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물고기들아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by 소란

어항의 금붕어들에게 밥을 줬다. 셋째는 아침저녁으로 금붕어 한 마리 당 알갱이 세 개씩만 주라고 했다. 금붕어가 다섯 마리니까 열다섯 개를 주면 되는데 나는 꼭 서너 개를 더 넣어주었다. 이 작은 어항에서도 더 잘난 놈이 있는 것인지, 먹는 놈만 더 많이 먹는 것 같았다.

물고기들은 가만 보면 다 조금씩 달랐다. 특히 까만 놈 한 마리만 유난히 덩치가 크고 눈이 밖으로 튀어나온 게 우스워 보였다. 그 녀석은 항상 밥을 주는 쪽이 아닌, 내가 서 있는 쪽으로만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니 다른 놈들이 대여섯 개씩 먹이를 삼키는 동안 겨우 물거품만 헛먹다 마는 것이다. 일부러 그 녀석 쪽으로만 밥을 넣어보기도 했다. 역시나 그 녀석이 멀뚱 거리는 사이에 다른 녀석들이 먹어치웠다. 그래도 덩치가 제일 큰 걸 보면 뭘 먹기는 하는 것 같았는데, 이러나저러나 못난 놈은 못난 짓만 한다.

물고기들을 계속 관찰하고 있다 보면 어떤 때는 갑갑증이 나서 속이 터져 버릴 것 같다. 셋째 말로는 이 집에서 벌써 삼 년을 살았다는데, 조금씩 커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인지, 새끼도 낳지 않고 녀석들은 항상 똑같은 모습이었다. 먹이를 조금씩 주는 게 장수의 비결이라는데, 그것이 녀석들에게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좁은 어항 안에서 인조 풀에 낀 이끼만 핥으며 삼 년을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 말고는 이제 이 집에서 녀석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는데, 어항을 들고나가 냇가에 부어 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죽든 살든 한 번쯤은 넓은 세상에 나가보기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일전에 셋째에게 그 말을 했다가 웃음만 샀다. 셋째는 녀석들은 방생하자마자 다 죽을 거라고 했다. 처음부터 어항에서 태어나 사람 손에 유통된 생명체이니, 녀석들에게 자연은 어항 속이라고 셋째는 덧붙였다. 아무튼 제 멋대로 해석도 잘하는 아이다

셋째는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일했다. 아이 둘을 낳고 전업 주부로 지내다가 팔 년 만에 새로 시작한 일이었다.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 준 적이 없어서 대학도 다니다 말다 하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악착같이 대학원까지 나와서 버젓한 직장을 얻은 거다. 축하할 일이었지만 다섯 살 어린 손자가 걱정됐다. 마침 나는 무릎이 아파서 삼 년째 식당 일을 쉬고 있었고, 셋째는 직장에 적응할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셋째는 어릴 때부터 어른을 잘 따르고 똑 부러진 데가 있었다. 셋째마저 딸을 낳았다고 오던 길로 집으로 돌아간 시어머니가 야속했지만, 나는 갓 태어난 아이 얼굴을 보고 흐뭇한 데가 있었다. 나를 꼭 닮은 아기. 그 아이가 커서 이제 마흔이 됐다. 지금이라도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훨훨 날아다닐 아이였다. 어차피 집에 매일 혼자 있다시피 한데, 늘그막에 손주들과 북적북적하게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셋째가 막 대학에 들어갔을 즈음에 나는 그 사람을 만났다. 그때는 남편이 평생 지어먹던 농사터를 다 팔아먹고 빚더미에 앉아 있을 때였다.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산골짜기 동네로 숨어들어 석공장에서 밥을 해주며 근근이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일명 함바집이라 불리는 그 주방에서 하루하루 될 대로 돼라 식으로 살 때였는데, 공장 인부로 새 사람이 들어온 것 같았다. 호리호리한 몸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그 사람은 윤씨 아저씨라고 불렸다. 얼핏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내가 밥을 퍼줄 때마다 윤씨는 경상도 억양으로 “아이고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생김과 달리 말투가 구수했다.

윤씨는 가끔 밥시간이 아닐 때도 식당에 들어와서 밥을 시켰다. 늘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따로 주문하는 식이었는데, 가령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대신 큰 멸치를 넣어 달라, 스팸을 넣어 달라는 식이었다. 윤씨는 내가 음식을 차려주면 손맛이 기가 막힌다며 밥 한 그릇을 금세 먹어 치웠다. 낯선 사내에게 음식을 차려주고 칭찬까지 받는 일이라니. 그런데 그 일과가 점점 내게 중요한 일이 돼 버렸다. 윤씨가 식당에 나타나지 않는 날에는 뭔가 헛헛했다. 며칠씩 안 보이던 윤씨가 갑자기 나타나서 요상한 요리를 주문할 때면,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어떤 식으로든 변할 거라고 예감했다.

