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K를 만났다. 커피 한 잔을 사이에 일상을 얘기하다보니 자연스레 아이들 얘기가 오갔다. 내내 속썩이던 아들이 요즘 철이 들고 있단다. 좋겠다고 맞장구를 치니 의외의 답이 나온다.
" 한번은 퇴근 후 설거지를 하는데 일하고 오셔서 설거지까지 하시네요.저는 핸드폰만 하고 있는데 죄송해요. 담엔 먹은 그릇 씻어 놔야겠어요. 하더라구 안하던 애가 그러니까 이게 뭐지 싶은거지 "
아이의 다감한 말투에 놀라 쳐다보니 사뭇 진지하기까지 해서 살짝 걱정이 되더란다. 공부해도 성적이 안 나오니 죄송하다며 안 하던 말까지 하고. 왜 이런 얘길 할까 싶은데 이어지는 말들이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고
- 저 한 달만 절에 가 있고 싶어요
- 우린 교회 다니는데 굳이 절을? 템플스테이 같은 걸 말하니?
- 한 달 정도로 알아봐 주세요
- 거기 가면 핸드폰도 못할 텐데?
- 상관없어요. 그냥 그런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요
아이의 급작스러운 부탁에 당황스러웠지만 긴 얘기 끝에 알아보게 됐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열흘 정도의 일정으로 예약을 잡아놓은 상태란다. 철 드려고 애 쓰는 아이를 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했다.
"철들기까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싶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 철들어야 할 고민을 혹시 부모인 내가 준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
그렇지 않을 거라고 평소에 진중한 아이니까 잘 헤쳐나갈 거라고 말을 돌렸다. 집에 오는 길에 철이 든다는 건 뭘까를 생각해 본다. 자기주장만 펼치던 아이가 주변을 돌아본다는 건 이제 자기 안의 틀을 깨는 거겠지.
나의 철듦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 어린 시절 철이 일찍 들었다는 말에 으쓱했다. 내 주장을 하지 않고 한번 양보하면 철들어서 그렇다는 칭찬을 받게 되니. 다른 애들보다 먼저 어른이 되는 거 같았다. 육 남매의 셋째인 나는 어리광을 부릴 수 없었다. 투정을 받아줄 상대가 없으니 그나마 철이 일찍 들었다는 수식어가 나를 포장하는 무기가 되었다.
사실은 철들고 싶지 않았지만 철듦의 연기가 필요했던 때였다. 내 유년 시절은 그랬다. 사춘기가 되니 일찍 철든다는 건 가면 하나를 준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미 철들었는데 뭐라 투정 부릴 핑계를 찾지 못했다. 그 가면을 벗고 싶었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자기중심적 사고에 그쳐있다. 철이 들지 않아 내 마음 내가 정리해야 할 때가 많다. 철이 늦게 들었으면 좋겠다는 지인의 말이 여운으로 남아서인지 이런저런 상념이 몰려왔다. 철듦의 의미를 생각해 본 날이다. 철들지 않고 싶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