 첫 학원 체험에 피곤한 모양이었다. 얼결에 수미도 준이를 따라 집에 들어왔다. 뭔가 찝찝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그런 걸로 오해할 사이라면 차라리 이쯤에서 정리를 하자는 게 수미의 마음이었다. 그날 저녁 매일 같이 저녁 인사를 하던 나현에게는 문자가 없었다. 수미는 신경이 쓰였다. 다음 날 유치원에 갈 때 마주치기라도 하면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준이를 등원시키며 수미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벌써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그들은 깔깔대며 걸어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거꾸로 걷기 시작했다. 수미를 본 모양이었다. 수미는 일이 단단히 꼬였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수미 역시도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그들을 못 본 척했다. 수미는 울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내쳐질 정도의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을 잘못 본 게 죄라면 죄였다. 처음부터 엮이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미는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설마, 그들은 마침 아침 운동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이틀 뒤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날 점심 즈음 수미는 나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현 좋은 하루 보내고 있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몇 시쯤 놀이터로 나가면 될까요?”

수미는 반말과 존대를 섞어 정성들여 할 말을 골랐다. 나현은 문자를 읽고도 답이 없었다. 그동안 수미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휴대폰만 노려봤다. 불안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나현에게 문자가 온 건 두 시간도 더 지난 후였다. 수미는 나현의 문자를 받고 뒷목을 잡았다.

“저희 그날 승주네 모여서 파티하기로 했는데요. 놀이터에는 몇 시에 나갈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날씨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미는 순간 자기 가슴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게 실제 보이는 것 같았다. 이토록 강한 모멸감을 느끼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그렇구나, 나는 놀이터에서 놀다가 들어간다는 줄 알았어. 오케이!”

무엇에 대한 오케이라는 건지, 수미는 자신도 헷갈리면서 최대한 쿨한 이모티콘을 찾아 붙여 넣기까지 했다. 수미는 한참을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미는 나현과 영민 엄마, 승주 엄마를 차례로 떠올리며 저주했다. 초저녁부터 수미에게 풍기는 불행의 기미를 읽고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이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생각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난 몇 주 동안 뭔가에 홀린 듯 달떠있던 자신의 모습이 죽을 만큼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운 채로 휴대폰을 노려보던 수미는 결국 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자? 잠깐 내 얘기 좀 들어줄 수 있어?”

은영은 깨어 있었다.

“당근이죠, 왜? 무슨 일 있어요?”

수미는 은영의 편한 말투에 벌써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있잖아, 내가 몇 주 전부터 성아 엄마, 나현 씨랑 친해졌다고 했잖아.”

“그랬지, 오랜만에 언니가 좋은 사람들 만났다고 좋아했잖아.”

은영에게 털어놓을 이야기를 생각하니 수미는 자기 신세가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당장 가까운 사람의 위로가 절실했다. 수미는 은영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찬찬히 털어놓았다. 물론 나현과의 만남으로 은영에 대한 서운함을 보상받으려 했다는 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나현과 친해지고 난 이후의 문제였으므로, 그건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박살 난 이야기였으므로.

“어쩜, 언니가 노력한 거에 비해 결과가 너무 안 좋네.”

수미는 자존심이 상했다. 동시에 은영에게 서운한 마음이 되살아났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라는 말을 수미는 속으로 삼켰다.

“너무 급하게 친해지려다가 체했나 보다.”

은영이 말했다. 수미는 그 어느 말보다 적확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체한 거야. 이건. 정말이지. 급체야.”

은영은 탁월한 상담가였다. 쉽게 나현을 재단하지도, 그들을 싸잡아 욕하지도, 그렇다고 수미의 마음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적절한 선을 지키며 상대방을 위로할 줄 알았다. 누운 채로 수미는 은영의 한마디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어느 구절에서는 뜨거운 눈물도 흘렸다. 그러다가 수미는 용기를 얻었다. 당사자인 나현에게 직접 이유를 묻고 서운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었다. 어차피 깨진 관계에서 마무리 발언은 중요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현도 편히 자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관계의 끝은 자신이 결론짓고 싶었다.