남편은 술만 먹으면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이유는 그때마다 달랐지만 바깥에서 자기 위신이 깎이거나 일이 꼬이면 집에 있는 마누라와 자식들을 들볶는 전형적인 모질이였다. 그날의 이유는 내가 식당에서 나온 돈을 뒤로 빼돌렸다는 트집이었다. 빚더미에 앉아서 인력시장에 나가는 남편의 자존감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남편의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 때는 인가가 하도 뜸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얻어터졌다. 이골이 날 법도 했는데 맞을 때는 언제나 죽도록 아팠고, 그러고도 살아간다는 게 진저리가 났다. 매번 피를 보고야 마는,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까지 피를 본 자리에서 잠자리까지 해야 하는 남자.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첫째를 배속에 갖고 처음 따귀를 맞았던 그날로부터 남편은 내게 사람이 아니었다. 애를 다섯이나 낳고 살았으면서도 나는 남편에게 손톱만큼의 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날 인부들이 보는 앞에서 얻어터지면서 나는 자꾸만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어서 나타나 이 사태를 끝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남편이 어서 고꾸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남편은 관중이 있으면 더 잔인해졌다. 제 마누라의 목숨 줄을 잡고 흔드는 남자라는 걸 공표하기라도 하는 양 남편은 의기양양했다. 젊은 인부 두 사람이 나서 주어서 사태는 겨우 끝이 났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거대한 냄비에 가득 미역국을 끓이는 꿈이었다.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펄펄 끓는 국 냄비를 천장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뜨거운 것은 온 사방으로 흩어졌고 미역이 천장에 덕지덕지 붙었다. 그러다가 천장에 붙은 미역이 불씨로 변했고 곧 집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꿈에서 미친년처럼 껄껄 웃었다. ‘다 타버려라’ 하면서. 시원한 꿈이었다.

꿈을 꾼 다음 날 나는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왔다. 그때 나를 도운 게 윤씨였다. 윤씨, 윤강호, 강호는 퉁퉁 부은 얼굴에 보따리까지 들고 서있는 나를 보자마자 자기 차를 가져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강원도 동해였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 파도가 요동치는 것을 보았다. 남편과 아이들과 살던 서쪽 지방과는 물색부터가 달랐다.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봤다. 강호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렸다. 강호와 나는 그곳에서 처음 살을 섞었다. 아이 다섯을 줄줄이 낳아 배가 나오고 쭈글쭈글한 몸이었지만, 이불속에서 강호는 내게 처녀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그렇게 듣기가 좋았다. 평생 겁탈당하듯 그 짓을 해왔는데 처음으로 나를 다정하게 안아주는 사람이었다.

가출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나는 전화를 걸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내 태도가 강경하다고 느꼈는지 남편은 난생처음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애들은 어떡할 거여? 여적 결혼 안 한 자식이 다섯이여.”

남편은 협상을 하자고 했다. 아직 성인이 안 된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책임질 자신이 있으면 이혼을 해준다는 거였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동해에서 나는 강호와 살림을 합쳤다. 막내에게는 꼬박꼬박 학자금을 댔다. 어미가 없어진 동네에서 고등학교를 잘 마쳐준 막내에게는 지금까지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아들도 하나 낳았겠다, 더는 아이를 갖지 말았어야 했는데, 남편 수발이 뭐라고 그 짓거리를 계속하다가 막내까지 낳았다. 막내를 낳았을 때는 내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아서 아이도 아프고 나도 많이 아팠다.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막내는 커갈수록 제 아비를 닮아 성미가 고약했지만, 그것도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끝내 그 아이만 대학 졸업장을 갖지 못했다.

막내는 그래도 어디서 그런 복을 타고났는지, 나이가 좀 많지만 저만 귀여워해 주는 남편을 만났고, 지금은 다섯 남매 중에 제일 형편이 나았다. 여전히 어린아이 같아서 옛날 얘기하며 퉁퉁거리긴 해도, 백화점 구경도 시켜주고 때때로 고운 옷도 사주는 어여쁜 딸이었다.

셋째는 늘 바빴다. 주중에는 일하느라 바빴고, 저녁이면 배드민턴을 친다고 밥 먹기가 무섭게 체육관으로 내뺐다. 제 딴에는 나를 배려한다고 애들까지 다 데리고 갔다. 말동무 하나 없이 온종일 저만 기다리는 어미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괘씸했지만, 부부끼리 정이 좋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라주니 도와줄 맛이 났다.

