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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만의한국사 Dec 17. 2020

역사 이래 이런 OO은 없었다

영화 <극한직업> 명대사 아니고 백제 '칠지도'

2019년 개봉했던 천만 영화 <극한직업>에 이런 명대사가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은 없었다'는 각종 SNS, 마케팅에서 숙어처럼 쓰이며 유행어로 정착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백제 칠지도에 먼저 등장했다.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바다 건너 왜(일본)에 하사한 칼이. '선세이래미유차도'(先世以來未有此刀). 칠지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역사 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라는 뜻이다. 이번 글에서는 백제의 자신감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문화재 '칠지도'에 대해서 소개해보려고 한다.


역사 이래 이런 '7'은 없었다


7은 행운의 숫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숫자다. 재미있게도 7이라는 숫자는 역사 이래 이런 성과는 없었던 성과를 보여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과도 연관이 깊다. 여러분도 한번 떠올려봐도 좋겠다. (*편집자가 떠오른 것들: 손흥민, 박지성의 등번호 7, 일곱 명의 방탄소년단 등이 생각난다)

백제 칠지도 모조품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오늘 이야기할 칠지도(七支刀)도 7이 들어간 칼이다. 그런데 칼의 모양을 보고 나면 왜 이것이 칠지도일까 의문이 생긴다.


칠지도의 가지는 몇 개일까


백제 근초고왕이 하사한 칠지도는 19세기 일본의 이소노카미신궁에서 발견됐다. 칠지도의 모양은 매우 특이하다. 그런데 '일곱개의 가지가 달린 칼'이라고 해서 '칠지도'라고 부르지만 칠지도의 가지 개수를 직접 세어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칠지도의 가지는 몇 개일까.


당연히 7개다.

양옆으로 3개씩 6개가 달려있고 가운데 가지까지 더하면 7개다. 칼의 모양을 보면 전쟁 때 사용하는 칼은 아닌 것 같다.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처럼 칠지도의 일곱 가지도 백제의 영토와 국력이 뻗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는 남쪽 가야 지역의 일곱 나라를 정벌한 적도 있다. 일주일의 '화수목금토'와 '일월'을 칠정이라고 해서 중요시하기도 했다.


아니다. 가지는 6개다.

칼의 이름에 숫자 칠이 들어가서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칼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가지 개수는 6개다. 양옆에 3개씩 6개의 가지가 있고 가운데는 줄기로 봐야 한다. 칠지도가 맨 처음 발견됐을 때 육지도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만약 이 칼에 대해서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가지가 몇 개냐고 물어보면 아마도 6개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칠지도로 배워왔기 때문에 당연히 가지가 7개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운데가 줄기임에도 '7'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가지는 7개다.

처음 칼이 발견됐을 때 '육지도'라고 했지만 곧 칠지도라고 정정했다. 칼의 표면 앞뒤에 칼을 만든 날짜, 목적과 함께 칼의 이름을 '칠지도'라고 새겨놓았다. 백제 사람들은 가지가 6개인 칼을 만들고 왜 이름을 '육지도' 아닌 '칠지도'라고 했을까. 어느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백제 사람들도 "역사 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라고 칼에 새겨 놓은 것은 아닐까. 모양의 비밀은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칠지도의 가지 수가 그냥 '7'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칠지도의 비밀을 풀 수 없다. 억지로 7에 맞추지 말고 왜? 왜? 라고 끊임없이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비밀의 실타래가 풀린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걸 배워왔다. 그러나 배웠다고 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신에게 한번 더 물어보고 자신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자신의 지식이 되고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새로운 것도 발견할 수 있다.  


1년을 상징하는 상상 속 풀 '명협'의 의미를 담은 걸까


이제부터 그 생각의 타래를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칠지도는 하나의 줄기에 6개의 가지가 달린 모양이다. 그 모양은 6개의 잎이 달린 명협(蓂莢)이란 풀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 산동성 무씨사당화상석 중 명협 6협과 15협

명협상상 속의 풀(나무)로 태평성대에 궁궐의 섬돌에서 핀다고 한다. 중국의 <제왕세기>, <설부> 뿐 아니라 최치원의 시, 이규보의 <동명왕편> 등에 언급돼 있다.


<제왕세기>에 명협은 6개 잎, 15개 잎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6개 잎은 한 달에 하나씩 잎(가지)이 피고 7개월째부터는 하나씩 져 1년을 상징한다. 15개 잎은 하루에 하나씩 피고 16일부터 져 한 달을 상징한다. 그림처럼 함께 있으면 몇 월 며칠인지 알 수 있는 셈이다.