“잠이 안 오네. 내가 나현에게 뭔가 단단히 실수한 모양인데, 혹시 내가 다시 존대를 하자고 했던 게 상처가 됐는가? 나는 어색해서 한 말이었는데. 우리가 좀 천천히 친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에 걸려서 한밤에 톡 보내봄. 오며 가며 계속 봐야 할 텐데,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언제나 잘 지내고, 가끔 보면 반갑게 인사해요, 우리.”

수미는 은영과의 대화 중간에 나현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대화창을 나와 버렸다. 은영은 수미의 결론에 박수를 쳐주었다.

“잘했어. 언니. 고생 많았어요. 이제 털어내. 내가 있잖아. 나랑 놀아, 이제.”

수미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비로소 은영과 허울 없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수미는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열었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자존심은 지켰지만, 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준이가 유치원에 갈 시간이 되자 수미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아니 그들이 또 똘똘 뭉쳐서 나란히 등원하는 걸 본다면 수미는 꼭지가 돌 것 같았다. 집을 나서기 직전에 마침 수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현이었다.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나현은 끝까지 주도권을 뺏기지 않았다. ‘네’라는 한마디에 이유와 결과까지 다 들어있었다. 수미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이토록 차갑고, 감정이 들쑥날쑥한 사람과 더 깊이 친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등원 길에서 수미는 승주 엄마를 만났다. 의외로 승주 엄마는 준이를 반갑게 아는 체했다. 수미는 인사를 하는 듯 마는 듯하며 지나쳤다. 다른 날 같았으면 잠깐이라도 서서 짧은 대화를 나눴을 거였다. 그들이 어딘가에 다시 뭉쳐서 브런치를 즐길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간식 삼아 씹으며 낄낄거릴 걸 떠올리며 수미는 부르르 떨었다.

3 대 1, 수적으로 불리했다. 앞으로 아파트에서건 학교에서건 그들을 만날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은영만으로는 부족했다. 수미는 그동안 연락이 뜸하던 아파트 친구들에게 전투적으로 안부를 물었다. 준이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무리였고, 수미가 서점으로 출근하면서, 준이만 다시 병설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이였다. 스스로가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미는 어떻게든 제 편을 만들고 싶었다.

오랜만의 만남에서 수미는 그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그들은 호들갑스럽게 나현의 태도를 헐뜯어 주었고 어디서든 나현의 무리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적극적으로 방어해 줄 기세였다. 수미가 원하던 바였지만 그들이 크게 동조할 때마다 수미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한 아파트 단지에서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며 어떻게든 마주칠 사이였다.

“그 엄마들 세 명, 잘은 모르겠지만 서로 그렇게 친하지 않을 것 같아. 나현 씨 말고 나머지 엄마들도 좀 유치하지만 너무 거리 두지 말고 지켜봐. 그 사람들 아이는 또 남자라며, 준이가 학교 가서 친하게 지낼 수도 있잖아. 아마 그 사람들끼리도 문제가 있을 거야. 남 흉보면서 친해진 사이들인데, 그런 사이가 멀쩡할 리가 없어. 나머지 엄마들도 나현 씨인지 그분이 부담스러울 수 있어.”

수미와 동갑내기인 한 엄마가 말했다. 맞는 말 같았다. 수미가 나현과의 관계를 통해 얻은 게 있다면 굳이 노력해야 하는 관계는 이미 글러 먹었다는 점이었다.

수미는 다시 아파트 친구들과 교감하며 관계를 돈독히 할 계획을 세웠다. 아이들을 같은 학원에 보내며 초등학교를 대비하자는 거였다. 수미는 얼결에 그들과 함께 다닐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준이도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 몰려다니며 활기를 띠는 것 같았다.

수미가 나현으로부터 연락이 받은 건 그로부터 한 달 후였다. 수미도 그때쯤에는 많은 것들로부터 해탈한 상태였다. 수미는 일부러 나현과 마주칠 시간을 피해 다니며 부딪힐 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가끔 마주치는 영민 엄마나 승주 엄마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할 정도가 되었다

밤 아홉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전화기에 나현의 이름이 뜨는 것만으로도 수미는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수미는 전화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토록 예민하고 소심한 나현의 입에서 여과되지 않은 어떤 원망의 말이 흘러나온다면 수미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화기는 집요하게 울렸다.

