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면접을 본 적이 있다. 국내 증권사 리서치였는데, 어렸을 때 해외에서 살다 온 적이 있냐고, 어떻게 그렇게 외국계 회사에서 섹터를 옮겨가면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는지 물었다. 나의 해외경험은 대학교 5개월여간의 교환학생 경험이 전부라고, 좋은 사수들을 만났고 초반에 잘 배웠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내 경험상 한국의 외국계 회사에서는 네이티브 정도의 영어실력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요구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직급이 올라가거나, 상황에 따라서 요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무엇보다 외국계 회사가 서울에 오피스를 두는 이유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뽑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Local strength라고 이야기를 하는, 그 지역에 강점에 있는 사람을 뽑아서 부가적인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서 2021년에 한국에서 있었던 사이즈가 컸던 IPO들을 생각해 보자. 그중에서는 아시아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게임회사의 상장도 있었다. 당연히 외국계회사들도 이 딜에 참여를 하고 싶다. 하지만 기존부터 축적된 관계와 서비스 없이는 딜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국계 증권회사라는 명함만으로 딜을 받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적어도 2년은 넘게 온갖 공을 들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 업종에서 딜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굳이 영어를 네이티브 처럼 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내가 근무했던 외국계 회사의 부대표는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글로벌로 보내는 이메일을 밑의 직원들이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국내에서 가장 딜을 많이 하는 대기업과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계열사의 모든 딜을 수주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영어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나의 경우, ABN AMRO에서 면접을 볼 당시에 영어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한국인 애널리스트밑에 배치가 되었고, 그 분과 영어로 일할 일은 많이 없었다. RA의 특성상, 많은 대화는 애널리스트 그리고 내부 세일즈들과 하게 되었는데, 다 한국말로 일했다. 물론 리서치, 차트 만들기, 엑셀 모델 그리고 간단한 라이팅은 영어로 했지만, 그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픈된 공간에서 일을 해서, 애널리스트들의 콜이 간간이 들리곤 했는데, 네이티브이신 분의 영어가 정말 너무 고급져서 부럽기도 했고, 들으면서 많이 배웠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아침의 모닝미팅에서도 듣는 법과 말하는 법을 배웠다. 7-8명 정도 여자 애널리스트분들과 그분들의 RA, 그리고 외국인 남자 헤드로 이루어진 ABN AMRO의 리서치의 분위기는 정말 너무나 좋았다. 장이 끝나면 간식을 사다 먹었고 (인턴은 간식배달담당 이어서 맛있는 빵을 배달하던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애널리스트 분들의 집들이에도 초대를 받아서 옆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정치도 없었고 (내가 어려서 몰랐을 수도 있다), 서로 사이도 너무 좋았다. 모든 리서치 하우스가 이럴 거다,라고 생각한 나는 (나의 생각은 틀렸었다) 외국계 증권사 주식 리서치 부서를 목표로 잡서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운이 좋게도 맥쿼리 증권의 전기전자 섹터 애널리스트 밑의 RA자리로 취업이 되었다. 운이 좋았던 이유는, 힘들기로 악명 높았던 보스가 밑의 직원들이 너무 많이 나가서, 아주 머리가 좋고 뛰어나기보다는 업계 초짜이고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그리고 곰 같은 여자 RA를 목표설정하고 뽑았는데, 내가 거기에 부합해서였었다. 그리고는 정말 매일매일이 헬게이트였다. 우선 첫째로, ABN AMRO와 분위기가 정말 달랐다. 예를 들어, 처음에 나는 소개하는 자리에서 세일즈 부서 헤드는 나를 보고 '얼마나 가나 한번 보자^^'라고 했었다. 두 번째로, 나의 직속 보스는 네이티브에다가 업계에서 천재로 불리는 워커홀릭 노총각이었다. 그는 한국말을 잘 못했고, 나의 모든 대화와 라이팅은 드디어 외국계답게 영어로 이루어졌는데, 업계 천재가 보기에는 내가 말도 안 되게 부족했다 (당연하다). Moron - Fool보다도 답답하고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사람 -이라는 말도 처음 알았고, 많이 들었다. 내가 쓴 글들은 처참한 빨간펜이 되어서 나에게 다시 돌아왔고, 내 라이팅을 봐주다가 짜증 난 보스가 이제 실수할 때마다 만원씩 내라고 해서 15만 원인가 돈을 뽑아서 직접 주기도 했다 (퇴근할 때 보스는 그 돈을 내 책상에 던지고 갔다). 나를 자르지 않은 이유는, 그 보스 밑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나가서 더 이상은 부하직원을 내보낼 수 없어서였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1년 정도 있다가 잘렸을 것 같다. 스피킹도 마찬가지로 부족해서, 홍콩오피스에 전화해서 보스가 쓸 자료를 주문해 달라는 전화도 얼마나 연습을 많이 하고 전화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RA라는 직업상, 애널리스트의 스케줄에 모든 것을 맞춰가면서 빨간펜을 덜 받기 위해서 정말 처절하게 노력했다.