어려서부터 귀여운 짓도 많이 했던 셋째는 안정된 직장의 월급쟁이 남편을 만나 알콩달콩 살았다. 여자 팔자는 참말 뒤웅박 팔자가 맞았다. 없는 집에서 태어나 그래도 이만큼 누리고 사는 셋째를 보면 흐뭇했다. 나도 어릴 적에는 남편 월급 꼬박꼬박 저금하며 아기자기하게 살림하는 게 꿈이었는데, 내 부모가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나를 조금이라도 가르쳤더라면 나도 셋째처럼은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자식이었다.

강호를 인정해 준 자식도 셋째 하나였다. 셋째는 강호와 살림을 합치고 일 년쯤 살았을 때 강원도로 나를 만나러 왔었다. 그때 셋째는 지금의 사위가 아니라 다른 남자아이와 함께였다. 그 남자아이도 참 예뻤는데, 어찌 된 일인지 셋째는 그 아이와 삼 년을 사귀고도 헤어졌다. 강호를 처음 본 셋째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을 대하듯 친근하게 굴었다. 제 엄마를 아껴주는 사람이라면 저도 인정을 한다나 어쩐다나 까불면서 강호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늦은 저녁, 셋째의 가족이 밥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체육관에 가버리면 어김없이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식탁에 앉아 어항 속 물고기를 쳐다보다가 아이들이 먹은 밥그릇을 씻고 잠이 들 때까지 텔레비전을 봤다. 아이들이 언제 어떻게 들어와서 자는지 나는 몰랐다. 밤이 되면 아이들이 불편해할까 봐 나는 방문을 꼭 닫아두었다. 자기 전에 물통도 가져다 놓고 웬만하면 저녁에는 물도 먹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늙으면 방광도 주책을 부리는지 그놈의 소변은 자주도 나왔다.

손주 둘이 다 예쁘고 귀여웠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손녀는 셋째를 닮아 어딘지 귀티가 나고 야무진 데가 있었다. 셋째가 아기 때부터 제 분신처럼 끼고 키워서 피아노며 바이올린, 태권도, 못하는 게 없는 아이였다. 손자는 말할 것도 없다. 통통한 볼하며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손자 녀석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녀석은 사위의 성미를 닮았는지 아이답지 않게 점잖다가도 멍석을 깔아주면 또 흥이 많아서 제대로 놀 줄을 알았다.

그런데 이 조그만 녀석들도 나를 무시하는 건지 가끔은 나를 골탕 먹였다. 나하고만 있을 때는 딱 붙어서 사방 주무르고 말도 잘 듣는 녀석들이 제 어미만 오면 돌변했다. 어쩌고 저쩌고 제 어미에게 귓속말을 소곤거리질 않나, 내가 말을 걸면 일부러 대답을 안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집으로 팽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그나마 낡은 빌라라도 돌아갈 곳, 내 집이 따로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것마저도 없었더라면 내 인생이 얼마나 더 비참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주말이면 나는 웬만하면 내 집으로 돌아갔다. 기차로 딱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처음에는 격주에 한 번을 갈까 말까 했는데, 어느 날 셋째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사부인이 와서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주말에는 집에 가셔야죠?”

기껏 와서 제 손주들을 돌보는 내게, 딸 집에 와 밥숟가락을 얹고 산다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네, 저도 그런 눈치는 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맞받아쳤다.

강호는 온전한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공무원이었다는데 친구를 잘못 만나 생수 사업인지 뭔지를 한다고 퇴직금까지 날려버리고 신용불량자가 됐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는 이 직장 저 직장 전전하다가 끝내는 건설 현장 인력으로 나갔다. 그나마 목돈이라도 받으면 그 사람은 자기 통장에 넣어두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동해에서부터 공사 현장이 있는 곳을 찾아서 이사도 여러 차례 다니며 허공에 돈도 수없이 날렸고, 결국 내가 친정 식구를 통해 알게 된 식당에 취직하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무슨 팔자가 이리도 사나운지 결국은 내가 움직여야 먹고살 수 있었다.

다행히 식당 주인을 잘 만났다. 지금은 동기간보다 더 친해진 명자 덕분에 나는 계를 몇 개 들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낡은 빌라라도 얻을 수 있었다. 나보다 세 살 아래인 명자는 솥뚜껑같이 생긴 얼굴에 멋도 몰랐고 놀러 어디를 가도 분위기도 낼 줄 모르는 주변머리였다. 그래도 생활력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해서 시집와서 여태 같은 자리에 식당을 키워가며 지금에 이르렀다. 명자는 빌라를 두 채나 가지고 있는 내 주변의 유일한 부자였다. 사람이 정이 많고 신용이 철저해서 계를 몇 개나 꾸렸고, 혹시나 곗돈을 갖고 날랐다는 계원이 있어도 명자는 끄떡없었다. 명자는 자기 돈을 메워서라도 그 계를 유지해 나가며 자기 주변에 사람을 모이게 했다.