“네.”

수미는 최대한 차갑게 대꾸했다.

“아……. 잘 계셨어요? 늦은 시간 전화 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실은 케이크가 두 개나 생겼는데 좀 드릴까 하고요.”

나현은 깍듯이 존대를 했다.

“케이크를 갑자기 왜요?”

“연말이라서 케이크 쿠폰이 많이 들어와서, 준이 주려고 하나 가져왔어요. 언니한테 드릴 말씀도 있고, 혹시 지금 집 앞으로 잠깐 나와 주실 수 있으세요?”

정색을 하고 전화를 받는 수미에게 남편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 여자, 골칫덩어리가, 갑자기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네. 마음에 안 들면 케이크를 얼굴에 확 던지고 들어올게.”

수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집 앞 놀이터까지 찾아온 나현의 손에는 정말로 케이크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로봇 만화 캐릭터였다.

“이건 딱 준이꺼더라고요.”

나현은 조금 떨고 있었지만 씩씩하고 분명한 말투였다.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았다.

“왜 이걸 나한테 주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그냥, 제가 너무한 것 같아서요. 며칠 동안 저 잠도 못 잤어요.”

“나는 잤을 것 같아요?”

“그렇죠. 저는 준이 어머니가 갑자기 선을 그으시니까, 너무 당황해서, 정말 이럴 일이 아닌데, 다른 엄마들 보기도 민망하고…….”

“다른 엄마들이 뭐가 중요해요? 나는 나현 씨와 친해지고 싶었어요. 근데 나현은 항상 다른 엄마들 얘기를 하더라?”

“맞아요. 저도 정말 준이 어머니, 아니 언니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정말이에요.”

“처음부터 너무 급하게 친해지려다가 체한 거지 뭐.”

수미는 은영에게 들은 말을 나현에게 뱉었다.

“맞아요. 맞아.”

“그날, 내가 말 놓지 말라고 한 건, 나현 씨가 너무 어색해하니까, 불편해지지 말고, ‘언니 동생’은 하면서, 말은 편하게 하자고 한 건데, 아무래도 사람들 있는 데서 갑자기 그러니까 나현 씨가 당황했을 것 같기는 해요. 내 실수가 있었지, 뭐.”

“아니에요. 저도 곰곰 생각해 보니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더라고요.”

“내 딴에는 엄마 셋이 모여 있는 곳에 다가가기도 힘들었고, 나현과만 특별하게 친한 척하면 나머지 엄마들이 서운할 것 같아서 그랬던 거예요. 그렇다고, 그게 서운해서 갑자기 돌변하니까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지.”

수미는 거의 울먹이며 마음속 깊이 있는 말을 털어놨다. 수미는 그 부분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고 사과를 받고 싶었다.

“제가 경솔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사람 만나고 그러는 거에 너무 서툴러서 그래요. 정말 언니가 너무 좋은데, 다른 엄마들한테도 특별한 관계라는 걸 자랑하고 싶었는데, 언니가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제 딴에는 상처를 받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해요. 정말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알아요. 그 언니들도, 제 남편도 저한테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더 늦기 전에 가서 사과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랬구나. 나는 그분들도 한꺼번에 미워했는데, 지난번에 나랑 준이 보고도 셋이 모른 척하고 돌아서 가기에 나는 완전히 까인 줄 알았지?”

“언제요? 그런 적 없는데?”

“없기는, 우리가 마지막 문자 주고받은 날, 준이와 유치원 가는 길에 셋이 나 보더니 공원 쪽으로 갔잖아.”

“아, 그날! 그날부터 셋이 살 뺀다고 운동 시작했거든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수미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런 거면 다행인데, 나는 그날이 가장 충격적이었어, 괜히 세 사람 사이에 끼려다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수미의 목소리는 다시 분노로 흔들렸다.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미는 언젠가부터 자신은 화가 날 때만 눈물이 난다고 느꼈다.

“언니, 정말 사과하고 싶었어요. 근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날은 저도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그래, 고마워.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아졌어. 그날 우리가 집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거야. 원래 다른 사람 얘기가 재미있잖아.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 흉을 너무 많이 본 거지. 그러다 보니까 더 어색해지고. 우리 둘 다 실수했던 거야. 이제 됐어.”

