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적인(Kafkaesque)

클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

by 포레

카프카적인(Kafkaesque)'이라는 형용사는 프란츠 카프카의 이름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단어는 '부조리하며 암울한'이라는 뜻이며, 카프카의 소설에 묘사된 것과 유사한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카프카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Google)


독일어사전에도 실린 '카프카적(Kafkaesk)' 은 전율, 불안, 소외, 좌절 등의 표현에 표어로 쓰인다고 한다. 이 뜻은 불투명하고 무의미한 운명이나 죄나 권력기구 등의 위협에 직면한 인간의 무기력함을 떠올리게 한다. 카프카 문학에서 받은 인상을 착안하여 표현된 것이다. (박병화, 카프카, 건국대출판부, 1995)





카프카는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던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로 시작되었다고 짐작된다. 그당시 나는 하루키 열풍에 따라 서점에 깔린 하루키의 소설들을 흡입했던 시절이다. 뭘 읽어야 할지 계보 없이 잡히는 대로 읽던 '읽기 시절'이다. 카프카가 갑충으로 변한다는 '변신'의 작가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하루키의 연결고리였다. 하루키가 써준 제목 '해변의 카프카'의 덕분이다.



그로테스크 적이라는 말을, 음울하고 우울한 느낌을 가진 카프카가 싫지 않았다. 실패를 맛보고 세상의 바닥을 직면했던 시절이었고, 가지고 있는 것이 다 털려버린 20대를 맞이한 것 같아서 허기져 있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읽어버린 나의 그 시간에 '카프카'라는 단어가 서 있다. 하루키는 그 단어를 주인공의 이름으로 설정했다. 그리곤 나에게 단어만 던져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로 다가왔다.



어찌 보면 하루키는 내게 '카프카'를 알려준 소설가 일수 있겠다. 왜곡된 기억이지만.


하루 종일 카프카가 남겼던 미완성 소설들, 단편들을 읽으며 다시 허기가 진다. '카프카적인' 이라는 말의 의미가 소설로서 걸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하기도 어지럽기도 했다. 아마도 오랜만에 비가 와서 추적추적 그 마음이 나에게서 소설로 소설에서 나에게로 전이되고 있었다.



<단식 광대>를 읽으며 말라가는 카프카의 허기를 떠올린다. 그는 늘 문학의 허기와 마음속 부재를 느꼈기에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나 보다. 단식 광대가 말했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라는 그의 단식의 이유가 정당하게 느껴진다. 카프카의 예술의 발자취가 살짝 그림자처럼 스친다.


뼈 마른 광대의 모습이 마냥 슬퍼 보이지만은 않는다.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가 말라죽어가는 선택이 진정한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카프카의 소설들을 읽다가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을 듣는다. 이 곡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사랑의 기쁨'과 짝꿍곡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민요를 바탕으로 한 왈츠곡이고, 감미롭고 아름답지만 사랑의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 속삭인다.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 음반을 발매한 선우예권의 피아노 버전을 듣다가 권혁주 씨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어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소식을 언뜻 접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음악은 영상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들으면 코 끝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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