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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만의한국사 Dec 16. 2020

원나라 황제를 위해 세운 탑이 국립중앙박물관 중심에?

'경천사 십층 석탑'은 고려 왕실의 기원을 위해 지은 탑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박물관은 어디일까. 아마 국립중앙박물관일 것이다. 한 번이라도 이곳을 방문한 적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물은? 박물관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천사지 십층 석탑'일 것이다. 멀리서부터 웅장한 기운을 내뿜는다. 가까이서 보면 그 크기에 한 번 더 놀란다. 조각도 매우 뛰어나고 화려하다. 돌도 대리석이고, 탑의 모양도 일반적인 사각형이 아니어서 이국적인 느낌도 든다. 박물관에 온 이상 다른 유물은 몰라도 왠지 이 탑만큼은 앞에서 방문 인증도 찍고 안내판도 꼼꼼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에 전시된 경천사 십층 석탑

대부분의 관객들 중에 박물관 안내판의 설명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설명이 언제나 정답일까. 2005년 박물관 개관과 함께 세워진 '경천사 십층 석탑'의 설명판이 올해 초, 바뀌었다. 왜 바뀌었을까. 먼저 바뀌기 전과 후 설명을 살펴보자.   




2019년 안내판에 표기된 설명


이 탑은 고려 충목왕 4년에 세운 십층 석탑으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고려 석탑의 전통적인 양식과 이국적인 형태가 조화를 이루며, 고려인이 생각한 불교 세계가 입체적으로 표현된 석탑이다. 사면이 튀어나온 기단부에는 사자, 서유기 장면, 나한 등을 조각했다. 목조 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탑신부에는 1층부터 4층까지 부처와 보살의 법회 장면을 총 16면에 조각하였으며, 지붕에는 각각의 장면을 알려주는 현판이 달려 있다. 5층부터 10층까지는 다섯 분 혹은 세 분의 부처를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지붕만을 복원하였다.


이 탑은 1907년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가 일본으로 밀반출하였으나, 영국 언론인 E. 베델과 미국 언론인 H, 헐버트 등의 노력에 의해 1918년에 반환되었다.

1960년에 경복궁에 복원되었으나 산성비와 풍화 작용에 의해 보존상의 문제점이 드러나 1995년 해체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0년간 보존처리를 진행한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2005년 용산 이전 개관에 맞춰 현재의 위치에 이전, 복원하였다.


2020년 안내판에 표기된 설명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대리석 탑으로, 고려의 전통과 당시 중국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목조 건축 장식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탑 아래쪽 3단의 기단부에는 당나라 현장법사와 손오공 등이 인도에서 경전을 구해오는 험난한 여정을 중심으로 나한과 사자를 새겼다. 그 위 탑신에는 여러 장면의 법회와 법회 이름을 새긴 현판을 달았다(1~4층). 탑 꼭대기까지는 다섯 분 또는 세 분의 부처를 조각하였다(5~10층).

1층 탑신에는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면서 온 백성이 편안하고 일체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내용과, 진령부원군 강융과 원사 고용봉이 시주하여 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새겼다. 1907년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가 일본으로 무단반출하였으나, 영국과 미국의 언론인 E. 베델과 헐버트의 노력, 우리 국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1918년 환수되었다.




바뀌기 전 설명을 읽어보면 일본에 우리의 유물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사실을 강조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뭉클한 애국심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경천사 십층 석탑이 친원파가 원나라 황제와 황후 황태자를 위해서 원나라 장인이 만든 탑이라는 설명은 없다. 나는 오랫동안 위와 같은 사실을 안내판에 서술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탑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링크는 작년 <경향신문>에 실렸던 기사) 드디어 바뀐 것이다.  


경천사 십층 석탑이 세워진 배경


그렇다면 진령 부원군 강융과 원사 고용봉은 어떤 인물이고, 왜 이 탑을 만들게 됐을까. 강융은 자신의 딸을 원나라 승상(지금의 국무총리 직급) 탈탈에게 첩으로 바쳐 권세를 잡은 인물이다. 고용봉은 원나라 환관으로 권세를 잡았다. 둘의 권세는 고려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 원나라에 붙어 권세를 잡은 대표적인 친원파들이 원나라 황제를 위해 세운 탑인 것이다. 바뀐 박물관 설명은 이 내용을 온전히 담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이에 대한 설명을 명시했다.


기황후와 고려왕실을 위해 세운 탑이라고?
그런 내용은 없다.
<선을 넘는 녀석들> 중 경천사 십층 석탑을 설명한 내용

그러나 지난 8월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경천사 십층 석탑에 대해 또 다르게 설명했다. 이날 방송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몇 가지 유물을 설명했는데 그중 경천사 십층 석탑을 소개하며 이 탑이 기황후와 관련된 탑이라는 걸 강조했다. 물론 탑에는 원나라 황제와 황후, 황태자를 위해 지었다고 쓰여있고 여기에서 황후는 기황후를 지칭한다. 고려 여자로 세계제국 원나라의 황후가 되었으니 기황후를 위해 세운 경천사탑은 그만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탑의 시주자인 강융과 고용보는 당대 대표적인 친원파로 그들의 권세가 백 년 만년 가기를 바라며 탑에 이름을 새겼다. 탑에는 원 황실에 대한 축원은 있지만 고려왕실에 대한 축원은 없다. 국태민안(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함)을 말하고 있지만 기황후와 강융 고용보가 말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독립된 고려가 아니고 영원히 원의 간섭을 받는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이었다. 그러니까 '고려왕실을 위하여'라는 말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


다시 한번 탑을 쳐다본다. 예전처럼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던 조각도 조금 불편해 보인다. 우리나라는 화려한 조각의 탑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이 탑을 원나라 장인이 만들었다고 쓰여있다. 친원파가 원나라 황제를 위해 발원한 탑을 원나라 장인이 만들었다고 하니 더욱더 혼란스럽다. 이 탑을 우리 문화재라고 볼 수 있을까. 국립중앙박물관 홀에 세울 만큼 우리나라 역사를 대표하는 문화재일까.  


만약 친일파 이완용이 일본 천황과 국태민안을 위해 탑을 세웠다면 그 국태민안엔 어떤 의미가 담겨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원나라 간섭기와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똑같이 놓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를 폭파한 것처럼 경천사 십층 석탑을 없애자는 것도 아니다. 과거 아픈 역사도 우리의 소중한 역사다. 다만 소중히 보존하되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알려야 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문화재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한국의 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유물이 많은데 국내외 관람객들에게 인상적으로 남는 것이 이 탑뿐일까 우려스럽다. 바람이 있다면 이러한 경천사 십층 석탑을 박물관 중앙에 전시할 것이 아니라 별관을 따로 만들어 과거의 아픈 문화유산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문화재가 됐으면 좋겠다.

 

*본 글은 조경철 <나만의 한국사> 책 일부를 토대로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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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 연재되는 글은 35년간 역사를 공부하고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자 '명협 조경철'이 쓰고, 영화 에디터(기자) 출신 편집자가 사려 깊고 현대적인 시선을 담아 재편집, 업로드합니다.


* 필진 소개


_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연세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2013년 한국연구재단에서 조사한 인용지수 한국사 분야에서 2위를 했다. '나라이름역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자 노력 중이다.  


_편집자 부

대학에서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전공했으며, 매체에서 영화 기자로 근무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쉽고 흥미롭게 편집해 업로드할 예정이다. 트위터 '한국의 맛과 멋' 계정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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