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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민 Feb 21. 2018

자존감이 사라지고 있다


 어느 순간 나의 이름 세 글자는 잊혀졌다. 이력서 이름칸 앞에서부터 머뭇거리다 소심하게 세 글자를 끄적여 보지만, 결국 나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경력이 단절된 지도 너무 오래됐을 뿐더러, 설령 일을 시작한다고 해도 아이의 하원 시간이 걸리거나 내 나이까지 자격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실정이다.


 이렇다 보니 나의 자존감은 어느 새 바닥과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른다. 집안일이라도 특출나게 잘 하면 모를까, 세 식구 밥이라도 안 굶기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사일은 버겁게만 느껴진다. 아이의 끼니를 조금 더 영양가 있게 챙기려는 노력만으로도 내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입이 짧은 아이 탓에 나의 한숨은 늘어만 간다.


 곧 있으면 아이의 방학이 다가온다. 남편이 퇴근하면 7시 30분이 훌쩍 넘는데, 그것도 칼같이 퇴근 했을 때의 일이다. 둘 다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루종일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데 도무지 할 게 없다. 당장 어린이집 하원 후에도 둘이서 머리채 붙잡고 안 싸우면 다행인지라 아이의 방학이 별로 달갑지 않다. 물론 선생님들도 휴식을 취해야 우리 아이를 조금 더 잘 보살펴 주실 수 있겠지만, 오롯이 혼자 아이와 부대껴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지난 해 제주도를 떠나면서 있던 차 두 대를 처분하고 새 차 한 대를 장만했다. 남편이 몇 주 전에 이직하면서 새 차는 출퇴근용으로 쓰이게 되었고, 차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던 나는 어차피 집이나 동네에서만 머물테니 상관 없었다. 그런데 요즘들어 차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아이의 방학은 거의 분기 별로 있고, 혹여 아이가 아파서 며칠 또는 몇 주 집에 데리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집에만 있기에는 아이와 내가 거의 미쳐버릴 노릇이다. 바깥에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아들내미의 활동적인 성향을 내가 충족시켜줘야 하는데, 날씨는 아직도 차디 찬 겨울이고, 찬 공기와 천적을 이루고 있는 아들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고. 매일이 전쟁터인 셈이다.


 아, 이럴 때 내가 돈이라도 벌었으면 경차 한 대 뽑아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들과 신나게 돌아다녔을텐데......


 그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밤에 잠도 잘 오지 않고, 무언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하루종일 일자리 사이트를 두리번 거려봐도 주어진 시간대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도 너무 없다. 설사 일을 구한다 해도 집과 지나치게 멀어서 지하철이 없는 곳에 사는 나에겐 그림의 떡이다.


 돈, 돈, 돈- 그 놈의 돈이 무엇인지, 나는 왜 이렇게 자괴감이 드는 애엄마가 되었는지, 어쩌다 이렇게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도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없이 우울해져서 커피를 마시다 엉엉 울어버렸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 더 나아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를 다스리는 요가를 거의 매일 집에서 하는데, 오늘따라 요가매트 마저도 아무 쓸모 없이 느껴졌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토록 평범한 내가 평온하지 못 한 마음가짐으로 과연 무엇을 해 나갈 수 있을까?


 일단 씻고 나가서 좀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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