수미는 나현을 한 번 안아주었다. 나현은 순순히 수미에게 안겼다. 수미는 두어 번 나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제야 얹혀있는 게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 밤, 나현은 다시 사과의 문자를 보내왔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긴 이야기였다. 수미는 역시나 긴 내용의 답장을 보내면서도 더 이상은 나현과 엮이지 말았으면 했다. 한번 얼굴을 붉힌 이상 처음처럼 순수하게 가까워질 수 없었다. 앞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감정이 상할 일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런 것까지 미리 신경 쓰다가는 수미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후로도 나현은 시시때때로 연락을 해왔다. 마치 언제든 다시 친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수미는 만나자는 약속을 한 박자씩 늦추면서 시간을 벌었다. 언젠가는 나현도 시들해질 것이다.

곧 학교 등교가 정상화되었고, 준이도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준이까지 학교에 보내자 수미도 다시 서점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시인은 고맙게도 구인광고를 내지 않고 수미를 기다려주었다. 수미는 다시 바빠졌고, 더 이상 엄마들과의 관계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일을 다시 시작했다는 건 나현과의 만남을 미룰 좋은 핑계였다.

아쉬울 게 없어지자 수미는 은영과도, 아파트 엄마들과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만났다. 나현이 사과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는 수미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일이 되면서 그들 사이의 신뢰를 더욱 돈독히 해주었다. 은영은 나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편이었고 아파트 친구들은 한번 뒤통수친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는 의견에 힘을 실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희한하게 아파트 주변에서 수미와 나현은 자주 마주쳤다. 편의점에서, 주차장에서, 놀이터에서. 그때마다 나현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언니, 제가 또 생각을 해봤어요. 그때 언니가 말 놓자고 했을 때 나는 왜 반말을 할 생각을 했지? 그냥 언니라고 부르면 됐을 텐데.”

“아! 다 지나간 일인데, 뭐. 다 잊자. 우리가 서로 너무 좋아서, 또 예민하고 소심해서 벌어진 일이잖아?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 그랬어. 나현이 잘못 아니야.”

“아니에요. 언니 언제 시간 되세요? 우리 차 한잔해요.”

나현은 아무 데서나 고해성사를 하듯 그때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구체적으로 사과했다. 나현의 진심을 수미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수미가 마음먹었을 때는 나현과 진지하게 차 한 잔을 마셔보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약속 날짜가 다가올수록 부담이 되었다. 수미는 나현에게 남은 감정이 없었고 더 이상 그녀가 궁금하지 않았다. 나현도 마찬가지였는지 또다시 승주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셋이 함께 만나자는 제안에 수미는 흔쾌히 좋다고 말했지만 승주 엄마와의 만남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수미는 그 자리에 재빨리 은영을 끌어들였다. 결국 수미와 나현과 은영은 아이들을 데리고 키즈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이들이 편하게 놀면서 엄마들끼리도 가볍게 소통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만남을 하루 앞두었던 날, 수미는 놀이터에서 승주 엄마와 영민 엄마를 만났다. 성아와 승주, 영민이 이렇게 세 아이가 함께 다니던 태권도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해가 떨어지도록 어울려 놀았다. 수미는 나현이 자리에 없는 게 의아했다.

“나현 씨는 안 보이네요?”

“성아는 태권도 끊었어요.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학교 가더니 자연스럽게 멀어지더라고요.”

뭔가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은 영민 엄마의 대답이었다. 승주 엄마는 말이 없었다.

“승주 엄마는 성격이 무난해서 아무 데고 잘 어울릴 분이니까, 오랜만에 함께 만나도 좋을 것 같아요.”

약속을 잡을 때 나현이 한 말이었다. 성격이 무난한 승주 엄마와 그동안 누누이 강조했던 예민한 영민 엄마를 비교했던 것일까? 설마, 나현은 그새 영민 엄마와 싸우고 그 빈 공간을 수미로 채우려는 건지도 몰랐다. 혹시나 그렇다면, 키즈 카페에서 그런 낌새를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은영은 수미를 다시는 안 볼 생각이었다.

