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아침은 부대찌개로 얼큰하게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절대 먹지 않을 부대찌개인데 여기에선 왜 이렇게 맛있는지 밥도둑이 따로 없다.
오늘은 정말이지 감동적일 만큼 날씨가 매우 화사하다. 눈이 부실 만큼 따사로운 햇살이 도시 위를 구석구석 빈틈없이 비추고 있었고 기온도 제법 따뜻하여 나가지 않고는 절대 배길 수 없었다. 친구와 함께 소호의 테라스가 있는 카페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안 그래도 예쁜 Palace of Westminster (영국 국회의사당) 건물이 황금 햇살 아래에서 더욱더 눈부시고 영롱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비 오는 날의 런던 풍경도 참 좋지만 역시 맑은 날의 아름다움은 결코 이길 수가 없는 것 같다.
금빛으로 화려한 Big Ben (빅벤) 역시 햇살을 받아 마치 다이아몬드 왕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그 영롱함이 더욱 배가되는 것 같다.
소호의 골목골목에도 햇살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Monmouth Coffee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꽃 장수 자전거가 오늘따라 괜히 더 낭만적으로 보인다. 같은 꽃도 어떤 화병에 꽂는지, 같은 음식도 어떤 접시에 담는지에 따라서 더 빛나 보일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오늘도 온 Monmouth. 이쯤 되면 직원들도 내 얼굴을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단언컨대 소호 거리에선 이 집 커피가 가장 맛있어서 안 올 수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플랫화이트와 코르타도는 이 구역에서 이 집이 대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입맛은 주관적인 것이므로 누군가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구매할 수 있는 원두의 종류도 다양하다. 한국 갈 때 원두 한 봉지만 사 가고 싶은데 커피콩이 검역 제한 대상인지 아닌지 여부를 잘 모르겠다. (해외여행에서 원두 사서 입국하신 경험이 있는 분...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베이커리류도 제법 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편이고 커피 메뉴는 다음 사진과 같다. 나는 이 중에서 코르타도를 가장 맛있게 먹었는데 조만간 Filter Coffee도 마셔봐야겠다.
이런 아름다운 날씨에 테라스에 앉지 않으면 태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비하면 런던의 겨울은 초봄에 견줄 정도의 날씨이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쌀쌀하다. 그래도 악착같이 이 햇살을 즐겨보겠다고 테라스에 앉았다.
테라스에 앉아 거리의 상점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기도 맑고 햇빛도 따스하니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구나.
소호 거리에 주인장의 취향이 묻어나는 매력적인 중고서점들 몇 개가 눈에 띄어 둘러보았다. 사실 책이든 뭐든 중고 구입은 비선호하는 성격이지만 혹시나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중고 서적이라 저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소장 가치가 높은 에디션들을 판매하고 있어 뜨악할 만한 가격을 자랑했다. 이를테면 패션잡지 한 권이 £125(한화로 약 228,000원)라든가 말이지.... 그 외에 평범한 서적들은 누가 봐도 "나 중고요"하는 상태의 제품들이어서 그다지 구매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스콘을 사 먹고 싶어서 다시 트라팔가 광장 방향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날씨가 정말 좋다.
전부터 궁금했던 Audrey Green에 가 보기로 했는데 구글맵을 찾아보니 같은 이름으로 두 곳의 장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하나는 이렇듯 간이 카페와 같은 형태의 별관이며 베이커리의 종류도 본관보다 간소화되어 있었다.
별관 건물의 외관이 아기자기하니 예뻐서 끌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왕 가는 것, 멀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본관을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로 향했다. Audrey Green은 내셔널갤러리 바로 뒤편 초상화갤러리 건물에 있다.
빵 종류가 생각보다 매우 다양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레밍턴이 다양하게 있어서 반가웠다. 레밍턴을 참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레밍턴 판매하는 곳이 흔치 않아 사 먹기 힘든데 여기엔 이렇게나 다양하게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오늘 스콘을 먹기 위해 이곳에 왔으므로 레밍턴은 다음을 기약해 본다.
초상화 갤러리 건물에 딸린 카페여서 그런지 유명인들의 사진 작품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고, 상호명이 Audrey Green이어서 그런지 오드리 헵번의 사진 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구글맵에 어느 리뷰어가 이곳 스콘이 모 유명 스콘 가게보다 훨씬 낫다는 이야기를 해서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오게 되었는데,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런던에 와서 여태껏 사 먹은 스콘 중에 가장 별로였다. 식감도, 맛도 모두 다 별로였고, 클로티드크림도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으며, 직원 서비스도 타 카페에 비하면 그다지 우수하다고 보기 힘들었다. 뭐랄까... 직원의 애티튜드에 퇴근하고 싶은 기색이 매우 역력해 보였다. 누구든 출근하면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이 당연하지만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행동하는 것은 사회인으로서 부적격하다고 생각한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할 거면 제대로 해라."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보다.
그렇지만 가게는 꽤 예뻤고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들어올 때만 해도 환한 대낮이었는데 한 시간쯤 지나니 푸른 저녁 하늘이 되어 버렸다. 사실 시간만 놓고 보면 늦은 시간이 아닌데 겨울 런던의 해가 너무 빨리 지는 탓이다.
필요한 생필품이 있어 집 들어가기 전에 근처 마트에 들렀다. 파운드 환율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선 뭘 사도 그 가격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슬프지만 아마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내내 이러한 환율 상태가 유지될 것 같다.
소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쪽빛 저녁 하늘을 등지고 선 건물들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누군가 내게 주책맞다고 타박한다 해도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다. 같은 건물도 환한 낮에 보는 모습과 어두운 밤에 보는 모습이 뚜렷하게 다르니 참 매력적이다.
집에 돌아와 잠시간의 저녁 여유를 즐기고 운동 갈 채비를 한다. 아, 런던의 파리바게트 초콜릿케이크는 한국 파리바게트 케이크 맛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영국에서든 한국에서든 파리바게트는 한결같은 파리바게트 맛을 내는구나. 분명 원재료의 차이가 있을 텐데 어쩜 이렇게 똑같은 맛을 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영국 것이 조금 더 맛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말이지….)
오늘도 템즈강의 야경을 벗 삼아 즐겁게 달렸다. 쾌청한 하늘은 해가 지고도 유효한지 밤하늘 역시 맑도록 새까맣기 그지없다. 보통은 신나는 비트의 노래를 들으며 달리지만 오늘은 로맨틱한 무드의 노래들을 들었다. 이를테면 'Can't take my eyes off you'와 같은 노래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강변의 연인들을 보며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맨틱한 템즈강 야경에 로맨틱한 노래까지 더해지니 마음속에 로맨스의 싹이 트지 않고는 배기기 힘들지 않을까.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캔 그리고 다른 친구가 나눠준 에든버러의 위스키퍼지를 먹었다. 이 퍼지가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조만간 나도 에든버러에 여행 가면 위스키퍼지를 꼭 사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윙맨 맥주는 (맥주에 있어선)흑맥주만 선호하는 내 취향에는 완전히 맞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날씨 속에서 보낸 런던의 또 다른 하루가 사랑스러운 노래의 선율을 따라 저 멀리 흘러 흘러 멀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