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ria Oct 12. 2024

[22] 블라인드데이트,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누런 종이 포장지를 북북 뜯어내는, 별 것 아닌 그 단순한 행위가, 그 안에 은밀히 모습을 가리고 있는 책 표지를 마주하기 위해 책과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 과정이, 마치 저 멀리 앉아있는 소개팅 상대의 뒷모습을 보며 그와 서서히 가까워져 가는 과정과 매우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Blind Date with a Book” 아니랄까 봐 정말 베일에 싸인 데이트 상대를 만나러 가는 것 같다.


드디어 베일에 감춰져 있던 나의 데이트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기쁘게도 그리고 다행이게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그것은 F. Scott Fitzgerald의 <Tender Is the Night>였다. 우리나라에선 <밤은 부드러워>라는 제목으로 번역 및 출판된 책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좋아하는 데다가 어쩌다 보니 장편소설 <밤은 부드러워>는 아직 안 읽어 보았기에 이렇게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표지도 어쩜 (예쁘다고 말하기에는 좀 망설여지지만) 관능적이고, 책도 양장본이 아닌 무선제본 형태여서 휴대하기에 가볍고 좋겠다. 여러모로 나름 맘에 드는 상대를 만났다. 나의 첫 Blind Date with a Book은 20세기 초 재즈시대에서 스콧 피츠제럴드와 함께하게 되었고, 이 즐거운 첫 경험의 기억을 발판 삼아 앞으로 또 다른 Blind Date with a Book 기회가 찾아온다면 망설임 없이 기쁜 마음으로 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Blind Date 상대, 스콧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와 함께 The V&A Cafe에서.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걸어온 뒤에 따뜻한 실내 공간에서 소파에 앉아 탄수화물까지 먹고 나니 몸이 한껏 나른해진다. 더 앉아있고 싶지만 그러다간 작품 구경도 못하고 야속한 시간에게 쫓겨나게 될 것 같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천장화가 너무 예뻐서 지나가던 다른 방문객에게 부탁해 이를 배경으로 한 내 사진도 하나 찍었다.






비단 카페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의 내부는 모든 곳 구석구석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계획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사뭇 사색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별생각 없이 걷는 중인 옛 궁전 회랑의 유한(遊閑) 마냥, 복도를 따라 박물관 안을 탐방했다.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는 정말 온갖 종류의 예술품들이 한데 모여있었는데 그것들 하나하나 모두가 멋지고 볼만하였으나, 지극히 개인적으로 여러 테마가 한데 섞인 것을 선호하지 않는 나의 성향 때문인지 이 방대하고도 멋진 전시 공간이 내겐 조금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캐스트 코트(Cast Courts)에서는 유럽의 여러 기념비적인 조각이며 트라잔 등의 복제품들을 한 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었고, 그 섬세함과 정교함, 그리고 웅장함에 감탄과 찬미가 절로 나왔지만 한편으론 많은 것들이 빼곡하게 잔뜩 놓여있으니 괜히 피로감이 배가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모두들 내 키를 훌쩍 넘도록 큼직한 돌덩이들이 가득 들어찬 이곳에 들어와 있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리, 헤르미온느, 론 삼총사가 맹렬히 싸웠던 ‘마법사 체스’ 판 위에 놓인 것 같기도 했다. 나의 머릿속에선 ‘예술에 대한 찬미’ 그리고 ‘체스 전투에의 긴장감’, 상반된 두 가지가 서로 맞부딪치며 작은 미풍이 일렁였다. 이에 덩달아 머리도 조금 일렁이는 것 같았다.


캐스트코트의 웅장한 예술품들.



비단 박물관 이름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은 빅토리아 시대 그 자체와 같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집한 온갖 박물들과 디자인 양식, 극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인테리어가 모여 한 공간으로써 구현된 이 번쩍번쩍 멋들어진 곳은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던 그 번화한 시절을 방불케 했고, 또한 해가 지지 않는 그곳은 얼마나 과열되어 있었으며 그 열기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몰소되어야만 했을지에 대하여 잠시나마 상념에 잠기도록 했다.




저녁의 V&A 박물관 외부 전경. 해 저문 후에 보는 모습도 예쁘다.



이전 22화 [21] 빅토리아풍 The V&A Café, 스콘맛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