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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옥수수 Jun 21. 2023

아카시아 나뭇가지 엮어

아카시아 파마 / 이춘희 저 / 사파리 / 2006 

"엄마. 나 파마하면 어떨까?"

"파마라고? 글쎄."


조만간 아이 머리를 짧게 자를 계획이었다. 

소피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넌 아직 7살이잖아. 7살은 파마를 하기에 너무 어린 것 같아."

"하지만 우리 반에 내 친구는 파마했는걸?"

"저, 정말?"

"진짜야. 그러니까 나도 해도 돼. 그렇지?"


그래도 독한 약품을 머리에 뒤집어쓰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가 아닐까?

나는 선뜻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면 이번 쉬는 날에 미용실에 같이 가자. 원장님이 파마를 해도 된다고 하면."

"그러면 해 줄 거야?"

"그래. 일단 물어보고 나서."


그렇게 그날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되지요, 당연히."

"당연히 되는 거였나요?"


소피는 신이 나 손을 번쩍 들어 만세 했고, 나는 허탈하게 대답했다.


"7살이지만 두피에 직접 닿지 않는 부분만 파마하면 괜찮아요. 오히려 머리 묶기에도 편하죠."


그렇게 소피는 인생 첫 파마를 하게 되었다. 

미용실 의자에 야무지게 혼자 올라가 앉았다. 


우리 엄마랑 비슷한 나이처럼 보이는 원장은 아이를 차근차근 이끌었다.


"자, 이쪽으로 오렴. 머리부터 감아야 한단다."


소피는 또 냉큼 의자에서 내려가 원장을 따라 샴푸실에 누웠다.

평소에 씻을 때에는 물이 조금만 뜨겁거나 차가우면 난리가 나는 소피였으면서,

그날은 샴푸가 끝나자 곧장 내게 다가와 동그래진 눈을 보여주었다.


"엄마. 신기해요."

"그래, 정말 신기하구나. 그런데 뭐가?"

"머리를 감은 물이 뜨거웠는데요. 뜨겁지가 않았어요!"


물이 뜨거웠지만 참을만하고, 기분이 좋았다는 뜻이었다.



그림책 [아카시아 파마]에 나오는 영남이는 작은 눈, 납작한 코, 주근깨가 가득한 볼을 가진 여자아이다. 

자신이 '못생겼다'라고 생각하는 영남은 예뻐지고 싶어 엄마 몰래 얼굴에 분을 발라 보기도 하고,

입술에 루주도 발라 보고,

머리도 묶어 보고, 머리핀도 꽂아 본다. 


엄마의 파마머리처럼 둥글게 말린 머리를 해 보고 싶어, 

젓가락을 달궈 앞머리를 살살 말아 올려 본다.


그러다 되려 애꿎은 머리카락만 타 버려 울상을 짓는다. 


그때 친구 미희가 영남이를 데리고 아카시아 숲으로 간다.


미희와 영남이는 미용사와 미용실에 온 손님인 척 연기하며,

아카시아 잎사귀를 모두 따 낸 줄기로 머리카락을 동글동글 말아준다. 


"손님. 가만히 있어요. 자꾸 손대면 안 돼요."

"따가워요. 살살해 주세요."


파마가 다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영남이 마음은 온통 머리에 가 있다.


"언니. 아직 멀었어요?"

"손님. 조금만 더 참아요."


미희가 아카시아 잎을 톡톡 튕기며 말한다.


"딱 한 개만 미리 풀어보면 안 돼요?"

"뽀글뽀글 예쁜 머리 만들어야죠. 조금만 더 기다려요."


이윽고 머리에 꽂은 아카시아 줄기를 하나씩 풀어내자 영남이의 머리가 꼬불꼬불 파마머리가 되었다. 


1930년대에는 미용실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파마 값은 금가락지 한 개 값이었지만,

자기 보호와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와, 또 신여성들로 인해

미장원은 점차 많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어린 영남이에게 미용실에서 파마를 한다는 건 그림의 떡이었을 게 틀림없다.

엄마가 혼수로 들고 온 금가락지를 몰래 가져다 팔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고 싶었던 영남이를 위해

미희는 아카시아 파마를 예쁘게 말아 주었다. 



왜 하필 아카시아였을까?


아카시아의 잎 줄기는 길고 질겨서 머리를 말면 잘 풀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잎을 하나씩 따면서 


"그 애가 날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잎사귀 점을 치기도 하고,


아카시아 꽃을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별다른 놀잇감이 없던 시절, 아카시아는 아이들의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소피는 원장이 자기 머리를 꼬불꼬불 말아주는 동안 꼼짝도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 말아진 머리를 비닐 같은 것으로 감싸고, 그 위에 또 무언가 기계를 씌웠다.


머리를 말았던 롤을 모두 풀고, 다시 한번 머리를 감아줄 때까지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렸는데도,

소피는 잠시도 칭얼거리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미희와 미용실 놀이를 하면서, 미용실 언니에게 말하듯


"아직 멀었어요? 딱 한 개만 미리 풀어보면 안 돼요?"


하고 묻는 영남이의 마음은,


미용실 의자 앞에서 인형을 끌어안고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던 소피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 같다. 


그것은 새로운 내 모습에 대한 행복한 기대, 간질간질한 설렘이었을 것 같다. 




[아카시아 파마]는 스마트폰도, 텔레비전도 없고 순수하고 해맑던 시절의 옛 아이들의 정다운 모습을 그린 이야기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아카시아 나무를 이제 흔하게 만날 수 없지만,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핀 어느 숲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면,


줄기를 따다가 아이와, 엄마, 할머니가 서로 사이좋게 아카시아 파마를 해 주면 너무 즐거울 것 같다. 


향긋한 꿀내음이 풍기는 아카시아 아래에서 서로의 머리를 만져주며 함께 정다운 말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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