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이야기
-이영-
어디선가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쳐 갔다. 방문자들이 들고 왔을까? 아니면 복도 끝에 있는 간호사들이 마시고 있는 향일까? 모카향이 은은하게 섞여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 담당 간호사 제니 커피가 아닐까 싶다.
어제 오영이 왔었는데 언제 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오영이 왔다는 말은 노트에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가 쌓여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아……. 맛있는 와인 한 잔과 함께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병원에서 절대 가능할 리가 없다. 아쉽네. 입맛을 쩝쩝 다셨다. 딱히 끼니마다 약을 먹는 건 아닌데 입안은 늘 약이 고여 있는 것처럼 쓰다. 저기 서랍 어딘가에 슈가프리 민트 사탕이 있을 텐데. 지난번에 닉이 개운함을 느끼고 싶을 때 하나씩 먹으라며 서랍 안에 쏙 넣어 줬던 기억이 났다. 그조차도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기억이…………. 하얀 페인트를 겹겹이 바르고 있는 것처럼 하얗게 변해가고 있다.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를 마구 흔들어 뇌에 자극을 주면 조금 더 뿌연 안개가 가시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흔들었다가 욕지기가 나와 멈췄다. 아, 맞다. 나 환자였지. 종종 맨정신으로 돌아오면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럴 때 오영이 곁에 있으면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하지 말랬지?’하며 나무라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텐데. 예전에는 그 눈빛이 싫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것 하나조차 그립다. 아직 다 지워진 것도 아닌데, 이미 다 지워진 것처럼 애잔하게 그립다.
“자~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써놨는지 만나볼까?”
[내 스물두 살 생일 파티 기억나? 그날 닉이 너에게 고백할 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닉이 내게 미리 말해줬었거든. 그리고 그날 너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지.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어.]
‘흠…… 닉이 너에게 미리 알려줬었다고? 전혀 몰랐네. 내가 만약 그날 너의 수학 노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기억을 더듬는다. 스물두 살의 너와 스물네 살의 나.
“이쪽은 내가 한국에서 만난 친구 이영. 내 옆에 있는 친구는 학교 친구 닉, 카멜론, 세나야.”
“영이랑 똑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너였구나? 만나서 반가워.”
오영의 친구들은 하나 같이 나를 반갑게 받아 들여줬다. 호주에 와서 헬불쳐라고 불리는 카불쳐 딸기 농장에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나니 흙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근사하고 세련된 멋쟁이로 보였다.
모두 그냥 티셔츠에 청바지, 반바지를 입은 아주 평범하고 깔끔한 청년들 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눈부셨다. 나도 분명히 그들처럼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건데도 나는 아직 흙먼지를 머릿속에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주지 않는 인종차별의 눈길을 혼자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어두컴컴한 내 속마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언제나 매너가 좋았던 오영의 친구들이 몰랐다는 사실이 가장 다행이었다.
특히 닉은 언제나 친절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 해서 대화에 잘 못 어울리는 듯하면 마치 7살 아이에게 설명하듯이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내가 일하는 가게에 오영과 주로 함께 왔지만, 언제부턴가 혼자서도 종종 들리곤 했다. 지나가다가 생각났다며 깜짝 방문해서는 직원 모두에게 커피를 사주고 가는 날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퇴근하려는데 비가 많이 왔었다. 가게에서 집까지 걸어서 15분이기에 그저 뛰어가면 그만이었다. 대부분 운동 삼아서 조깅 하듯이 다니곤 했으니까. 금요일 저녁은 이모님과 내가 마감하고 퇴근하는 날이었다. 사장님은 매주 금요일 저녁에 밸리 댄스를 배우신다며 늘 한 시간 일찍 가게를 나섰다.
가게 불을 끄고 문단속을 하고 있는데 이모님께서 ‘어머! 닉!’하고 소리치셨다. 문을 잠그고 뒤돌아보니 닉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손에 우산이 하나 더 들려 있었는데 닉은 그 우산을 이모님 손에 쥐여 주었다.
“집에 딱 들어갔는데 비가 오는 거예요. 이모님이랑 이영이 생각나서 들고 왔어요. 마감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우산 쓰고 가세요. 감기 드시겠어요. 이영은 제가 집에 잘 데려다줄게요.”
“어머~ 이런 스윗가이가 이영일 데려다준다니 내가 당연히 양보해야지. 호호호.”
왠지 이모님이 신이나 보였다. 신이 나신 이모님을 뒤로 하고 닉과 나는 같이 우산을 쓰고 길을 걸었다.
호주에서 맡는 비 냄새는 한국과 달랐다. 조금 더 나무 향이 진하게 베어져 있었다. 아마도 곳곳에 심겨 있는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유칼립투스 냄새는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더 진하게 내 코끝을 자극했다. 마치 젖은 근육질 남자의 전신을 코끝으로 훑어 내리는 느낌이랄까? 섹시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닉의 밝은 갈색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순간 가슴이 쿵쾅! 하고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설마! 닉이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이영, 너 좋아하지?”
