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지금 여기'의 의미는 실상계(생각의 바탕)가 생각의 영역에 연상되든 말든, 그것에 대한 정보를 알든 모르든 언제 어디서나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상계에 대한 이해가 관념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만 작용하는 것은 그냥 단순한 알음알이(이해, 지식, 정보)일 뿐이다. 그러한 앎의 여부와 관계없이 언제 어디에서든 작용하기 때문에 '실상'이고, '진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실상계에 대한 확연한 이해가 실제 경험(체득)을 통해 각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힘'이 생긴다. '실상계'는 생각이 닿지 않는 영역을 개념화한 것이다. 애초에 생각과 무관한 영역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실상계(= 무아, 무념)를 생각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섞으려는 시도 자체가 모순이다. 생각으로 닿을 수 없다고 정의해 놓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생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길을 아는 것(이해)과 길을 걷는 것(경험)은 다르다. 내 경우 그동안 길을 아는 것에만 치중했던 것 같다. 수영하러 수영장에 왔는데, 준비운동만 하고 있던 격이다. 비빌 언덕 하나 없는 허공의 길에 발을 디뎌야 한다. 이것은 생각이 하는 방식을 역행한다. 노력과 애씀을 통해 실상에 도달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노력과 애씀에서 놓여짐으로써 본래 늘 있던 그것이 되는 것이다. 생각과 생각사이의 틈을 알게 되고 '저절로'에 놓여지는 것이다. '저절로'에 놓여져도 아무 문제 없음을 생각으로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각인), 이것이 경험이고 체득이다.
나에게 '지금 여기'라는 키워드는 실상계에 대한 관념적 이해를 경험의 영역으로 불러오는 마중물이다. 실상계는 시공간이라는 관념적 제한과 무관하므로 '지금 여기' 뿐이다. '지금 여기'를 찾는 것은 생각의 내용에 빠져있기(속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라는 말에는 '언제 어디서든'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지나간 과거 어딘가에서 놓쳐서 사라진 것도 아니고, 다가올 미래에 노력과 애씀의 결과로 증득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는 생각의 내용이 전부라고 착각하는 순간에도, 그것에서 지금 막 놓여진 순간에도, 언제 어디서나 실상계에 속해 있음을 환기시켜주는 언어적 표현이다.
생각, 사고기능이 표현할 수 있는 실상계의 속성은 '저절로'와 '안도'이다. 생각이 놓여진 후 간접 체험되는 실상계는 생각에게 있어 '저절로' 펼쳐지는 연기적 현상으로만 인식될 뿐이다. 실상계에서 나툰 연기적 현상에 해석을 붙인 것이 생각의 태생이며, 괴로움은 그러한 해석(생각의 내용)이 삶(세계)의 전부라는 착각, 내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착각이 불안, 긴장, 두려움을 일으키고, 착각이 물러남으로써 불안, 긴장, 두려움도 함께 사라진다. '안도'는 새롭게 증득되어 추가된 뭔가가 아닌 불안, 긴장, 두려움이 물러난 실상계 본연의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2023년 1월 15일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