스스럼없이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명자와는 벌써 십 년 가까이 속내를 터놓고 편하게 지냈다. 그렇게 천년만년 명자와 함께 식당에서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랜 시간 서서 일하다 보니 무릎이 상했다. 시집가서 내리 애 다섯을 낳고 살면서도 한 번 산부인과라는 데는 가본 적 없이 건강한 편이었는데, 젊어서 밭일을 오래 해서 그런지 일찌감치 퇴행성관절염이 시작됐다. 수술할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말에 내 걱정을 제일 많이 해준 것도 명자였다.

셋째 집에 와서도 명자와는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언니 힘들지? 내가 뭐랬어? 그게 할 짓이 못 된다고 했잖어. 뭐니 뭐니 해도 내 집에서 내 살림하며 발 뻗고 자야지, 사위 눈치 보랴, 딸 눈치 보랴, 어이구 내가 못 살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저기 전라도에 땅 알아보고 있어. 한 삼 년만 고생하자 언니. 거기 가서 미우나 고우나 우리 서방이랑 언니 아저씨랑 넷이 살자. 내가 마당 귀퉁이에 컨테이너로라도 올려줄게.”

명자가 툭하면 하는 소리였다. 고즈넉한 시골에서 넷이 노후를 보낼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웃음이 났다. 고마운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명자와 그렇게 친하다고 해도 말년에 명자한테 얹혀살 수는 없다. 그래도 명자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보험을 든 것처럼 괜히 든든했다.

문제는 강호의 일이었다. 인력 시장에서는 돈을 떼이는 경우가 허다했고, 현장이 계속 바뀌니 우리는 한 달이건 두 달이건 떨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강호는 언제 어디에서고 아침 여섯 시, 저녁 여섯 시에 전화를 걸어왔다.

“밥 먹었어?”

늘 같은 물음, 그거라도 없었으면 진즉에 발로 뻥 차버렸겠지만, 그 전화 한 통이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강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공무원을 때려치웠을 때 아내와는 이혼했고 그때 고등학생이던 딸은 아내가 키웠다고 했다. 수연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나의 유일무이한 아들 넷째와 나이가 같았고, 강남의 유명 술집에서 일한다고 했다. 수연이 가끔 제 아비를 만나겠다고 내 집에 찾아올 때가 있었는데 그 사람을 닮아 몸이 호리호리하고 이목구비가 큼직한 게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 같았다. 수연은 표정이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올 때마다 십만 원이 들어있는 봉투를 조심스레 내밀며 살림에 보태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돈이 어떻게 번 돈인지 안쓰럽기도 하고 께름칙하기도 했지만, 나는 돈을 알뜰히 통장에 넣었다. 늘 한 푼이 새로웠다.

애들 다섯은 다 크고 나서도 돈 들어갈 일들을 만들어냈다. 강호와 내가 뼈 빠지게 일한 돈이 넷째 차를 사는데 들어가고, 막내 가게 보증금으로 들어가고, 둘째 생활비로 들어가고 하는 일이 허다했다. 강호는 내가 낳은 새끼들을 챙기느라 내가 목돈을 찾아도 모르는 척해주었다. 강호 최고의 장점이었다.

사위가 먼저 출근하고 셋째가 애들을 챙겨 일하러 나가고, 겨우 소파에 걸터앉아 커피를 한 잔 타 마시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둘째였다. 둘째는 제 아비와 함께 고향에서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얻어터질 때마다 제 아비에게 바락바락 달려들던 아이였다. 덩치는 산만한 게 마음이 여려서 눈물이 많던 아이. 동네 아이들과 옥신각신하다가도 툭하면 질질 짜던 아이가 유독 제 아비한테만은 싸늘했다.

둘째가 동네 교회에 다닌다고 했을 때 남편은 서양 귀신 어쩌고 하며 애를 잡았다. 둘째가 고집을 부리니 남편은 옆에 있는 아무거나 들어 휘둘렀는데 하필 그게 우산대였고, 둘째는 코피가 터졌다. 얼굴 전체로 피가 뒤범벅된 둘째는 처음으로 제 아비에게 고래고래 내질렀다.

“나한테 아빠는 목사님이야. 목사님은 내 말을 경청해 준다고!”

그때 나는 난생처음으로‘경청’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도 교회에나 다녀볼까를 잠깐 생각했다. 남편은 우산대를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이후로 둘째는 동네 쭉정이들만 몇 다니던 그 교회에 정을 붙이고 살았다. 그것도 모자라 대학도 그 교회 목사가 다니던 기독 대학을 선택하더니, 졸업하고는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에 전전하며 늘 돈에 쪼들려 살았다.

