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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만의한국사 Dec 15. 2020

한국 역사의 분수령, 방탄소년단

중국 기준으로 살피느라 잘못 기록된 우리 역사 3

우리는 언제부턴가 우리 자신의 평가에 대해 인색했다. 우리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나 자신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중국을 기준으로 평가해왔다. 중국보다 앞서지는 못하지만 중국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것이 우리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다른 주변 나라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이었다. 중국이 아닌 나를 기준으로 절대평가를 하면 민족주의라고 비난을 받고, 중국과 다른 우리 역사를 얘기하면 국뽕, 국수주의, 민족주의가 심하며 타민족에 배타적이고 자국만이 최고로 여기는 행위나 사람이라고 몰매를 맞는다.


신라 이차돈의 순교 연대는 중국 달마가 선종을 전한 연도와 맞아야 했고, 단군 조선은 중국 기자 조선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백제의 3년 상은 중국의 27개월에 일치해야 했다. 우리 역사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게 아니라, 중국의 역사와 발맞추었기 때문에 위대한 게 돼버렸다. 중국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발맞춤의 역사, 아니 정확하게 항상 몇 걸음 뒤쳐서 따라가는 그런 역사가 지독히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1>
이차돈의 순교 연대가 중국 불교에 맞춰지다


이차돈 순교비

이차돈은 신라 법흥왕 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순교한 인물이다. 신라 최치원에 의하면 이차돈의 순교 연대는 528년이다. 신라 말, 고려 초 중국 선종이 전래 수용 발전하면서 중국에 선종을 전한 달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달마도 교종 불교의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 공교롭게도 달마가 중국 양나라에 선종을 전한 연대가 527년이었는데, 이차돈의 순교 연대가 이에 맞춰져 527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최치원이 기록한 이차돈의 순교 연대와 1년 차이에 불과하지만 이는 중요하다. 신라 불교의 기념비적 출발을 중국 불교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2>
조선의 의미를 단군의 조선이 아닌 중국 기자 조선에서 찾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단군 이후 기자와 위만에 의해 계승되었다. 통치자는 바뀌었지만 나라 이름은 그대로 '조선'이었으며, 기자와 위만의 국적이 무엇이든 단군과 조선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나 고조선이 멸망하고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도 멸망함으로써 고조선의 정체성은 서서히 단군에서 중국의 기자로 교체되었다. 고려시대 유교정치이념의 확산에 따라 그 속도는 더 빨라졌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도 중국 요임금이 나라를 세운 지 25년 뒤가 됐다. 한쪽에선 적어도 요임금과 같은 연대라고 하는 자존감은 남아 있었다.

태조 어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기자로의 교체도 가속화됐다. 이성계는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가운데 하나를 국호로 정해달라고 했으며, 명나라는 기자의 '조선'으로 정했다. 정도전도 '조선'의 의미를 '단군의 조선'이 아닌 '기자의 조선'으로 풀었으며, 마치 옛날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듯이 명나라가 이성계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 기자가 단군을 대체했고 나중에 조선은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하면서 자부심을 더해갔다.


<3> 
중국의 3년상에 맞춰 잘못 해석된 무령왕과 왕비의 3년상

무령왕릉 널길

여전히 역사적 사건을 중국 기준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대표적으로 무령왕릉에 대한 해석이 그렇다. 백제 무령왕릉은 중국 영향 그 자체였지만 모든 것이 중국 그대로는 아니었다. 중국과 다른 것이 왕과 왕비의 3년 상 기간이다. 무령왕과 왕비의 3년 상은 28개월이었다. 중국의 3년 상은 27개월이다. (*중국의 3년 상은 25, 27개월 논의 끝에 27개월로 정해졌다.) 우리는 28개월로 보지 않았다. 왕비의 경우 중국의 27개월에 맞추기 위해 죽은 달을 11월이 아닌 12월로 잘못 판독한 경우도 있었다. 아니면 28개월이라고 하지 않고 만 27개월이나 27개월을 지나서라고 표현하면서 어떻게든 '27'이라는 숫자를 드러나게 하였다. 무령왕의 우수성을 백제적 특징에서 찾기보다는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는 데서 찾았다.


이제는 다르다. 
한국 역사의 분수령, 방탄소년단


한 가지 위안을 삼는다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다. 기자의 문자인 '한자'를 수 천 년 동안 사용하다가 우리의 문자를 갖게 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기자 추종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자를 만든 세종의 업적은 한국 사상사의 일대 전환이었다. 물론 그 전환의 물줄기는 미미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한글이 한자를 앞지르리라고 생각했을까. 세계인이 한글을 배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의 언어로 된 노래를 부르리라는 걸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전 우리도 자신감이 넘쳤던 순간이 있었다. 백제의 칠지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 '역사 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없던 역사를 만들어내자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을 되찾자는 것이다.

'타임' 화보 속 방탄소년단 (출처 - @TIME 트위터)

2020년, 이제는 다르다. 올 초 한국어 영화 <기생충>이 미국 로컬 시상식인 오스카에서 최고 영예에 해당하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연말을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대부분 한국어로 이루어진 방탄소년단의 노래 '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이 미국 대중음악 차트 빌보드 1위에 올랐다. 방탄소년단은 내년에 있을 그래미 어워즈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타임' 올해의 연예인에도 선정됐다. 전 세계가 단절된 팬데믹 시대, 한국어는 그 어느 때보다 세계와 연결됐다.


방탄소년단의 월드투어 콘서트 현장은 한국어 떼창으로 가득하다. 방탄소년단이 해냈다. 방탄소년단을 보고 자란 젊은 세대의 시대가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다.


*본 글은 조경철 <나만의 한국사> 책 일부를 토대로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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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 연재되는 글은 35년간 역사를 공부하고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자 '명협 조경철'이 쓰고, 영화 에디터(기자) 출신 편집자가 사려 깊고 현대적인 시선을 담아 재편집, 업로드합니다. 


* 필진 소개


_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연세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2013년 한국연구재단에서 조사한 인용지수 한국사 분야에서 2위를 했다. '나라이름역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자 노력 중이다.  


_편집자 부

대학에서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전공했으며, 매체에서 영화 기자로 근무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쉽고 흥미롭게 편집해 업로드할 예정이다. 트위터 '한국의 맛과 멋' 계정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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