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쇼팽외

by 포레

29도를 넘어가는 더운 여름밤이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 혹시나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2007년 12월 호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갔던 여행길의 바람이 기다려진다. 햇볕은 따가왔지만 마른 더위로 그늘로 가면 시원했던 바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과 호주의 두 나라 날씨 온도차는 비슷했지만 우리나라의 여름은 장마가 오고 끈적거리고 습도가 높다. 그에 반해 호주의 날씨는 더워도 끈적거림이 덜해서 생활함에 있어 불쾌지수가 덜하다.


바람을 기다리다가 토요일이니 한가하게 밀려있는 집안일을 했다. 늦잠을 자고 싶지만 몸의 알람은 6시에 맞춰있고, 깨어나면 더 자지 않기에 몸을 하나둘 깨운다는 마음으로 미뤄두던 일들을 살며시 시작한다. 더워지기 전에 뜨거운 물을 끓여 숙주나물을 데친다. 숙주나물은 아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야채 반찬이다. 금방 만들어서 바로 먹어야 하는 상하기 쉬운 반찬이다. 그래도 고기만 먹일 순 없기에 생각날 때마다 사서 해주곤 한다. 미자네 상호이름의 꽃게 액젓을 술술 뿌려가며 통깨 뿌려 내놓으면 예민한 아이도 잘 먹어주곤 했다. 마늘도 파도 넣지 않는다. 그나마 요즘은 통 입맛 없어해서 먹어주는 효과가 좀 덜하지만.


그러고 나서 나를 위해 탄산수에 사과식초를 넣어서 한잔 마신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기도 하고, 기운이 없어서 요 며칠 학교 다녀오고 나면 씻고 누워서 아이 들어오는 것도 지켜보기 어려울 정도다. 고기를 많이 먹지도 않아서 계란이나 콩물로 단백질을 꼭 먹어두려고 하는데 이젠 그마저도 소화가 안된다. 소화가 안돼서 불편할 때 애용하는 사과 식초 한 잔을 마셔주면 나쁘지 않게 생활할 수 있다. 오미자도 레몬주스에서도 느낄 수 없는 묘한 마성의 맛이다.


집안일을 몰아서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시간의 관성을 뛰어넘어 효용의 극대화를 누릴까 고민하게 된다. 여름 침구를 빨아두며 건조기에 의지하는 일. 동네 앞 향 좋은 커피를 사러 가기 위해 로봇청소기를 돌려놓는 일. 글 한 줄을 쓰려고 식기세척기의 도움을 받는 일. 전전긍긍하게 시간에 끌려다니기 싫다는 의식의 표현 같은 행위일까. 집안일하는 것인데 뭐 그리 거창한 계획이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금쪽같은 시간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효율을 찾는 일은 아주아주 중요한 것이다. 나만 그런가.


새벽에 독서실에서 들어와 피곤에 젖어있는 잠든 아이를 깨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일찍 자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해서 예민해져 있는 아이의 심경을 건드리는 일은 못할 짓이다. 노력이 아니라 '노오력'을 해도 극강의 입시를 견뎌야 할 텐데. 출발점에 서 있는 아이가 혹시 지칠까 봐 노심초사다.

오늘은 아침에 가야 할 스케줄이 없지만 해야 할 숙제들과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 준비에 아이의 시계는 끊임없이 돌아간다. 토요일 아침 흔들어서 아이를 깨우고 고기를 구워서 무친 숙주나물을 곁들어서 아침을 차린다. 그래도 먹어라도 주니 감사한 일인가.


아이가 친구와 버스를 놓쳐서 아이를 학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서 아이는 쉴 새 없이 자신의 한탄 섞인 고등학생생활을 토로하고, 나는 마음을 맞춰주기 위해 세븐틴 CD를 틀어본다. 약 10분도 안되는 라이딩 시간에 눈이라도 붙였으면 쉽지만, 아이는 그마저도 에너지를 내게 쏟아내고 내린다. 아이를 학원가 근처에 내려주고 차를 돌리니 마주에서도 오던 차의 한 아이가 'ㅇㅇㅇ'야 라고 아이를 부른다. 학원 근처에서 서로를 만나 동병상련으로 애틋한 마음을 갖는 아이들. 이런 일상이 습성화 돼버린 아이들의 귀중한 시간은 누가 보상을 해주는 가.


사과식초를 마시는 걸로 충분치 않아 커피와 와플을 사러 잠시 슬리퍼 차림에 아파트를 내려온다.

노트북과 책 한 권, 스마트폰과 버즈를 갈색 가죽이 잡힌 보부상 가방에 넣는다. 이 가방에 물건들은 거의 바뀌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밖에 다녀오고 집에 들어와도 보부상 안에 노트북과 무선마우스, 어댑터와 충전기 일체들을 고스란히 넣어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또 깜박하고 나서야 하니까.

보부상 가방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세팅하고 에어컨이 틀어져있는 카페에 들어온다.


아파트 안 카페와 도서관은 취향 저격이라 자주 시설을 이용하지만 키오스크로 주문이 바뀌면서 메뉴가 더욱 다양해져서 사람들이 정말 많이 늘었다. 뇌피셜이겠지만 대선 이후로 길거리에 카페와 식당에 차와 사람들이 많아졌다. 기대감을 갖는 심리가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라던데 그 말을 피부로 느낀다. 나도 밖에 나가서 메밀국수를 하나 사 먹으러 나가고 싶다. 집 앞 사누키 음식점이 꽤 괜찮던데.


오후엔 운동을 한다. 얼마 만에 짐에서 운동을 시작하는지 ㅠㅠ. 운동화 끈을 묶고 스트레칭을 하는데 괜스레 눈이 시큰하다. 몸이 무너져 내려서 속상하다 못해 울고만 싶었던 날들도 지나고 지금은 따끔따끔 거리기만 하니 일상으로 돌아오는 중이니 나쁘지 않은 것이겠지. 자전거 20분을 휘이 돌린다. 허벅지가 살짝 묵직하다. 스커트를 하고 싶어도 구부러지지 않는 발목 상태에 좌절도 했지만 이제 그만해도 될만치 스쿼트 자세가 나아지는 중이다. 매트에 의지해 발목을 돌려서 상태를 확인한다. 아직도 내려가는 건 왼쪽 바를 잡아야 할 만큼 심리상태의 흔적은 남아있다. 내려가는 계단의 무서움이 남아있다.


운동 후에 샤워를 하고 주방에서 작은 선풍기를 틀어 선풍기 머리를 내 허리 쪽으로 돌린다. 월남쌈을 준비하기 위해 씻고 다듬어야 할 야채들을 꺼낸다. 가장 손쉽게 야채를 먹을 수 있는 여름 별미 메뉴다. 아이가 언제나 선호해 주는 음식이라서 거부감이 없다. 식단도 아이에 맞춘다는 현실이 지금으로서는 아쉽기만 하지만, 아이가 제일로 힘드니깐 의식의 시계를 아이에게 맞추기로 한다. 그래도 몰래 떡볶이와 순대를 사 먹는 일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나면, 어두운 반 조명에 가려진 음악의 선율들이 마음을 충전한다. 음악이 없었다면 새로이 충전하고 다음날을 기다릴 수 있을까. 선우예권 피아니스트가 시골집 앞마당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하는 동영상이 남아 있다. 여름날이 되면 꼭 한 번씩 재생하는 영상인데, 여름밤을 즐기는데 제격이다. 오늘은 퍼펙트 데이즈.


쇼팽 - 녹턴 9의 2번 / 모차르트 - 피아노 소나타 16번의 2악장 / 리스트 - 사랑의 꿈 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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