둘째가 언제부터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는지 나는 기억이 없다. 키가 크고 늘씬해서 동네 사람들이 미스코리아라고 부르던 아이였는데, 사회에 나가서 불쌍한 아이들을 돌보며 보람차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언젠가부터 둘째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타면 몽땅 옷을 사버리는 데 썼다. 멀쩡한 옷도 아니었다. 색감이며 질감이며 젊은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은 옷을 잔뜩 사다 날랐다. 똑같은 옷을 색깔만 다르게 여러 벌 사기도 했다.

이혼 이후에 남편은, 아니 애들 아빠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터를 잡았다. 그때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둘째는 그렇게 싫어하던 제 아비와 살림을 합쳤다.

“다 하나님의 뜻이야. 엄마는 우리를 떠났지만, 자식인 우리는 아버지를 버릴 수가 없어. 내가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보듬고 살게.”

둘째는 세상을 다 산 늙은이처럼 말했다. 둘이 티격태격 같이 산 지가 벌써 십수 년이다. 애들 아빠는 이제 다 늙어서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고, 둘째는 최근까지 김치공장을 다니다가 그만뒀다고 했다.

제 아비를 보듬고 살겠다던 둘째는 툭하면 전화를 해왔다. 제 아비가 김칫거리를 잔뜩 사 들고 와서 김치를 담그라고 했다든가, 자신이 퇴근할 때까지 설거지를 미뤄둔다거나, 몸이 아파 누워있기라도 하면 잔소리를 했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그 인간은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었다. 살면서 늘 성실만을 강조하던 사람, 없는 일도 새로 만들어 마누라와 제 자식들을 부려 먹는 것은 예사였고, 아무튼지 간에 사람이 가만히 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집에 있을 때면 딱 두 가지가 허용됐다. 공부를 하든가 농사일을 돕든가.

얼마 안 되는 농사터였지만 그놈의 돌이 왜 그렇게 많은 땅이었는지, 또 풀은 뽑은 자리에서 나고 또 나고, 큰 소득도 없는 밭일은 끝이 없었다. 대역 죄인에게 생전에 받을 형벌이 있다면 그 지긋지긋한 밭농사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나이 칠십이 넘도록 자식 마음 하나 읽어주지 못하고 그 딱한 애를 구석에 몰아붙이는 성미에 나는 넌덜머리가 났다. 여기가 미국 같은 나라여서 총기 소지가 가능했다면 나는 벌써 몇 번을 찾아가서 그 인간을 쏴 죽였을 거다. 망할 놈의 인간.

둘째는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돈을 신청했다면서, 나보고 먼저 십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이제는 적응이 될 만도 한데 둘째의 우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화통이 터졌다.

“언제쯤 정신 차릴래? 엉?”

“그럼 오만 원만, 내가 답답해서 그래. 아빠랑 둘이 집에만 갇혀있는 기분이야. 다시 일자리 알아보고 있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요.”

내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었다. 자기 주머니에 단돈 오백 원도 남기지 못하는 병, 내가 배 아파 낳은 아이가 분명했지만, 그 아이의 속은 어떤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은행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나는 셋째에게 전화를 걸었다. 셋째에게 듣게 될 잔소리가 먼저 상상이 됐다. 셋째는 대뜸 한숨부터 쉬었다.

“엄마, 엄마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가 이러니까 언니가 정신 못 차린다는 생각은 안 들어?”

차릴 정신이었으면 벌써 결판이 났을 거다. 나는 가만히 셋째의 잔소리를 들었다. 더 말해봐야 시간만 지체될 것이었다. 혼잣말을 한참 하던 셋째는 곧 계좌번호를 물었다.

‘그럼 그렇지, 네 년도 독하질 못해서.’

첫째는 셋째 집에서 차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소도시에 살았다. 마음만 먹으면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마흔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가다가 어디서 두꺼비 같은 신랑을 만나 이제야 아이가 여섯 살이었다. 내가 셋째 집에서 살림을 도와준다고 했을 때 제일 신경이 쓰였던 게 바로 첫째였다.

첫째는 어릴 때부터 심성이 고왔는데, 제 어미 생각도 많이 해주던 애였는데, 언젠가부터 힘들면 꼭 부모 탓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대학을 못 가고 몇 년을 집에 있으면서 그놈의 수능을 보겠다고 요란법석을 떨었다. 그때는 대학 보낼 형편도 아니었고, 공부도 못하는 애가 무슨 고시 공부하는 사람처럼 집에서 궁둥이만 키우니, 하도 답답해서 뭐라고 몇 마디 하면 그 아이는 죽는다고 설쳐댔다.

첫째가 진짜 유서를 써놓고 저수지에 간 적이 있었다. 저수지 둑에서 제초제를 먹고 죽는다는 애를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아비라는 인간은 애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그날 첫째는 커다란 쇠 가위로 긴 머리를 다 잘리고 반죽음이 되어 끌려왔다. 내 생애 가장 죽고 싶던 날을 따지자면 바로 그날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애가 지금 멀쩡히 자기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것도 용한 일이었다.