Working hours는 정말 대단했다. RA는 매일 아침 모닝미팅을 준비해야 하고, 뉴스도 체크해야 해서 오전 7시 10분 전까지 갔다. 그리고 퇴근은 기약이 없었다. 그냥 애널리스트가 퇴근할 때까지, 혹은 보스가 퇴근을 하면서 주고 간 숙제를 하고 집에 갔다. 주어진 일이 없을 때는 보스가 쓴 리포트를 읽었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다른 애널리스트 분이 보스의 리포트를 읽고, 그 워딩을 외워서 리포트를 쓸 때 사용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효과가 있었다. 당시에 부천 집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나는 차라리 안 밀리는 밤 11시쯤에 퇴근하는 것을 선호했다. 주말도 하루는 꼭 나왔고, 일요일은 시체처럼 잠만 잤다.
그 시간을 나는 어찌어찌 견뎠던 것 같다. 우선 첫째, 당시 2008년 리만 사태가 터지면서 업계에 자리가 많이 없었다. 우선 자리를 버티고 있었어야 했고, 다시 대기업 취업을 알아보기에는 늦었었다. 둘째, 동기들은 없었지만 다른 RA선배들이 많이 도와줬다. 내 보스가 워낙 힘든 사람이라는 것이 유명하다 보니, 다들 나를 불쌍하게 여겨주고 신경 써주었다. 셋째, 어쨌든 그 사람 밑에서 많이 배웠다. 영어가 정말 비약적으로 늘 수밖에 없었다. 영어 모닝미팅은 매일 있었고, 내 뒤에 앉았던 보스는 매일 외국인 투자자와 콜을 했다. 결과적으로 비즈니스 영어 듣기를 매일 했다. 출장도 자주 가는 사람이라서 모든 이메일에는 내가 참조되어 있었고, 나는 이메일들을 끝까지 팔로업 해야 했다 (참고로 그는 영어로 말과 쓰기를 정말 잘했다). 스피킹은 전화영어를 시작하면서 보스에게 말을 할 때 조금씩 자신이 생겼고, RA 트레이닝 연수에서 만난 다른 나라 오피스 동료들과 친해지고 계속 연락하면서 늘었다 (대만계 일본계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대부분 전화로 보스가 어쩌고 저쩌고 그런 얘기를 많이 하면서 친해졌다).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라이팅은, 전기전자 섹터가 그나마 숫자와 기술이 글의 핵심이라는 것을 캐치하고는 실수 없이 쓸 수 있었다. 3년여 년간이 지나고 나서는 '일취월장'했다는 이야기와 그리고 원형탈모를 얻었다. 싱그러운 20대가 아니라 추레한 20대를 보낸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커리어를 이렇게까지 쌓아오지는 못했을 것 같다. 운에 대해서 많이들 얘기하는데, '운'이 좋았다고 믿는다. 우선 적어도 배울 수 있는 보스를 만났고 (원형탈모도 만났지만), 그 덕에 내 커리어의 시작을 닦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에만 신경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 싱글이었고, 주변 사람들도 엄청 열심히 일했다. 영어가 네이티브가 아니어도, 들어가서 노력한다면 외국계 회사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엄청나게 힘들지만, 3년 정도 투자한다면 본인의 영어능력이 성장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묻는다면, 글쎄 그 정도까지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