예로부터 달력은 새해 첫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는 물건이었다. 칠지도가 근초고왕이 왜에 하사한 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연결된다.


'풍년'의 풍(豐) 한자 속 상단 부분 모양과도 비슷하다
풍(豐) 글자의 상단 부분 모양을 본뜬 주풍관와당문

중국의 고식 기와에서 '풍년'의 풍(豐) 글자의 상단 부분을 간략히 그린 모양을 찾아볼 수 있다. 명협보다 칠지도의 형상과 흡사하다. 이 모양에는 풍년과 태평성대의 의미가 담겨있다.


'한줄기 이삭에 여섯 개 달린 벼'라는 유사한 표현을 찾다


사마천 <사기> 사마상여열전에 "도일경어포"(一莖於庖)(뜻: 한줄기에 이삭이 여섯 개 달린 벼를 부엌에서 가린다)라는 문구가 있다. '벼 가릴 도(䆃)'의 사전적 의미는 '가리다', '가려서 얻은 벼'다. 줄기에 이삭이 여섯 개인 '일경육수'는 제사에 쓰이는 벼다. 특별히 제사에 쓰이는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穗)는 잎이 6개인 명협과 연관 지어진다. 달력과 농사는 불가분의 관계다. 가려서 얻은 벼를 제물로 사용해 농사를 잘 되게 해 준 하늘에 감사드리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줄기에 이삭이 여섯 개 달려있다는 표현에서 한줄기에 여섯 개의 가지가 달려있는 칠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추측 건데, 칠지도의 6개의 가지는 12개월을, 가운데 줄기는 1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는 칠지도의 형상에 대해 여러 역사적 사료를 통해 의미를 추측해 보았다면 지금부터는 칠지도의 어떤 부분에서 백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칠지도에 대한 판독 논란


「앞면」

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侯王△△△△作

태화사년오월십육일병오정양조백련철칠지도출벽백병의공공후왕△△△△작


(풀이) 태화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선세이래미유차도백제왕세자기생성음고위왜왕지조전세후세


(풀이) 역사 이래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칠지도에는 칼의 이름과 함께 제작연대(연호+월+일+일간지)가 모두 표기돼 있다. 글자 상태도 좋지 않고 연호와 월일 부분의 판독에 문제가 있어 논란이 있다. 현재 통설은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 정양'이다. 5월을 11월로 보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5월이 우세하다.


칠지도의 연호+월+일+일간지'를 판독자에 따라 다르게 판독하더라도, 이를 판독할 때 맨 처음 참조가 됐던 자료는 <일본서기>다. <일본서기>에만 보이던 칠지도란 칼이 실물로 눈앞에 등장했으니 <일본서기>에 관심이 집중됐다. 신공기 52년조에는 "(백제에서) 칠지도 1자루, 칠자경 1개, 여러 종류의 보물을 바쳤다"고 했다. 이 문장에서 칠지도를 지(支)가 아닌 지(枝)로 표기했는데,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기 때문에 <일본서기>와 어떻게 해서라도 연결시키려고 했다.


신공 52년은 서기 252년에 해당한다. 칠지도를 맨 처음 발견한 관정우는 연호 태화를 서진의 태시로 보고 제작연대를 태시 4년, 즉 268년으로 보았다. 칠지도의 연호를 신공 52년과 가까운 때에서 찾은 결과다. 한편 252년에 2주갑, 즉 120년을 더한 372년으로 보고 이에 맞추어 칠지도의 태화 연호를 동진의 태화 연호로 보기도 한다. 태화 4년은 369년이며, 대부분 이때 칠지도가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칠지도의 '태화'는 중국 연호인가?
아니다, 백제의 연호다.


