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동안 당신을 기다리며 미소 짓는 조각상
얼마 전 국립박물관 문화상품 웹사이트에 반가사유상 모형 조각상이 새로 올라왔다. 이 작고 귀여운 반가사유상은 현재 일시 품절 상태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곧 새로운 물량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 관심 있는 구독자분들은 다음 타이밍을 노려보시길.
그렇다. 눈치챘겠지만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반가사유상이다. 코로나 때문에 박물관도 못가게 된 삭막한 요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며 조금이나마 마음을 녹여 보는 건 어떨까.
서산 마애삼존불의 보살은 왜 앉아있나
충청남도 서산에는 유명한 마애삼존불이 있다.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 중 하나로 불상의 얼굴은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마애삼존불' 단어의 뜻은 이러하다. 마애(磨崖)는 바위에 조각했다는 뜻이고 삼존불은 가운데 부처, 양옆이 보살인 구도를 이르는 말이다. 부처와 보살을 한 구도에 묶을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본적인 구도다.
일반적으로 서산 마애삼존불의 본존(법당에 모신 부처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부처)은 석가불, 앉아있는 보살은 미륵보살, 구슬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보살은 관세음보살로 보고 있다. 당시 가장 잘 알려진 석가, 미륵, 관음의 삼존불을 모셨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서산 마애삼존불의 구도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삼존불의 경우 가운데 부처가 서 있든 앉아 있든 좌우에서 부처를 모시는 보살은 보통 서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산 마애삼존불의 경우 한쪽 보살이 앉아있는 반가사유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 손은 뺨에 대고 생각에 잠겨있다.
반가사유상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국보 반가사유상을 떠올릴 텐데 이제는 같은 모양의 서산 마애삼존불도 함께 기억해보자. 역사상 수많은 삼존불이 있지만 옆에 있는 보살을 반가사유상 형태로 배치한 것은 서산 마애삼존불이 유일하니까 말이다.
그냥 '반가사유상'이 아니라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보통 우리나라에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라 불린다. 또한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여 태자 반가사유상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상인지 싯다르타 태자상인지 확정할 수가 없어 지금은 그냥 '반가사유상'으로만 주로 불린다. 국립중앙박물관 설명에도 '반가사유상'이라고만 돼있다. 그러나 서산 마애삼존불의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틀림없다. 태자 반가사유상이 부처를 옆에서 모시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백제인들은 왜 역사상 처음으로 반가사유상을 부처 옆에 조각했을까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이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미륵은 56억 7천만 년 뒤에 중생을 제도할 부처님이며, 이 땅에 내려오기 전에 도솔천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어떻게 하면 미래의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 이가 바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백제인들이 삼존불을 조성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반가사유상을 부처 옆에 조각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미래에 중생을 제도할 미륵보살을 부처의 옆에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추해 볼 뿐이다.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미래를 의미한다면 나머지 둘, 부처와 보살은 현재와 과거를 의미하는 것 같다. 부처는 현재, 다른 보살은 과거를 의미한다. 현재의 부처는 미륵에게 부처가 되리란 약속을 준 석가모니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수백 년 전에 열반에 들었지만 미륵이 하생 전까지는 현재의 부처님이라고 볼 수 있다. 석가모니가 미륵에게 부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준 이야기는 여러 경전에서 언급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 유명한 약속을 '수기'(授記)라고 한다.
구슬을 감싸고 서 있는 보살은 누구?
현재의 석가모니가 미래의 미륵에게 수기를 내렸듯이 과거의 누군가가 석가모니에게도 부처가 되리란 수기를 내려주었다. 바로 제화갈라보살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구슬을 쥐고 서 있는 보살이다. 제화갈라보살은 부처일 때 정광불(연등불)이라고 불렸다.
이야기는 정광불이 한 마을에 찾아오면서 벌어진다. 석가모니가 아주 오래전 전생, 선혜동자로 있을 때다. 마을 사람들은 꽃이며 향이며 온갖 것들을 들고 정광불을 맞이하러 갔다. 그런데 선혜동자는 특별히 드릴 것이 없었다. 동자는 어제 비가 와서 땅이 젖어있는 것을 보고 정광불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풀어 펼치며, "부처님이시여, 제 머리를 밟고 가시옵소서"라고 했다. 정광불은 동자의 정성에 감복하여 "너는 머리를 펼친 공덕으로 나중에 부처가 될 것이다"라는 수기를 준다. 불국사 대웅전 석가삼존불의 협시(부처를 좌우에서 모시는 두 보살)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다. 여기에도 정광불과 선혜동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백제인은 왜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방식의 삼존불을 만들었나
서산 마애삼존불의 제화갈라보살, 석가모니, 미륵보살의 구도는 바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불교의 '수기사상'(授記思想)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중단된 적이 없었듯이, 부처가 과거, 현재, 미래를 거쳐 중생을 제도하리란 약속도 변함없음을 보여준다. 그 변함없는 약속을 백제인은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돌에다 새겨 놓았다. 그러한 간절한 바람을 담기 위해 백제인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삼존불을 만들었다. 바로 부처의 옆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앉아있는 반가사유상을 새겨 놓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날 기다리는 얼굴이 아닐까 싶다. 반가사유상이 바로 그런 얼굴이다. 천년이 넘도록 당신을 생각하며 기다려온 얼굴.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약속 시간에 숨어서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라. 바로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다.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고 외국 여행을 가게 되거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로 여행 왔을 때, 외국인 누군가 "한국에 볼 만한 게 있습니까"라고 묻거든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 천년 동안 당신을 기다리며 미소 짓는 조각상이 있으니 꼭 가보라!"고 답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