첫째는 내가 셋째 집에서 애를 보며 살림을 해주는 걸 신기해했다. 첫째 역시도 남편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어린애를 종일반에 맡겨놓고 맞벌이를 하는 처지였다. 언제고 손을 벌리고 싶었을 텐데, 나는 첫째를 제대로 도와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나도 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첫째가 애를 낳고 산후조리를 도와달라고 했을 때 일주일쯤 그 아이 집에 가 있었던 거다.

오순도순, 오랜만에 첫째와 대화다운 대화를 이어가며 잘 지냈는데, 갑자기 첫째는 난데없는 공격을 해왔다. 어린 시절 순해 빠졌던 순둥이가, 나를 붙잡고 다섯 형제 중에 맏이로서 자신이 받은 차별과 고통을 끝도 없이 토해낸 것이다. 내가 제 아비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관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때리는 아비보다 그런 아비를 말리지 않는 내가 더 미웠다고, 한밤에도 나를 깨워서 사과하라고 다그쳤다.

“상담사가 그랬어. 부모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 내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아저씨랑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야. 엄마도 회개해. 그럼 용서해 줄게.”

자기도 어미가 되고 보니 어미인 내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라면서도 그 모진 말들을 해댔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나도 사느라 그런 거고 제 아비가 무서웠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미인 나를 아직도 그렇게 원망하다니. 참담했다.

“너도 애 키워봐라. 네 맘처럼 되는 줄 아냐, 엉?”

나는 첫째 집에서 일주일을 버티고 새벽 기차를 탔다.

셋째 집에 오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첫째와 자주 얼굴을 보게 됐다. 이제는 핼쑥해져서 머리도 희끗희끗한 첫째를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쑤셨다. 첫째의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잘 놀다가도 갑자기 제 어미에게만 포악을 부렸다. 제 엄마가 하도 오냐오냐 키워서 그렇다. 부모처럼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는 게 제 인생 숙제였으니 거꾸로 과잉보호를 하며 키운 결과였다.

첫째의 결혼생활을 보면 꼭 그맘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속이 터졌다. 결혼식 때부터 재가한 나를 부르네, 마네, 쇼를 하더니 결국 나를 불러놓고 큰사위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들 내외는 결혼식 이후에도 내 집에는 단 한 번도 발길이 없었다. 오거나 말거나 너희들이나 잘 살 거라 했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큰 사위는 제 장인보다 더 말술을 처먹는 인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제 마누라한테 손찌검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았는데, 첫째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역시나 제 남편을 무서워하며 살고 있었다. 직업도 변변치 않아서 택배를 한 이 년쯤 하다가 결국엔 건설 현장에 나갔다. 그나마도 요새는 별것 없는지 낚시를 하러 다닌다고 했다. 제 주제에 무슨 낚시인가 싶었다.

언젠가는 첫째 집에 들렀더니 조그만 양동이에 물고기 새끼가 열 마리쯤 헤엄치고 있었다. 큰사위는 한 마리에 오천 원이나 하는 장어의 치어라며 새벽에 운 좋게 잡아 왔다고 좋아했다. 그렇다면 취미로 하는 낚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한 낚시인가 싶어 첫째에게 은근히 떠봤더니 말을 얼버무렸다. 생활비는 처음 결혼하고부터 받아본 적이 없다면서 세상 다 포기한 얼굴로 말하는 첫째의 얼굴이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어느새 어미랑 같이 늙어가는 중년의 여자가 되어 젖먹이를 데리고 만날 이혼을 하네, 마네, 하는 게 보기만 해도 속이 터졌다.

곧 크리스마스였다. 셋째는 어렵게 들어간 일자리가 변변치 않은지 곧 그만둔다고 했다가 재계약을 한다고 했다가 하루가 다르게 변덕을 부렸다. 그럼 내년에는 나보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얘기인지, 겨우 달에 사십만 원을 주면서 어지간히 속을 태웠다.

셋째 전화로 보이스톡이 왔다. 보이스톡 소리는 분명히 넷째 전화였다. 금쪽같은 내 아들, 나의 희망, 어릴 때부터 나를 닮아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던 아이. 잘난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더니, 그 말이 꼭 맞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가 변변치 않다고 호주로 여행을 떠난 아들은 십 년 가까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전화는 한 달에 두세 번꼴로 자주 오는 편이었는데 요새는 그마저도 뜸했다.

넷째는 크리스마스 때 조카들에게 선물을 부칠 거란다. 그래 봐야 로션이나 초콜릿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이겠지만, 그 물건들이라도 철마다 와줘야 나도 아들이 있다는 자각이 생겼다. 스피커폰 너머로 제 누나한테 주소가 맞는지 확인하는 아들의 씩씩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코밑이 시큰거렸다.

