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이야기나 쓰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이야기라고 정하자마자 너무 막연해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막막함은 어디에서 올까, 하고 생각했다. 막막함이란 어떤 감정일까. 네이버 사전에 ‘막막함’을 검색해 보았다. 막막함, 즉 ‘막막하다’의 사전적 의미로 세 가지가 나왔다.
1. 쓸쓸하고 고요하다.
2.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답답하다.
3. 꽉 막힌 듯이 답답하다.
유의어로는 고요하다, 답답하다, 쓸쓸하다는 단어가 있다고, 네이버 사전이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느낀 감정은 1번, 2번, 3번 중 어디에 가까울까. 사실은 막막함이 아닌, 고요함이나 답답함, 쓸쓸함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은 아닐까. 모두 비슷한 단어이니, 나 스스로 헷갈렸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지금 고요한 상태에 있다. 하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쓸쓸하다는 건 외롭고 적적하다는 것인데, 그런 상태에 있지 않다. 그저 고요하다. 외로우려면 지금 당장 누구라도 만나 풀고 싶은 그리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누구를 만나고 싶을 정도로 외롭지도, 쓸쓸하지 않다. 그렇다면 막막한 나는 적어도 1번의 상태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번처럼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답답한 상태일까? 하얗고 빈 공간을 열고 무언가 쓰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작가는 외로워진다. 누구도 내가 원하는 글을 대신 써줄 수 없다. 심지어 AI조차 마찬가지다. 물론 AI에게 ‘아무 이야기나 써 줘’라고 부탁한다면, AI는 정말 무언가 이야기를 생성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아무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쓰는 나의 ‘아무 이야기’에는 내가 담겨 있다. 내가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이루지 못한 소원, 차마 해소하지 못하고 마음 한쪽에 끈적하게 담아둔 은밀한 욕망과 발설하는 순간 사회에서 매장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취향,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날 정도로 너무 싫지만, 동시에 머릿속에서 계속 떠나지 않는 유치하고 징그러운 것들. 그런 것들이 내가 쓰는 이야기에는 들어 있다. 아직은 AI가 그대로 복제하지 못한 나라는 사람의 흔적이다.
그것은 나의 지문과 같은 것이다. 맨손으로 물건을 만지면 지문이 남는다. 지문 중에 가장 예쁘고 특별한 지문, 평범한 지문, 비루하고 못생긴 지문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모두가 다를 뿐이다. 물건을 만지면 자연스럽게 찍혀버리는 지문을 가지고 우리는 지문의 주인에 대해 아주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내가 쓰는 ‘아무 이야기’에도 지문 같은 것이 수도 없이 묻게 된다. 그것을 개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람의 개성은 지문과 같아서,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저마다 다를 뿐이다. 각자가 쓰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다른 개성이 저마다의 이야기에 남아 있다. 가짜로 꾸며 내어 만든 이야기라 할지라도, 읽다 보면 저절로 그 안에 드러난 작가의 개성이 무엇인지 찾아 내려 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혼자서 상상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쓴 작가는 아마 이런 사람일 것 같아.”
물론 틀릴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이야기 너머에 존재하는 작가의 개성에 대해 유추하고, 제멋대로 상상해 보면 재미있다. 나 혼자서 작가에 대해 잘 알게 된 것 같아 내적 친밀감도 강해진다. 일방적으로 친해졌다고 느끼는 작가가 만든 책에 호감도 가지게 된다.
누군가 내가 쓰고 있는 ‘아무 이야기’를 읽고 나에 대해서 궁금함을 가지기도 할까? 나는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 당장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일단 상상한다. 내 글을 읽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당신을 상상한다.
당신은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만의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한다. 읽을거리를 찾다, 우연히 내 글을 읽고 당신은 무심코 혼잣말한다.
“이 사람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쓴 다른 글들을 찾아보지만, 그다지 많지 않다. 결국 당신은 호기심을 푸는 것을 포기하고 모양이 튤립처럼 예쁘게 벌어진 커피잔에 원두커피를 내려 먹는다. 그러다 당신의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당신은 똑같은 잔을 꺼내서, 똑같은 커피를 다시 내린다. 그리고 벗에게 나와 내가 쓴 이야기에 대해, 그것을 읽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해준다. 벗은 10분 넘게 일방적으로 혼자 얘기하고 있는 당신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대체 무슨 이야기인데? 나도 보여줘 봐.”
“그럴 정도는 아닌데, 정 원하면 너도 한 번 읽어 봐.”
벗은 호기심이 동해 내 이야기를 읽어 보지만 5분도 되지 않아서 덮어 버린다. 지루해하는 표정이다. 벗은 자신이 새로 산 가방에 대한 것으로 화제를 돌린다. 당신은 벗이 자기 자랑을 시작하자, 아까 전 벗이 그랬던 것처럼 지루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배려심을 발휘해서 관심을 보여준다. 그 사이 내가 쓴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의 화제에서 완전히 잊힌다. 이렇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내 이야기를 읽었다면 당신은 이미 나의 독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