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주나이다 / 비룡소
공부가 일종의 모험이라면,
소피는 매일 모험을 하고 있다.
7살 소피와 꾸준히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한글 자음과 모음을 꾸준히 읽고 쓰게 한 덕분에 간신히 자모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 진짜 글씨를 읽을 때가 되었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월요일이면 빨간 반짝이펜으로 공책에 줄을 긋는다.
평범한 모눈종이 공책으로 10칸짜리 국어 공책을 만든다.
그리고 최대한 반듯하게 동시를 쓴다.
요즘 나는 이렇게 공부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한 글자씩 읽어 보는 거야."
"나는 글자 읽을 줄 모르는데?"
동시에 '사과'라는 단어가 나오면, 나는 이 글자를 음소, 그러니까 자음과 모음을 하나씩 읽게 하고,
그것이 모아져 만들어진 음절, 즉 글자를 읽게 시키고 있다.
이런 식이다.
"시옷, 아, 사. 기역, 오, 아, 과. 사과."
이것이 소피에게는 대단한 스트레스인 모양이다.
처음에는 어려워서 하기 싫다고 울다가, 그것이 통하지 않으니, 다른 울 핑계를 만들어낸다.
한글 공부를 하는 시간에만 소피는 유달리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이집에서 친구가 괴롭혔던 기억도 나고, 엄마가 억울하게 혼냈던 기억도 난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날도 많다. 그때마다 나는 달래주지만, 공부를 그만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 슬프면 좀 울어. 힘들면 좀 쉬었다 해. 그래도 오늘 안에는 이걸 다 해야 해."
내가 너무 매정한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도 많다.
그러고 보니, 한글 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지 않은 날이 더 많아진 것 같다.
하루 정도는, 한글 공부로 닦달하지 않는 하루를 아이에게 주고 싶다.
한글을 전혀 읽지 못해도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소년은 집을 나와 뚜벅뚜벅 걷는다.
먼 길을 떠나는 아이답게 발걸음은 야무지다.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 길은 복잡한 미로다.
미로 속에는 나무도 있고, 엄마 손을 잡은 아기도 있다.
소년은 기차처럼 보이는 건물을 지나기도 하고, 커다란 나무 사이사이를 지나기도 한다.
소년은 책의 딱 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춘다.
소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모든 내용이 신비로운 미로, 혹은 길로 되어 있는 글이 없는 그림책이다.
색감이 아름답고 상상력이 뛰어나서 대단히 좋아하는 그림책이지만,
정작 수업에서는 그다지 활용하지 않는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낼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아이가 혼자, 혹은 여럿이 모여서 미로 찾기를 할 때 가장 흥미롭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완전히 다른 몽환적인 세계가 펼쳐지고,
그 안에 숨은 누군가를 찾아낼 때 대단히 짜릿하다.
한글을 하나도 읽을 줄 모르더라도 소통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뒤집는다. 뒤표지에는 길을 막 떠나려고 하는 소녀가 보인다.
그대로 거꾸로 페이지를 넘기면
이번에는 소년이 아닌, 소녀의 여정이 펼쳐진다.
소년과 마찬가지로 미로를 빠져나가는 모험이지만,
한편으로 소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을 여행한 소녀.
두 사람은 또 한 번 만나게 된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던가.
나의 사랑스러운 소피는 기역과 모음 아 자를 모아놓고도, 그것이 가라고 발음되는 글자인 줄 아직 모른다.
요즘 유행하는 키워드인, 문해력이라는 것이 아예 생성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도 상관없다.
비록 내가 억지로 시키는 거긴 하지만,
말 그대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고 있지만,
매일 꾸준히 연습하고 있으니까.
오늘의 그림책 [길]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처럼,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