칠지도의 태화 연호를 중국 동진의 태화 연호로 보고, 이에 따라 제작연대를 369년으로 보는 것이 현재 통설이다. 그런데 이 연대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태화 4년(369)의 월+일+일간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칠지도 명문에는 '5월 16일 병오'라고 하였으나, 현재 통설로 인정되는 369년 5월 16일은 병오일이 아니다. 따라서 369년으로 보았을 경우 월일과 일간지가 맞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옛 유물 연대를 추정할 때 월+일+일간지가 있다면 월일간지에 맞는 연대를 찾는 게 순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369년설이 힘을 얻게 된 이유는 일간지인 '병오'의 쓰임새를 특별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병오'는 칠지도의 월을 '오월'로 판독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 중국 한나라 때 학자 왕충이 쓴 <논형>에 의하면 칼과 거울을 만드는 시기는 태양의 불이 기운이 가장 성할 때를 골랐다고 한다. 바로 그때가 5월이고 날짜로는 병오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상 5월 병오일에 맞추어 칼을 만들 수 없을 때는 좋은 의미로 '병오'를 덧붙이거나 심지어 5월에 만들지 않았어도 5월 병오를 덧붙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중국과 일본의 칼이나 거울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서 증명됐다. 칠지도의 '병오' 역시 '5월 병오'를 실제의 날이 아닌 좋은 의미로 붙였다는 설이 힘을 얻으면서 칠지도의 제작연대가 태화 4년(369)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칼이나 거울에 새겨진 명문을 다시 한번 검토해보니 5월에 병오일이 있는데 그날을 제쳐두고 다른 날을 5월 OO일 병오라고 한 경우는 없었다. 칠지도는 369년 5월에 병오일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369년 5월 27일이 병오일이기 때문이다. 369년 5월 27일 병오일이 있음에도 굳이 '5월 16일 병오'라고 쓸 이유가 없다. 그냥 구체적인 날짜를 빼고 '태화 4년 5월 병오'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16일을 덧붙여 월일간지를 틀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칠지도 속 문자 '정양'이 쓰인 의미를 보면
백제의 독자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중국 왕충의 <논형>에는 5월 병오 다음에 칠지도처럼 '정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중'이 나온다. 중국의 칼이나 거울에도 '시가'를 '일중' 앞에 덧붙여 '오월병오시가일중'이라고 했다. 백제에서 칠지도를 만들 때 <논형>이나 중국의 예를 참조하지 않고 '일중'이 아닌 '정양'을 사용한 것이다. '정양'에 '일중'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정양'(正陽)은 사마천의 <사기> 사마상여열전에 의하면 '황룡'을 의미한다. 한낮의 의미에 천하를 통치하는 이미지가 덧붙여진 것으로 <논형>의 일중을 일부러 정양으로 고쳐 의미를 부각하고자 했다면 5월 16일 병오도 실제의 날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덧붙여 칠지도 양옆의 가지가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은 마치 불길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5월 병오 정양'의 본뜻에 어울리는 형태다.


이로써 칠지도의 제작연대를 알기 위해서는 5월 16일 병오에 맞는 연대를 찾는 게 순리이며, 가장 유력한 후보는 362년이다. 태화 4년이 362년이 되는 중국 연호는 없으므로 '태화'는 백제의 연호가 되는 셈이다.

필자가 칠지도의 '정양'을 따와 이름 지은 부여백제문화단지 '정양문'


태화가 중국 연호라면 이해되지 않는 상황


중국 당나라 <한원>에 의하면 백제는 중국 연호든 백제 연호든 사용하지 않고 간지(干支)로 연대를 표시했다고 한다. 태화가 통설대로 중국 동진의 연호라면 369년 당시 중국 연호를 사용한 것이 된다. 백제는 3년 뒤인 372년 중국 동진과 비로소 외교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백제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후 더 이상 동진 연호를 쓰지 않게 된다. 외교관계를 맺기 전에 사용한 연호를 정식 수교 후에 쓰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어렵다. 따라서 태화는 중국 연호일 수가 없다.


태화를 백제 연호로 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362년 당시 백제는 자국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372년 중국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 경우 대부분 자국 연호 대신 중국 연호를 쓰는 게 보통이다. 신라의 경우 자국 연호를 사용하다가 당나라와의 우호 관계가 깊어지면서 중국 연호를 사용했다. 그런데 백제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자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중국 연호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 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나는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이번 강의 목표는 '역사 이래 이런 강의는 없었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아마 속으로 비웃을지도 모른다. 내친김에 그들에게 역으로 제안한다. '역사 이래 이런 학생은 없었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같이 열심히 공부해 보자고.


'역사 이래 이런 강의는 없었다'라는 말도 실은 내가 만든 말이 아니다. 우리 역사가 가르쳐 준 말이다. 칠지도에는 '선세이래미유차도'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역사 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라는 뜻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글귀를 보았지만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글귀는 처음이다. 우리도 '칼'이란 자리에 뭔가를 넣도록 노력해 보자.


*본 글은 조경철 <나만의 한국사> 책 일부를 토대로 재편집했습니다.

브런치에 연재되는 글은 35년간 역사를 공부하고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자 '명협 조경철'이 쓰고, 영화 에디터(기자) 출신 편집자가 사려 깊고 현대적인 시선을 담아 재편집,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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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진 소개


_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연세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2013년 한국연구재단에서 조사한 인용지수 한국사 분야에서 2위를 했다. '나라이름역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자 노력 중이다.  


_편집자 부

대학에서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전공했으며, 매체에서 영화 기자로 근무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쉽고 흥미롭게 편집해 업로드할 예정이다. 트위터 '한국의 맛과 멋' 계정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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