“엄마, 누나 집에서 잘 버티네, 헤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지금쯤 나도 며느리 밥을 얻어먹으며 살 수도 있었을까. 아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넷째는 호주에서 관광 사업을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도 넷째가 자리 잡기를 바라며 돈도 수없이 부쳤다. 하지만 그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결과를 몰랐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는 했지만 해도 너무했다. 살아생전에 내 아들을 몇 번이나 더 보게 될지 막막해져서 당장에 비행기 표를 끊고 싶다가도, 막상 가서 너무 큰 실망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도대체 그 아이는 호주에서 뭘 하며 사는 걸까. 내가 모르는 손자 손녀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끝이 없었고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졌다. 그렇게 한번 잠에서 깨면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셋째 집에 와서 제일 힘든 게 바로 그럴 때였다. 그때는 꼼짝없이 감옥에 갇힌 꼴이었다.

“거지는 아닌가 보네, 조카들 선물도 챙기고.”

전화가 끊기고 내가 말하자 셋째가 웃는다.

“엄마, 호주 거지가 대한민국 일반인보다 훨씬 행복할걸?”

“미친년.”

제발 셋째의 말이 맞기를 바랐다.

주말에 기차를 타고 집에 갔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일주일 동안 비어있던 집이라고 여기기에는 뭔가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쯤이면 그 사람이 집에서 세 시간은 떨어져 있는 시골 주유소에서 한창 기름을 넣을 시간이었다. 그 사람도 나이가 들어서 더는 힘든 일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차도 오래돼서 폐차를 시킨 지 반년이 넘었다. 남들처럼 집 가까이에서 아파트 경비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놈의 나라는 한 번 발을 헛디디면 발붙일 곳 자체를 지워버렸다.

최근에 집에 들렀었냐는 내 말에 그 사람은 딱 잘라 아니라고 했다.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전화 건너 저쪽이 하도 시끄러워서, 내 정신도 하루가 다르게 오락가락해서, 내 탓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더 캐물었어야 했다. 어쩌면 내가 그 사람에게 기댄 만큼 그 사람은 내게 바라는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벌써 십오 년, 떨어져 있을 때가 많았지만 맹세코 내 인생에 남자는 그 사람 하나였다. 애들이 한창 학교에 다닐 때 넷째의 담임을 흠모한 적은 있었다. 단정한 옷매무새에 너그러운 눈빛, 말투, 모든 게 다 근사했던 사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남자를 보며 미친년 널뛰듯 뛰는 심장을 가져봤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셋째 집에 돌아오고 월요일 아침,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여전히 밥은 먹었냐고 시작될 줄 알았던 전화. 그 사람은 나보고 우선 물을 마시라고 했다. 머리맡에는 어젯밤에 떠다 놓은 자리끼가 있었고 나는 눈으로만 그걸 훑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내 말에 그 사람은 다짜고짜 괜찮냐고 했다. 자다 일어났는데 무엇을 묻는 것인지. 나는 불안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우선 셋째를 깨워봐.”

“네?”

아직 셋째가 일어나려면 삼십 분은 더 있어야 했다. 엊저녁 내내 운동하고 늦게 잤을 게 뻔했다. 자기들 아침 밥상을 차리려고 부스럭거리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데, 깨우길 어떻게 깨우느냔 말이다. 내가 짜증을 부리자 그 사람은 말했다. 저승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이었을까.

그 사람은 육 개월 전 차를 폐차하던 날에 사람을 치었다고 했다. 사람이 많이 다쳐서 합의금을 댈 수가 없었고, 이제 그 결과가 나왔다고, 일 년 가까이 들어가 살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 사람은 마치 일 년 동안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사람처럼 말했다.

“당신이 놀랄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어. 가족들에게는 다 말했고. 수연이가 생활비로 달에 얼마씩이라도 당신한테 부칠 거야.”

그 뒤부터는 어떤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작게 얘기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셋째가 옆에 와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셋째에게 넘겼다. 셋째가 그 사람에게 주소를 불러 주었다.

“엄마, 살다 살다 별일이 다 있네, 아저씨가 곧 전화기가 안 될 거라고 자세한 건 우리 집으로 편지 쓰신대.”

얼굴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처음으로 그 사람의 존재가 부끄러웠다.

“엄마, 많이 다쳤나 봐, 사람이. 다친 사람 생각하자. 죗값 치르는 거라고 생각하자.”

“그래, 그렇지, 암. 다친 사람을 생각해야지.”

