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다. 이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사람을 보거나 상황에 닥치면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이렇게 말했을 때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누군가는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꿈은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마구 떠올랐던 나의 상상들은 어느새 현실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가끔 엉뚱한 꿈이 상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목표로 바뀌었다.
숭례문학당에서 하는 독서토론 입문반을 처음으로 들으러 갔을 때다. 집에서 육아하고 남는 시간은 게임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던 나는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나마 그때쯤 아이 때문에 육아서나 영어 그림책 정도 읽어주는 것을 시작했던 것이 전부. 그런 내가 독서도 아니고 독서토론이라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데다가 나와는 진짜 어울리지 않는 분야라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던 때가 생생하다. 학당 안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코로나가 아직 세상에 상륙하기 직전의 겨울이었다. 내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신청한 탓에 모든 테이블이 꽉 차 있었고 나의 자리는 강사님의 바로 옆 자리였다.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테이크 아웃한 커피와 책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 앉았다.
살짝 긴장된 상태로 주변을 둘러봤다. 강사님은 자신에 넘친 모습으로 물 흐르듯 토론진행을 이어나가셨다. 그 순간 그게 왜 그렇게 멋있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이런 세상이 있다니! 지금껏 독서라고는 담쌓고 있던 나였는데 말이다. 강사님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살포시 겹쳐 보았다. 나도 독서토론을 진행하고 싶어. 나도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강사가 되고 싶어. 어떻게 강사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런 행복한 상상을 했다. 꿈꾸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이미 머릿속에서 나는 독서토론 강사가 되어 사람들을 상대로 토론을 멋지게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독서토론 첫날에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오프로 진행되던 모임은 코로나로 인해 마지막까지 가지 못했다. 이어서 상급 과정을 듣고 싶었다는 의지도 사그라드는 듯했다. 학당의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면서도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학당의 문을 두드린 것은 1년 만에 온라인 과정이 개설되고 난 뒤였다. 비슷한 목표를 가지신 분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나의 상상이 얼마나 허황된 건지 깨달았다. 이렇게 책에 대해 잘 알고 내공이 많으신 사람들이 있다니. 나는 좀 더 읽고 쓰면서 성장하고 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리더 과정을 수료한 이후 심화 과정으로 가는 동기분들을 보며 '전 다음 기수에 도전할게요'를 속삭였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그 1년 사이에 나에게 많은 일들이 생겼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힘든 일이 있었던 2022년 상반기였다. 나와 함께 하겠다던 사람은 어느새 내 곁을 다 떠나갔다. 내가 좀 더 잘했어야 했던 걸까? 죄책감과 후회스러움으로 출판사 등록증을 손에 쥐고서 허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던 그때였다. 다시 독서토론이 생각났다. 이번엔 강사가 되겠다는 목적은 없었다. 뭔가 도전하지 않고선 내가 무너져버릴 것 같았던 시기였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도전 하자. 복잡한 책을 읽고 논제를 만들다 보면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다시 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 그건 바로 책일 거라고.
두 달간의 심화과정 속에서 미친 듯이 책을 읽으며 수업에 참여했다. 날카로운 피드백 속에서 상처를 받고 속상한 마음에 이불속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의 상상은 현실이 되지 못해.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던 그때. 하지만 성장은 고통을 동반한다고 하지 않던가. 지나고 보니 그 시간들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겠다.
심화과정의 마지막 수업날, 실습을 위해 그동안 코로나로 진행됐던 온라인 수업을 오프로 했던 첫날이었다. 다시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선생님이 앉았던 그 자리에 내가 앉았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너무 떨리고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이 수업이 끝난다고 해서 강사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2020년 1월 10일에 첫 학당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가 생각났다. 2년 하고도 10개월이 지나 나 여기에 다시 왔구나.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수업과 진행 실습을 마쳤다. 강사의 타이틀은 아직이었지만 막상 자리에 앉으니 정식 강사로 앉아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잠시나마 이 자리에서 직접 토론을 진행해 봤다는 경험. 그 경험은 다시 나를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 보자. 진짜 숭례문 학당 강사로 그 자리에 다시 서보자 상상했다.
그리고 11개월 뒤, 나는 숭례문학당의 책통아 교사로 독서토론 진행을 맡게 되었다. 아이들을 앞에 두고서 첫 독서토론을 진행하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선생님'이라 불리던 그 말은 차갑게 식어있던 나의 열정을 불타오르게 만들어 주었다. 책으로 통하는 이 경험, 나는 이걸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었구나!라는 생각. 2020년 1월 15일에 했던 그때의 상상은 3년이 지나서야 현실이 되었다.
이제 막 시작한 햇병아리 독서토론 강사다. 앞으로 내가 마주해야 할 많은 토론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방황하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해 주었던 독서토론. 토론에 대한 열정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