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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민 Mar 15. 2018

인생에 취미 하나 쯤은 있어야죠


 거창하고도 격한 새해 맞이다. 벌써 3월 중순인데 아직도 새해 타령이다. 연초부터 마음 먹은 일을 벌여 놓으니 몸을 고달파도 마음만은 즐겁다.  


 지난 연말에 허리와 목을 심하게 다치고 나서 두문불출하고 집에서만 지냈더니 우울증이 제 발로 찾아왔다. 몸 아픈 것도 질색인데 마음까지 병들어가니, 아무 것도 하지 못 하는 상태에서 더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은 마음만 커져갔다. 그 땐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생각해 두었던 일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였다. 몸과 마음이 찌든 상태에서 황금 개띠 해가 다가오니 별 감흥도 없었다. 조만간 떡국을 먹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밖엔 없겠지, 늙어가는 데 장사 없다고 주름만 더 깊어지겠지- 아이고, 아이고 소리만 절로 나오다가  며칠이 지났고, SNS를 탈퇴하니 마음이 붕 떠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매일같이 보다가 스스로 그 창을 차단해버렸으니 당장 할 게 없어진 것이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왜 딴거지...
커피 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
나도 '성공적인 주부 창업'으로  
가계에 보탬이 될 순 없을까?
기술이라도 배워보고 싶은데...



 멍하니 커피를 홀짝거리며 별별 생각이 머리 속을 다 스쳐지나가던 그 때, 소소하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도 알아볼까 싶어서 집 근처 공방의 유무를 검색해보았다.


 앙금플라워케이크, 소이캔들, 천연화장품, 네일아트 등등 정말 다양한 공방들이 집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하고 끌리는 것은 없었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쉴새없이 안구를 굴려대던 그 때, 가죽공예 관련 블로그와 마주하였다.



이거다! 바로 이거야, 가죽공예!


 평소 가죽 가방이나 가죽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면 사죽을 못 쓰던 내가 타이밍도 좋게 집 근처 가죽공예 공방 블로그를 봤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계시와도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데이 클래스로 가장 짧게 걸리는 수업이 키링(key ring)만들기라 냉큼 전화로 수업 신청을 하고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찾아갔다. 육체는 정신이 지배한다고 했던가. 찌뿌둥해서 움직이지도 못 할 것 같던 몸뚱아리가 어째서 그리 가볍게 움직여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단 번에 발걸음이 떼여진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두 눈으로 담은 공방의 첫인상은 너무나 세련됐고, 지나치게 생소한 도구들이 즐비했다. 내가 과연 저런 기계를 다룰 수 있을까, 바느질을 하다가 찔려서 못 하겠다고 손사레를 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러한 위압감을 꾹꾹 누르고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묵묵히, 열심히 도전해보았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가죽공예인지라 반은 선생님께서 해주시고, 나는 바느질만 겨우 했다. 가죽공예에서 가장 기본이지만 정말 중요한 '새들스티치(saddle stitch)'라는 바느질 기법이 있는데, 그 유명한 명품 에르메스(Hermes) 장인들이 사용한다는 바느질 기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한 것들을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수강생으로서 열정적으로 듣고, 보고, 따라하기 바빴다. 가죽공예를 시작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느질을 할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평정심이 유지되면서, 숱한  잡념들이 사라지고, 나중에 바느질을 끝내고 나서 몰아치는 성취감이 그야 말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해 준다는 것이었다. 육아 우울증에는 이만한 게 없다 싶을 정도였다.









 가죽의 질감을 느끼고, 무력감에 지쳐있던 내가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단 희망이 생기다 보니 욕심도 점점 커져서 내친 김에 기초반까지 수강해버렸다. 패턴을 재단하는 것부터 본드칠에 목타치고 바느질까지, 뭐 하나 쉬운 게 없는 가죽공예의 세계이다. 그래서 더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고, 허투루 했다가는 자칫 작품이 손상되기 쉽기 때문에 집중을 놓을 수가 없다. 그야 말로 나의 인내심과 성실함을 평가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손재주는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주어진 과정을 따라하면 되니까, 나는 아직 기초반 수강생이기 때문에 변형이나 창조를 해낼 수 없다. 물론 손재주가 있다면 제품을 만드는 게 쉽거나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겠지만, 그 뿐이다.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해주셨고, 나는 그 말에 더욱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저 묵묵히 여느 장인들처럼 수많은 과정들을 겪어내서 만들어나갈 뿐이다. 그게 가죽공예의 가장 큰 매력이다.







 바느질을 편법으로 하면 속도는 빠르게 낼 수 있을지언정 작품의 퀄리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바느질이 삐뚤빼뚤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 목타를 친 방향과 정확한 바늘구멍으로 양쪽에서 바늘이 오차없이 교차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오래걸리며 정성이 깃든다. 그래서 아무 생각할 틈이 없는 것이다. 무념무상이 삶의 지향점인 내게 이만한 것은 없다.


 가죽공예의 장점은 파도 파도 끝이 없지만, 그에 비해 단점은 단 한 가지 뿐인데, 결국 모든 것은 비용 문제다. 소위 '귀족취미'라고 일컫는 가죽공예는 가죽 값만 해도 사시나무 떨리 듯 떨릴 정도로 비싸다. 내가 다니는 가죽공방에서는 최고급, 고가의 가죽들만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도 공방을 운영하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나는 처음부터 아주 운 좋게 착한 공방과 인연이 닿아서 거의 마진 없는 비용을 지불하고 최고의 기술을 배우고 있는데, 이 가격에 내가 이런 좋은 가죽을 접할 수 있다는 게 미안해질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공방이 없어질 때까지 빌붙어 있으려 한다. 그래도 양심에 털 한 가닥은 붙어 있는 지라 수강생들이 마시는 커피의 원두는 가끔 내가 제공하기로 했다. 맛 없는 커피는 나부터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무한 이기주의가 따로 없네.


 앞으로 더욱 열심히 만들어서 나만의 창작 제품을 구현해 낼 수 있을 때까지 가죽공예에 미쳐보려 한다. 서른이 넘어서야 인생 취미 발견!







출처 - 하토르 가죽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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