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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루토 Aug 17. 2020

[매일 크는 엄마]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2017/8/28

2017년 8월 16일. 아침에 일어나자 침대가 흥건했다.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혹시 오줌일 수도 있나 하는 가당찮은 생각도 들었다. 당연 아니었다. 여성의 15퍼센트 정도만이 출산의 첫 징조로 양수가 터진다고 한다. 대개 진통이 먼저 오고 양수는 후에 터지거나 인공적으로 터뜨린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의 거리는 약 20미터. 다리 사이로 흐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양수라는 걸 직감했다. 엄마! 아래층에 있던 엄마를 불렀다. 머릿속이 하얬다. 엄마라는 그 이름. 그로부터 25시간 정도 후에 나도 엄마가 되었다.


아침에 병원에 갔더니 약하게 진통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아기는 이미 꽤 내려와 있었다. 이센티 열렸다고 했다. 남편은 하필 출장 중이었다. 양수가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장 빠른 필라델피아행 비행기를 끊었다. 병원에서는 남편이 오고 나서 입원을 해도 된다고 했다.

오후 너다섯시. 다시 병원에 갔다. 진통 간격을 재며 입원 수속을 마쳤다. 유펜 병원은 원체 규모도 크고 복잡해서 모든게 오래 걸렸다. 하루에 삼십명 이상의 아기들이 태어난다고 한다.

저녁 일곱시. 남편이 왔다. 혼이 나간 얼굴로, 장미 한 다발과 함께. 우리 엄마는 미국에서 내 동생을 출산했을 때 아빠가 꽃 한다발 안사온걸 여지껏 서운해하신다. 미국 여자들은 그때 다 꽃받더라, 하며. 자네는 그러지 말게, 아빠는 남편에게 당부했다. 그래서 애도 나오기 전에 공항에서 꽃부터 사들고 왔다는 거다. 이 때 남편을 목격한 우리 이웃들의 증언이 아주 재미나다. 공항에서 돌아오자마자 혼비백산의 얼굴을 한 채로, 아내의 양수가 터졌다, 병원에 입원했다, 두서없는 말만 되풀이했다는 것. 이웃들은 알았으니 어서 가보기나 하라고 했다고 (...)

밤 아홉시. 유도분만제를 맞았다. 진통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양수가 터진 이상, 스물네시간 내로 출산을 해야 아기가 안전하다. 나는 내내 정경화 정명훈의 G선상의 아리아를 틀어놓고 있었다. 왜인진 모르겠는데 그게 마음의 안정이 되었다. 중간 중간 레지던트들이 들어왔다가 울려퍼지는 첼로 소리에, 아직은 참을만한가보구만, 하고 웃으며 나갔다. 그 때만 해도 왜 저런 말을 하나, 나는 몰랐지 (...)

밤 열한시-열두시. 진통이 급격해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유도 분만이 진통이 더 심하다고 한다. 자연적인 진통에 인공적인 진통이 더해져서. 이건 뭐, 다 큰 성인이 남눈 하나도 신경 안쓰고 울부짖게 되는 고통이었다.진통 간격이 급격히 줄었다. 남편을 붙들고 당장 에피듀럴 (무통 주사) 놓는 사람을 불러달라고 엉엉 울며 소리 질렀다.

밤 열두시반. 에피듀럴 맞고 무통 천국 입성. 척추에 맞는 주사이고 이 주사만도 아프다고 하지만 진통에 비하면 그것따위 아무것도 아니지, 백대라도 놓아다오.

오전 7시. 17일 날이 밝았다. 십센티 다 열렸다고 한다.

오전 8시. 푸쉬 시작.

오전 11시 15분. 출산은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눈물과 미소가 걷잡을 수 없이 함께 나왔다. 겪어보지 않으면 말로 할 수 없다. 세상의 비밀을 한 조각 나눠먹은 기분이었다. 그전엔 없던 생명 하나가 그렇게 쑥, 태어났다. 내 가슴 속에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이 이렇게 크게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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