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젖혔다. 창밖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니 기분이 좋다.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고 밤새 놀다가 눈을 보려는 야무진 꿈을 꿨건만 스르르 감긴 눈 때문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낮에 한의원에서 맞은 침덕분에 평소와 달리 깨지 않고 단잠을 잔 탓이다. 아쉬움은 있지만 개운한 아침을 선물 받았으니 아침을 즐기자 마음먹었다.
기온이 오른다 했으니 오후쯤엔 다 녹을 것이다. 순백의 흰 눈을 눈에 담고 싶은데 외투까지 차려입고 나가려니 망설여졌다. 하지만 어제 사지 못한 음식재료를 떠올린다. 다양한 색감의 야채를 곁들인 잡채를 하기로 했는데 주재료인 당면을 빼먹었다. 당면코너를 제일 먼저 들려야지 하고는 기억하지 못한 덜렁거림을 탓했건만 오히려 빠뜨린 게 신의 한 수라 여기게 됐다. 눈꽃 데이트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양치를 하고 물 한 모금 마신 뒤 옷을 챙겨 입었다. 동네 마트 오픈 시간에 맞춰 공원 한 바퀴를 돌고 커피 한 잔을 하기로 동선을 짜본다. 부츠를 신고 장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 쌀쌀했지만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일부러 소나무밭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철 푸르른 나뭇잎이 하얀색을 입은 모습이 새로웠다. 소나무의 변신이다. 하얀색과 녹색의 어울림이 멋스럽다. 커다란 바위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다. 솜옷을 입은 듯 보였다.
공원 비탈길은 이미 눈을 치워 염화칼슘까지 뿌려져 있었다. 한쪽이라도 치워놓지 않으면 썰매 부대로 인해 미끄러운 빙판이 돼버릴 것을 우려한 누군가의 발 빠른 대처다. 황량했던 나뭇가지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이니 눈꽃으로 태어났다. 눈꽃에 눈길을 주고 눈밭을 걸으니 기분이 좋았다.
빨리빨리 달려 달려를 외치는 꼬맹이들의 소리가 공원을 메운다. 이른 시간인데 공원을 점령한 형제들을 보니 우리 집 보물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눈만 오면 베란다에 있는 썰매를 끌고 나갔었다. 마지못해 따라나섰지만 썰매를 타다 보면 아이들보다 더 신나라 했던 엄마였다. 같이 즐기던 그 겨울의 추억이 생각났다.
마법 같은 흰 눈이 만들어낸 풍경에 경탄하며 공원을 돌다 보니 눈과 함께한 추억들이 새록새록이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 나는 눈을 밟으니 옛 추억도 눈에 밟히는 특별한 아침을 맞았다. 눈에 눈을 담는 이 아침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