키즈 카페에서 나현과 은영은 제대로 첫인사를 나눴다. 은영은 언제나처럼 자연스러웠고 나현은 예상대로 낯을 가렸다. 승주 엄마와의 만남이었다면 수미가 지었을 법한 표정과 태도였다. 셋은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자기소개 비슷한 시간을 가졌다. 수미는 나현이 소외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대화를 이끌었다. 은영이 함께해 줘서 그런지 수미는 만남이 어렵지 않았고 즐거웠다. 나현과 수미가 묵혔던 이야기들은 끄집어낼 틈이 없었다. 수미는 그게 편했다. 편견과 오해로 얼룩진 이야기들은 얽힌 그대로 묻어두었으면 했다.

은영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였다. 나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영민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저 영민 엄마와 의절했어요.”

“어? 왜?”

수미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영민 엄마와 거의 매일을 함께 했거든요. 나이도 비슷하고 아시다시피 승주 엄마랑 셋이 늘 붙어 다녔잖아요. 근데 저는 은근히 개인주의라 제가 싫은 건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영민 엄마는 모든 걸 같이 하자고 하는 편이고.”

“아……그래.”

“네, 예를 들어 네일아트 같은 것, 저는 손톱에 뭐 꾸미는 걸 싫어하거든요. 근데 제가 거절할 때마다 그분은 상처를 받았었나 봐요. 그것도 승주 엄마가 알려줬어요. 저 때문에 영민 엄마가 힘들어한다는 거.”

“아…….”

“그래도 영민이는 정이 들어서 가끔 보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고. 영민 엄마랑 안 맞는 거지 또 승주 엄마랑은 잘 지내요. 어제도 같이 브런치 했거든요. 제가 언니랑 키즈 카페에서 만난다고 하니까 자기도 다음에는 꼭 끼워달라고 하더라고요. 오늘 승주 엄마가 일이 있어서 못 왔거든요.”

어제라면 수미가 놀이터에서 그들을 만난 날이었다. 수미는 승주 엄마가 말이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중간에서 승주 엄마만 난처해졌어요. 늘 저희 때문에 조마조마했는데 이럴 바에야 단체 대화방을 없애자고 승주 엄마가 제안하더라고요.”

곧 화장실에서 돌아온 은영은 나현의 마지막 말에 아는 체를 했다.

“뭐야, 잠깐 들었는데도 벌써 머리 아파. 중딩들도 아니고, 대체 왜들 그러는 거야?”

은영은 앞뒤 상황을 모르면서 아는 체를 했다. 은영은 나현이 예전 이야기를 이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수미는 나현과 가까스로 이어진 끈이 끊어질까 봐 다급히 말을 돌렸다.

“은영은 모르는 얘기니깐, 그 얘긴 나중에 합시다. 아무튼 오늘 애들 잘 노네. 가끔 이렇게 번개 해도 좋을 것 같다.”

“좋아요.”

은영은 실수다 싶었는지 바로 대꾸했다.

“저도 번개 좋아해요.”

눈치 빠른 나현도 분위기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저는 언니와 저의 관계 길게 봅니다.”

키즈 카페에서 나오며 나현이 수미에게 소곤거렸다.


여전히 나현은 수미에게 연락을 했고 수미도 의례 답장을 했다. 만남은 또 미뤄지고 있었다. 벚꽃이 흩날릴 무렵 수미 가족에게도 감염병이 찾아왔다. 릴레이식으로 가족 모두가 지독하게 앓고 나니 2주가 훌쩍 지나갔다. 그 사이 나현은 수미의 안부를 자주 물어봐 주었다. 문고리에 간식도 두 번이나 걸어놓고 돌아갔다. 혹시나 감염병이 옮을까 봐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지만, 수미는 나현이 가고 난 다음에 커튼을 걷고 나현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나현은 긴 생머리와 어울리는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찰랑, 사락거리는 가벼운 발걸음. 곧 그 차림으로 휴양지 어디쯤에서 맥주를 홀짝일 나현. 수미는 나현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몰랐다. 언젠가부터 냉장고에 가득 들어찬 타이거 맥주만이 수미를 유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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