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과 오영

여섯번째 이야기

by YJ Anne

-이영-


“내 이메일 주소 알고 있지? 내가 도착하면 연락할 테니까 모르는 척하기 없기다.”

오영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호주행 비행기를 탔다.


“쳇, 나중에 본인이 나를 모르는 척할지 누가 알아?” 자유분방한 오영이 다시 호주로 돌아가면 멀리 한국에서 잠깐 만난 친구가 생각이나 날까? 싶었다. 호주에 도착하면 바로 다음 날 개강이라 바쁠 거라고 말했으니 나에게 연락할 시간이 당연히 없으리라 생각해 일부러 기대를 지웠다.


내가 연출한 뮤지컬 [렌트]에 오영을 데려갔던 날, 끝나고 나서 나를 바라보는 오영의 눈길은 아주 잠깐이지만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다시 쾌활한 오영으로 되돌아왔지만 뭔가 느낌이 달랐다.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아서 서운했었나?’ 싶었는데 그 찰나의 서늘함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내가 잘못 본 것 같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떠난 오영은 정말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오영이 떠나고 나는 진짜 소개팅을 했다. 한 남자를 만났고, 그에게 호감이 갔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었던 그는 공부를 잘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책만큼 재미있었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네 번째 만났을 때 그가 먼저 사귀자고 내게 제안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나는 ‘뭐,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라고 생각했다.


그의 집에 놀러 갔던 어느 날, 나는 신발을 벗다가 그의 집 신발장 위에 놓인 우편물을 스치듯 보았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어, 잠깐? 이 사람 이름이…… 저기 있는 것은 아버지 이름일 텐데…… 같은 이 씨인데 왜 돌림자가 우리 아빠랑 할아버지 돌림자지? 이거 우연이겠지?’ 나도 모르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 홍주 이씨에요?”

그때 그의 눈빛은 내가 무슨 뒷조사를 한 사람인 것처럼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이영씨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 이 우편물에 있는 이름이 아버지 존함 맞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돌림자가 내가 아는 돌림자라서.”

“그러면 혹시 이영씨도?”

“네. 저도 홍주 이씨에요.”

경주 이씨와 전주 이씨가 가장 흔한 본관인데 순위에서도 그리 높지 않은 홍주 이씨라니. 심지어 돌림자도 같으면 이 사람은 나의 아버지 항렬이었다.

‘아…………동성동본이구나. 뭐, 어때? 사촌도 아니고 그렇게 가까운 혈족도 아닐 텐데……’


때마침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고 동성동본은 우리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집에서 큰 문제가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 그의 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오는 문중 모임에서 가장 막내 열에 있었고, 아들의 여자친구가 동성동본이라는 사실은, 그의 아버지를 감히 넘볼 수 없는 어르신들에게 호되게 혼이 난 철이 없는 아이로 만들었으며, 어머니는 집안을 이렇게 뒤집을 거면 당장 헤어지라고 그에게 불호령을 내리셨다.


이 모든 일을 나는 몰랐다. 나와 사귀고 있는 이 조금 덜 지루한 도서관 사서가 추석 명절이 시작된 어느 날부터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내 문자에 답장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전화를 걸면 그냥 끊어버렸다. 덜 지루했던 남자는 내게 무례한 남자가 되었고, 나는 화가 아주 많이 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는 그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사람이 싫어지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마저 없는 건가요? 차라리 싫다고 말했으면 이렇게 화가 나지 않을 텐데요. 당신은 비겁합니다. 하지만 난 비겁하진 않으니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문자합니다. 우리 더 이상 만나지 맙시다.’


문자를 전송하고 5분이 지나기도 전에 핸드폰에 그의 이름이 떴다. 전화였다.

“이영씨, 내가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고요. 추석 명절에 집에 일이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호되게 혼났음을, 어머니에게 들었던 경고를 내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이게 단지 내가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벌어진 일이군요?”

“네…… 미안해요. 진작 말하지 못해서. 엄마가 아직 집에 계셔서 연락을 받지 못했어요.”

스물다섯의 남자는 헤어지라는 말에 반박할 용기가 없었다. 아! 그렇지. 용기가 없는 것보다 그만큼까지 나를 좋아하지 않은 탓이다. 후. 머릿속이 쉽게 정리됐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선 오해를 바로잡겠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저도 남의 집 귀한 자식인데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단지,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다니요. 저도 당신의 부모님을 만나고 싶은 이유가 하나도 없네요. 고맙습니다. 정리해줘서. 잘 지내요. 그럼 이만.”

뒤이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지우며 전화를 끊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다음 뮤지컬을 위해 동호회 사람들과 늦은 시간까지 연습했던 날이었다. 피곤했지만 기분 좋은 날이었다. 뿌듯했던 기분이 그 사람 때문에 가라앉았다. 갑자기 움츠려있던 피곤이 밀려왔고 끝도 없이 자고 싶었다. 다행히 다음날은 아빠 생신이라 가족들과 저녁에 만날 스케쥴만 있었다.

‘자야지. 자고 나면 가라앉은 이 기분도 괜찮아질 거야. 그냥 눈을 감고 눕자.’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안 좋은 일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날.

도서관 사서와 헤어진 다음 날 아빠의 생신을 맞아 가족들은 고기 뷔페로 향했다. 맛있는 고기를 마음껏 먹고 훌훌 털어버려야지 다짐했던 내게 아빠는 보란 듯이 폭탄을 안겨줬다.


“영아, 아빠가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뭔데요?”

“아빠가 트럭 운전을 할 거거든? 그런데 트럭이 없네? 그래서 사야 하는데~ 네가 알다시피 내가 신용불량자잖아. 엄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할부금은 내가 갚을 테니까 네 명의로 트럭 좀 사게 해줄 거지?”


마치 명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지난번 은행 대출금도 이자가 대출금만큼 쌓여서 내 명의로 돌려놓고 모르는 척하더니 이제는 트럭이었다. 할부금을 아예 내 이름으로 시작하겠다고.

내 접시에는 돼지갈비가 아니라 폭탄이 놓여 있었다. 나는 지금 결정해야만 했다. 끊으려면 단호하게 끊어야 했다.


나는 아빠를 바라보고 활짝 웃었다. 나를 희망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빠를 향해 말했다.

“아빠. 생신 축하해요. 그리고 트럭은 음……. 안 되겠어요. 저 회사에서 해고 통보받아서 제 이름으로 할부를 신청하기 힘들 거에요. 지금 회사는 이번 달까지 거든요. 제가 나중에 좋은 직장 자리 잡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봐요. 우리. 알았죠?”


나를 바라보던 아빠의 눈동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의 아빠는 착한 사람이었다. 너무 착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

접시에 놓인 폭탄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폭탄이 터지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나, 너무 피곤해서 먼저 갈게. 맛있게 먹고 가요. 아빠 생신이니까 저녁은 제가 살게요.”

그 말에 가족들은 다시 환하게 웃었고 나도 환하게 웃으며 폭탄을 피해 나올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오영에게 편지를 썼다.

호주에 도착해서 한 번도 내게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던 그녀에게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물으며 조만간 내가 호주에 가게 되면 이 메일로 연락하겠다고. 그때 만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적고 전송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는 정말 호주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하고 승인되자마자 비행기를 예약했다. 오영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우선 호주 퀸즐랜드에서 세컨 비자를 위해 6개월 동안 딸기 농장에서 일할 예정이었다.


카불쳐라는 지역에 있는 딸기 농장에서 내가 헬불쳐를 만나게 될 줄 꿈에도 모른 채 나는 설레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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