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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로코 Barroco Jun 05. 2018

기록의 힘

사소하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습관이란 게 정말 무시 못한다고 느껴진다

나의 책장 한켠을 수북하게 가득 채우는 것이 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초등학교 시절에 쓰던 일기들이다. 저학년 시절에 그리고 썼던 그림일기부터 시작하여 중학교 시절까지 거의 매일 기록하다시피 하여서 일기상까지 받았었는데 사실 여기에는 엄마의 강압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당시는 쓰기 싫어서 억지로 글씨를 날려가며 썼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가끔씩 그것들을 펼쳐 읽을 때면 나 역시도 생각이나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음을 되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 한 국어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께서는 인생노트라는 걸로 한마디로 지역 내에서는 유명인이셨다. 그 선생님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다른 전교생들처럼 역시 강압적으로 거의 매일마다 글을 써야 했고 국어 시간 자체가 싫었던 나머지 수업 필기는 악필 중에서도 지독한 악필로 기록하여 학교 축제 때 내 것을 본 주변 친구들이나 다른 반 학생들이 경악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외의 일기나 경험담 같은 걸 쓸 때에는 나름 지극정성을 들여서 글씨체의 기복이 심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학년이 올라가고 그 선생님과 헤어진 이후로도 나는 인생노트를 잊을 수 없어서 나만의 방식대로 다시 새롭게 꾸며나가곤 하였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다이어리 꾸미기 클럽 같은 곳에 가입할 정도로 먼슬리든 저널이든 나름 정성을 들여 가꾸어나가는 습관을 들였고 졸업 후 미국 와서도 당분간은 마찬가지였다. 미국 생활 초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한편 두고 온 조국이 너무나도 그리웠길래 한국 뉴스도 잘 챙겨보곤 하여 중요한 사건이나 관심이 가는 신문기사 등은 다이어리에 바로 기록해 두거나 스크랩하였다. (심지어 숭례문 화재 사건도) 이러한 나를 두고 몇 분들은 한국에 사는 사람보다 한국 소식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모든 것이 귀찮아져만 갔고 시력의 변화로 인하여 이제는 더 이상 옛날처럼 글씨를 깨알같이 쓸 수가 없게 되어 그나마 예쁘다고 정평이 나 있던 글씨체도 악필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요즘 같은 때에는 간단한 독서노트만 하더라도 자필로 쓰기보다는 컴퓨터를 항상 앞에 둔 채 작성하곤 하니 사실상 메모에 대한 중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곤 하였다. 하지만 작년부터 루터교 절기에 따른 바흐 칸타타 전곡 감상을 추진하게 되면서 나는 먼슬리와 위클리가 있는 제법 큰 플래너를 구입하여 올해로 두 번째로 쓰고 있다. 먼슬리에는 중요한 약속이나 짤막한 일기나 기억하고 싶은 것 등을 기록하고 위클리에는 식단, 바흐 칸타타 목록, 영/일단어 오답 노트 등을 적고 있는데 내년부터는 좀 더 세분화된 방식으로 적어볼까 하여 먼슬리만 따로 쓰되 나머지는 bullet journal 쪽으로 알아보고 있다. 그리고 책이나 인터넷에서 본 감명 깊은 글귀나 노래 가사 등은 필사 노트에, 그리고 나머지 삶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이나 생각 같은 것은 일기장에 따로 기록해 두는 중이다.


백수가 아닌 백수로, 또 진학을 준비하는 예비 학생으로 살아가면서 사실 공부나 블로깅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매일의 삶이란 영원히 기록으로 남길만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 옛날 학창 시절 때만큼은 일기를 거창하게 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어떠한 사물이나 일 등으로 인하여 느끼게 되는 감정들을 바로 인지하여 노트에 담아두지 않으면 그대로 공중분해해버리게 되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노트나 메모할 수 있는 종이를 항상 구비해 두고 아이디어 등을 적는다. 이렇게 습관을 들여놓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뇌는 뭔가 활성화되어가는 느낌이고 글씨체도 더 이상 나아지지는 않지만 최소한 악필에서는 어느 정도 탈출함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해야 할 일들이나 하고 있는 일들에 귀차니즘을 느끼는 실정에서 이렇게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한다는 건 어쩌면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의 몸과 마음이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한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직접 손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는 이 일에 열심을 낼 것이다. 사실 무모하다고는 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때로는 멋있는 일이 될 수도 있는데 확실히 먼슬리의 빈칸을 채워나갈 때마다 느끼는 건 옛날 활기가 가득했던 젊은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서 너무 꾸미기에 집착하다기보다는 이제는 나이도 어느 정도 들은 것만큼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 라이프에 한 번 도전하여 플래너도 심플하면서도 명료하게 꾸며나간다면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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