‘좋아해? 내가? 뭘?’ 당황한 내 눈동자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이때 닉이 큭큭 웃었다.
“너 비 좋아하냐고. 뭘 생각한 거야? 설마 너 나 좋아하는 거야?”
“어? 맞아. 아! 아니, 네가 아니라 비…… 비를 좋아한다고. 그, 그렇게 말하는 거야.” 젠장 더듬었다. 녀석의 금갈색 눈동자가 나를 순간 당황하게 만들었나 보다. 근데, 왜? 왜 당황하는 거지?
닉은 살짝 후후 웃더니 앞을 보고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너, 좀 귀엽다. 오늘.”
닉의 말에 나는 귀까지 새빨개졌다. 창피하게 내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고백을 처음 받아보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고백도 아닌데. 내 몸은 왜 이렇게 더워지는 건지…………하아……
마침내 내가 사는 쉐어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혹시 닉이 키스하는 거 아냐?’ 약간 긴장하고 설렜었다. 닉은 그런 내 기분을 알았던 걸까? 마치 장난을 치듯이 내 볼에 가벼운 굿 나잇 키스를 하곤 뒤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닉은 매일 내가 일하는 가게로 출근했다.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종종 낮에 오영과 함께 친구들을 데리고 점심을 먹고 가는 날에도 어김없이 저녁에는 나를 데려다주러 왔다.
마치 데이트인 것처럼 우리는 주말에도 만났다. 닉은 나를 데리고 시드니 시티에 있는 관광코스를 모두 데리고 다녔다. 우리는 동물원에 가서 유칼립투스 잎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 코알라와 치즈를 외치며 사진을 찍었다. 어떤 날은 아쿠아리움에 데리고 가더니 잠수복을 입고 상어가 내 코앞까지 오는 공포를 경험하게 했다. 만약 내 손에 녀석이 좋아하는 먹이가 들려있지 않았다면 분명 내 머리를 한입에 꿀꺽했을 것 같은 크기의 백상아리였다. 살벌하게 무서웠지만, 그만큼의 공포는 내게 최고의 스릴을 느끼게 해주었다.
로컬 사람들만 간다는 맛집을 종종 데리고 가기도 했는데 감자튀김에 소금을 솔솔 뿌리고 식초를 뿌려 먹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대체 저 맛있는 감자튀김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닉에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날 나는 식초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 감자튀김에 코를 박고 흡입했다.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강렬하고 짜릿한 맛의 쾌감을. 그날 이후로 내 감자튀김에는 늘 식초가 단짝으로 붙어 다녔다.
닉이 알려준 또 하나의 기막힌 맛은 바로 베지마이트였다. 호주 사람들이 토스트에 발라먹는 잼이라는데 냄새는 꼭 백 년 묵은 된장 냄새였다. 몸에 좋은 채소를 발효해서 만든 거라고 건강에 좋다며 호주 사람들은 토스트한 식빵에 버터와 함께 베지마이트를 즐겨 먹었다.
닉은 자기가 사는 집에 초대해서는 내게 베지마이트를 정석으로 먹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뭐, 직접 눈앞에서 보니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과 어떤 점이 다른지 전혀 알아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맛이 정말 끝내줬다. 버터의 고소함과 베지마이트의 짭짤함의 조합은 그냥 미쳤다. 그날 이후로 내 토스트 세계에서 베지마이트는 절대 사라질 수 없는 궁극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닉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분명 연인은 아니었는데 어떤 날은 이런 게 연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닉은 분명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고백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반면 나는 그가 점점 내 세계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진하게 인지하는 중이었다.
‘그에게 나는 그저 친구인 걸까? 그게 아니면 나는 그의 세상에 어떤 존재로 살고 있을까?’
내 마음에 이런 고민이 점점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내 고민을 한 방에 잠재워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오영의 생일 파티가 열리던 날, 나는 오영과 친구들이 왁자지껄 폭소를 터트리며 건배를 외치고 있을 때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급하게 핸드폰을 들고 조용한 곳을 찾아야 했고, 하필이면 들어간 곳이 오영의 방이었다. 오영의 방에 들어와 본 적은 그날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오영의 부모님께서 나를 집으로 초대하셨던 날, 오영이 내게 구경시켜 준 것이 다였다.
내일 스시 플래터 주문이 10건이나 들어왔다며 아침에 두 시간 일찍 출근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사장님의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나가려는 찰나 테이블을 살짝 건드렸는지 노트 한 권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샛노란 색 A4 크기였는데 맨 앞에 Math라고 적혀 있었다.
“오호라~ 회계 전공한다더니 수학은 좀 잘했나 볼까?”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노트를 집어 들었다. 아마 그 노트가 수학 노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열어보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분명 맨 앞에 Math라고 적혀 있었고, 하단에는 오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정확히 한 가운데를 펼치려 노트를 양손으로 잡았다.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짠~ 하고 열어젖힌 순간. 나는 봐버렸다. 그녀의 일기를. 닉을 마음에 품고 있던 오영을 알아버렸다.
“젠장”
그날 오영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닉은 내게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고 싶다고 고백해버렸다.
“아………… 진짜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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