며칠이 지나자 진짜로 그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다. 주소 란에는 그 사람 특유의 휘갈긴 글씨체로 의정부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요. 다행히 6개월을 선고받았소. 이곳도 예전 같지 않아서 밥도 잘 나오고 난방도 잘 되어 있소. 노숙자들이 살길이 막막하면 여기 들어온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소. 삼시 세끼 김치만 그대로고 바꿔가며 나오니 걱정하지 마시오. 형편이 펜션보다 낫다.’

내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가 ‘펜션보다 낫다’는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났다. 그 사람은 주유소에서 일하기 직전에 가평의 한 펜션에서 두 달쯤 일했는데, 거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더니 그때 일을 말하는 거였다.

통장에 남은 돈으로 옷도 사고 이것저것 샀다고, 거기서 책도 보고 텔레비전도 보고 있다고, 6개월이 생각보다 금방 지나갈 거고, 삼일절 특사로 나갈 수도 있다고,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도 쓰여 있었다.

‘자나 깨나 밖에 있는 당신 생각, 당신 걱정뿐입니다.’

산도 좋아하고 기타 치는 것도 좋아하고, 형편이 조금 나았다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조금의 여유만 생겨도 둘이 고물 차를 끌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던 때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편지를 가져다준 셋째가 내용을 궁금해했다.

“엄마 떼어놓고 새 장가가시려고 거짓말하시는 줄 알았는데, 진짜 거기에 가시긴 했나 보네?”

우스갯소리를 해가며 셋째는 편지를 보여 달라고 졸랐다. 편지를 건네주자 셋째는 고맙게도 편지를 다시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펜션보다 낫다’에서는 같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엄마, 안 되겠다, 아저씨 감옥이 체질인 거 아냐?”

“그러게, 삼일절 되기 전에 노숙자 한 명 옴팡지게 패라고 해야겠다. 거기 더 오래 있게, 으하하.”

“엄마, 아저씨가 여전히 엄마를 사랑한대, 자나 깨나 엄마 생각뿐이래. 엄마는 좋겠다.”

“미친년.”

“엄마, 조금만 기다려, 시간 금방 지나갈 거야.”

“그래.”

셋째와 나는 거실에 퍼질러 앉아서 그 사람이 휘갈겨 쓴 편지를 암호 풀 듯 읽고 또 읽으며 낄낄거렸다. 제 어미와 할미가 낄낄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손자가 다가와 방글거렸다. 나는 손자를 덥석 안고 얼굴을 비볐다.

“할미는 우리 손자 보는 낙으로 살아야지.”

손자는 간지러운지 까르르까르르했다. 등 뒤로 손녀도 다가와 업히며 말했다.

“나는? 나는?”

자고 일어나니 까만 물고기가 죽어 있었다. 나머지 물고기들이 밤새 뜯어먹었는지 벌써 등뼈가 보였다. 허연 살이 다 드러난 등뼈를 보는 순간 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남은 물고기들을 검은 봉지에 담았다.

“너무 좁아서 죽은 거야. 얼마나 답답했겠니? 준아 오늘 얘들을 강물에 놓아주자. 넓은 곳에서 자유롭게 살게.”

“응, 할머니.”

손자도 죽은 물고기가 가여웠는지 고분고분 나를 따라왔다. 나는 아파트 옆에 흐르는 작은 천에 이르러 검은 봉지 속의 것들을 쏟아냈다.

“하나, 둘, 셋, 넷.”

손자는 물고기들의 숫자를 세었다. 당황한 물고기들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헤엄쳐갔다. 온통 모래 빛의 냇물에서 빨간 금붕어들의 움직임은 금세 눈에 띄었다.

“할머니, 금붕어 누가 잡아먹으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 금붕어는 맛없어서 아무도 안 잡아가.”

금붕어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손자는 녀석들을 한참 눈으로 좇았다.

“할머니, 내일 또 오자. 여기.”

“그러자.”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손자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 금붕어들이 내일 저기 없으면 어떡해?”

“아마 조금 적응하면 더 넓고 살기 좋은 곳으로 헤엄쳐 갈 거야. 없어지면 금붕어들한테는 좋은 일인 거야.”

“그래?”

다음 날 손자와 나는 다시 냇가에 가보았다. 금붕어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손자는 박수를 쳤다.

“할머니 말이 맞았어. 다들 강으로 헤엄쳐 갔나 봐.”

막상 물고기들이 안 보이니 공연히 불안했다.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육 개월 후, 내년이면 나도 고령 연금을 탄다. 그 사람 연금과 내 걸 합치면 내 집에서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까. 다시 식당이라도 알아봐야 하나. 백두산이 터진다고 해도 새삼 놀랍지 않을, 살면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말년에 얼마나 큰 복을 받으려고 하느님은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지. 이제라도 그 사람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면 내 아이들이 나를 책임질 수 있을까. 아니다. 절대 안 될 말이다. 나는 114에 전화를 걸었다.

“의정부 교도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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