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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Mar 10. 2024

날개야 다시 돋아라. 한번만 더 날자꾸나.



아주 오랜만에 대학로 뮤지컬 공연을 보았다. 거의 6~7년 만인 것 같다. 내가 한창 대학생이었던 그 시절엔 ‘옥탑방 고양이’니 ‘김종욱 찾기’니 하는 대학로 연극이 유행이었는데, 사실 대학로에서 올려지는 공연들은 대개 나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친구 따라 몇번 보다가 이내 자연스레 발길을 끊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내가 예전에 영화에서 보고 매우 인상적으로 여기고 있던 한 배우가 주연을 맡아 연기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시인 ‘이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그 대학로로 뮤지컬 <스모크>를 보러 가게 되었다.


흘러간 세월의 햇수가 무색하게 대학로의 모습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선 나를 보자니 제법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나이의 앞자릿수가 2에서 3으로 갓 변화한 나는 그때보다 살이 조금 쪘고 얼굴이 조금 늙었고 성격이 조금 더 차분해졌고,... 하지만 이러한 것들보다 가장 큰 변화는 나의 영혼의 온도이다. 그때는 내가 걸어가는 길에 무엇이 나타나든 무서울 게 없었다. 무엇이 나타나든 무찌르고 이겨내면 그만이었고, 어떤 험준한 길이든 이 악물고 오르면 그만이었다. 왜냐하면 열심히 걸어나간 길 끝에는 반드시 나의 꿈과 이상이 실현된 공간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열심히 걷고 또 걸어가도 그러한 공간은 도무지 나타나질 않았고 오히려 나는 무수히 갈라지고 뻗어진 길들 사이에서 점점 길을 잃고 제자리에서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열심히 걸어간 것 같은데 도중에 길을 잘못 들었는지 잔뜩 걷다 지쳐 서 보면 어제 봤던 그곳, 제자리였다. 아무 길잡이라도 나타나서 내게 바른 길을 안내해 주면 좋으련만 내가 오르는 산에는 셰르파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곳’에 가겠다는 열망을 강하게 움켜쥐던 손에는 조금씩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때때론 나의 가치가 불분명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때 무척이나 뜨거웠던 나는 그동안 차갑게 식어버린 채 이곳 대학로에 다시 왔다. 그 느낌은 참으로 묘했다.


참 기묘하게도, 때마침 내가 본 뮤지컬 또한 냉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 보이지 못하고 좌절하며 괴로워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극에서 그려지는 이상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나를 투영하며 바라보고 있었고, 세 인격으로 분열된 이상의 각 자아에 나의 자아 역시 분열시켜 하나씩 투영하고 있었다. 그가 경험하는 고통과 고뇌를 온전히 느끼다 보니 극이 엔딩을 향해 달려갈수록 몰입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하지만 지쳐서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와중에도 마음속에는 언제나 끊임없이 실낱같은 희망이 마치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이 극을 보는 나는 이상이 외치는 소리에 힘입어 나 역시 한 번만 더 힘을 모아 날아보자고 마음먹어본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득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날개>  -이상



사실 극 초반에는 캐릭터의 콘셉트도 난해하고 매력이 없는 데다가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끝으로 갈수록 몰입감이 고조되기는 하였으나 어쨌든 개인적으로 극 초중반의 각본은 취향에 맞지 않아 관람하기에 힘들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노래도 좋았으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넘버가 없다는 점도 아쉬운 사항이다. 소재가 참 좋아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시인 이상의 작품 중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한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으로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 내게 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는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운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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