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술로 답하는 문제 형식
여행. 그래, 여행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어릴 적 아빠의 품에서만 떨어지면 먹다 울고, 자다 울고 며칠이고 울기만 해대던 나는 (10시간을 채웠을 때 고모는 결국 고모부와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나를 안고 뛰어야만 했다는 썰 추가) 어쩔 수 없이 아빠 직업상 함께 기억에도 없는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아빠의 기억을 빗대어 말하자면 부산, 김해 등 국내선을 너무 많이 이용해서 승무원들과 친해져서 탑승하면 데리고 갔다가 하차 시 데려다주곤 했다고 한다.
덕분에 오랜 시간 이동하는 건 참 많이 단련되어 있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이동 수단에 발걸음을 디딜 때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순간순간이 즐거운 것 아닐까?
정확히 십 년 전 사진을 꺼내려하니 창피함이 가득이지만, 이런 사진도 찍었구나 싶어서 웃음도 난다.
첫 여행은 중3 때, 목적지는 홍대 철길
고작 목동(양천구)에서 홍대가 무슨 여행이냐 하겠냐만은 그 당시 바람이 좋았고,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익숙했던 버스를 타고 여의도 한강(나름 경유도 했구나)에서 신나게 뛰어다닌 후, 바람을 실컷 느끼며 다리를 건너다가 모자를 날려버리고, 그렇게 모든 연락을 두절한 채 3박 4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니 거리가 주는 의미 따윈 무슨 소용이랴.
물론 집에서는 '가출로 간주했다'라는 후문과 '쟨 잡아두면 엇나가버리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하자'라는 가족회의가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3일 동안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여름과 가을 사이여서 정말 다행) 불안한(1. 딸에 대한, 2. 열린 문으로 도둑이 들 것에 대한) 마음으로 지새웠을 가족을 생각하면 난 참 철없었지만 별 걱정 없이 나갈 수 있는 것도 별 걱정 없이 들어올 수 있는 것도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봐도 철없는 소리 맞다.)
잦은 이동으로 쉽지 않은 기록 찾기는 싸이월드가 도와주었다. 대단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 후는 뭐가 있을까. 아, 스무 살 여름!
시골이 양구 인터라 강원도는 신물 나게 다녔는데, 그날도 할머니를 뵙고 3일 정도 묵고 (체감상으로는 3달쯤의 지루함) 돌아가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여름의 한가운데 시점. 강원도의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말도 안 되게 그려져 있는 뭉게구름에 감탄을 마음껏 내비쳤다. 부모님께서는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선루프를 열어주셨다. 뒷좌석에서 신이 난 나는 선루프를 통과하여 그 시절 최초 디카였던 Olympus-C200z(아빠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디카를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로 신나게 하늘을 찍어대다가, 또 한 번 카메라 케이스를 바람에 보내드렸다. 그 덕에 차에 갇혀 있는 나 자신에게 답답함을 느꼈고, 심통이 올라오려 할 그때, 문득 들려오는 한마디에 많은 것들이 시작되었다.
내려, 내려서 실컷 놀다가 들어와. 연락만 해
그렇게 도로 한복판에서 내려 하늘을 마음껏 보고, 바람을 실컷 맞다가 1시간 10분마다 오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10분 뒤에 있는 속초행 차를 탔다. 그 설렘은 아직도 뱃속 어딘가를 살살 간질이는 느낌이다. 깊은 곳 어딘가에서 신선한 샘물이 솟아오르는 그런 느낌.
속초에서 이곳저곳 한참을 걷고, 서울과 다른 조금 이른 밤. 어둠 속에서 골목을 걷던 기억, 방파제 어딘가에 한참을 앉아서 MP3에 푹 빠져 영화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해변가에 드러누워있다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터미널에서 10분 뒤의 차를 타고. 또 그곳에서 용산으로 와 15분 뒤의 열차를 타기도 하고. 지역명도 모르고 마구 떠돌다 돌아왔었던 여름.
(이 여름의 추억을 곱씹고 다음을 기대하며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피아노와 작곡에 매진하여 재수에 성공했다는 후일담)
2006년 사진들에 한정하여 찾다보니 canon A85/ Yashica GSN, minolta x-370, mesuper와 함께한 다양한 필름 사진들이 보인다.
‘travel’의 어원은 ‘travail(고통, 고난)’이라고 한다
무언가를 보고, 남들이 체험하는 무언가를 놓칠 수도 있겠지만, 그저 밖으로 나와있다는 사실, 일탈 그 자체가 나에게는 여행이다. 사실 낯선 곳에 나간다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길눈이 밝은 것도 아니고 익숙지 않은 모든 것은 예민한 나에게 크나큰 스트레스로 남는다.
그래도 좋을 수만은 없는, 다양한 기억의 조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나에게는 여행이다.
앞으로도 마음껏 해나갈, 그리고 이곳에 담아낼 여행.
내가 만나고 느끼는 자연과 문화. 그 이상의 감정, 그 감성들을 사진으로 표현해내고 노래할 수 있다면, 이미 시작된 내 떠돌이 삶의 의미는 그걸로 성공이지 않을까?
이렇게 크기까지 참 재밌는 일들이 많았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