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무슨 언어야?”
계산 창구에서 코스코 직원이 물었다.
"한국어야."
"두 언어를 왔다갔다 하니 좋겠다."
남편에게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다가 계산 창구에선 바로 또 영어로 대답하는 나를 보며 코스코 직원이 말한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는 "집에서 쓰는 언어"와 "집 밖에서 쓰는 언어"가 다른 경우가 상당하다. 미국 인구 조사국 (US Census)에 의하면 한국어는 미국 가정에서 사용되는 영어 이외의 언어 탑 10 중 하나이다.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버지니아 주나 조지아 주 같은 곳에서는 1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다인종 국가 미국에 "공식 언어"는 없다. 물론 영어가 공용어(Lingua Franca)이지만 공식 문서에서도 스페인어를 함께 비치해두는 이유가 그러하다.
예전에 뉴질랜드에서 교환학생으로 수업을 들었을 때, 비교문학 수업 교수님이 "단일언어주의는 질병이다" ("Monolingualism is a disease")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한 언어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은 일종의 질병이라는 것!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아이를 키우며, 내가 세가지 언어를 할 수 있는 트라이링구얼(trilingual)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세가지 언어에 노출될 수 있으니 좋았을 텐데 말이다. 외고를 졸업했지만 그 당시 배웠던 일본어와 중국어는 기본도 없이 증발했다. 대학 시절엔 프랑스어에 푹 빠졌었다. 불문과 조교들이 "영문학 원서를 들고 다니는 불문과 학생"이라고 착각할 만큼, 불어와 불문학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사실 나는 영문학도였다). "순전히 재미로" 라틴어 수업을 듣기도 했다. 나는 한자가 기본인 언어보다는 로망스어가 더 재밌었다.
분명한 건, 언어에 매료되지 않은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나를 붙잡았던 것은, 늘, 언어의 힘이었다. 언어의 결과 그 세심함이 나에게 가장 울림이 컸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미술사를 선택했냐"고 물었을 때, 어이없게도 나의 첫 대답은 "늘 글을 쓰고 싶었다"였다. 창작이 두려워서, 픽션대신 비평을 쓰는 길을 에둘러 선택했다고 차마 말할 순 없었다. (예술도 늘 좋아하긴 했다). 그럼에도, 미술사를 하며 수많은 예술가와 비평가를 만나며 느낀 것이 있다. 나는 "보는 법"을 뒤늦게 훈련으로 대학원 박사 과정을 통해 터득하긴 하였으나, 기본적으론 시각적인 인간 (visual person)이라기보다 언어적 인간 (lingual person)에 가깝다. 내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시각이 아니라 글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하나 더 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더 생기는 것이다. 단순히 지금 내 세계가 넓혀지는 수준이 아니다. 아예 다른 세계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가장 자유롭게 서로 다른 세계를 유영할 수 있는 방법은 언어로 드나드는 것이다. 언어를 하나 더 하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차원도 다르지만,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의 폭도 훨씬 크다.
한국책이 상대적으로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꾸스의 동화책들은 대부분이 영어로 된 미국 동화책들이다. 집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이고 책으로 읽는 언어는 영어인 것이다. 꾸스가 돌이 되기까지는 한국어와 영어를 7:3 정도의 비율로 섞어 말했다. “사과”라고 하고 나면 바로 “애플”이라고 알려주는 식이었다. 이 아이는,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사물은 이름이 두 개씩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두 가지 언어에 노출되어 헷갈렸는지, 아이가 말이 느렸다. 두 돌이 지나면서부터야 아이의 말문이 텄다. 남자 아이들이 원래 좀 그렇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엄마”와 “마미” 사이를 오가며, 세 돌이 지난 지금, 아이는 영어 인풋이 오로지 나와 유투브라는 것 치고는 꽤 재미나게 영어로 말을 하려고 든다. 혼잣말로 중얼 중얼, 부족한 단어로, 용케 문장을 얼기 설기 만들어 낸다. 아마도, 배우지 않고도 언어를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기이다. 하나의 단어를 알려주면 그 다음날이면 써먹으려 들고 되든 안되는 문장에 끼워맞춰 보려 한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내가 트라이링구얼이었다면, 더 수월하게 너에게 제 3의 언어를 심어주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