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목숨의 생사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살고자 하는 의지다. 인명도, 견명도 하늘이 정한 때가 따로 있고, 그렇기에 의지만으로 살고 죽음이 결정될 수는 없겠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미르는 생명력이 강한 아이였다.
병원 선생님들조차 포기한 상태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났다.
하지만 그날 새벽, 나와 여동생은 미르의 생명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미르와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이 트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나의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편으로는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하며, 찜질방을 나가 푸르스름한 아침 빛을 뚫고 병원으로 향했다.
"미르가 장해요. 잘 버텨줬습니다."
당직 수의사선생님이 지친 얼굴로 미르를 칭찬했다. 그러면서 면회를 허락했다. 여동생과 나는 입원실로 안내되었고, 투명 칸막이로 된 입원실에 힘없이 누워있는 미르를 볼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반쪽이 되어 버린 미르는 엄마와 이모가 이름을 부르자 겨우 눈을 떴고, 초점 없는 눈동자로 우리를 보았으며, 미세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몸을 일으키지도 못할 정도로 탈진해 있으면서도 안간힘을 써서 우리를 반가워하는 미르를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졌다. 입원실에 격리되어 있는 반려견을 면회해 본 견주들이라면 내가 느꼈던 가슴 아픔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하고도 남으리라.
"위기를 넘기긴 했는데 워낙 상태가 위중해서요. 입원 치료가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미르가 나을 수 있다면 입원 아니라 더한 것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살던 도시와 동물병원이 있는 도시를 오가며 병간호에 돌입했다.
병원에서 필요하다고 말한 치료들을 모두 받았지만 미르는 쉽사리 회복이 되지 않았다. 기력을 찾으려면 뭐든 먹어야 할 텐데 미르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주는 처방식은 물론이고 물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입원실에 있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아픈 와중에도 미르는 자기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고 있었다. 면회 온 나를 보고 꺼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런 미르를 보면서 나도 같이 울었다. 하는 수 없이 병원 측에서 보호자 대기실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미르를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인 셈이었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미르와 함께 지내며 습식 처방식을 한 스푼이라도 먹이려고 노력했다. 엄마와 병원 선생님들의 애타는 심정을 아는지, 물도 넘기지 못하던 미르가 조금씩 곡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먹어야 한다고 정해준 양보다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병문안을 온 여동생이 기력이 떨어진 개에게는 북어가 좋다는 말을 해줬다. 더 정확히는 북어를 고아 만든 물을 먹이면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 북어를 사서 물에 푹 담갔다. 소금기를 뺀 뒤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물에 담가두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을 몇 번 한 뒤에 새 물을 담아 끓였다. 그리고 병원으로 돌아와 주사기로 미르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흔히들 '강급'이라고 말하는 강제급여였다. 습식 처방전을 먹일 때도 그 물을 부어서 먹였다.
미르가 퇴원할 수 있게 된 건 병원에서 받았던 치료가 많은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북어를 고아서 만든 물이 미르를 살렸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 그 물을 먹이기 시작하면서 미르의 식욕이 돌기 시작했고, 식욕이 돈 덕분에 처방식도 먹을 수 있었고, 기력도 점점 회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르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면 이 모든 일들이 허사로 돌아갔을 것이다.
미르가 떠나고 나서 여동생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미르는 참 생명력이 강한 아이였어."
여동생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지한 엄마의 실수 때문에 커피중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까지 처했으면서도 미르의 강한 생명력 덕분에 미르는 살아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기억이 남아있는 한 이 점에 대해 미르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만일 그때 미르가 잘못되었다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으리라.
미르가 힘을 내준 덕분에 나도 힘을 내서 병간호를 할 수 있었다.
미르는 미르 나름으로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도 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사람도 회복기라는 것이 있다. 미르에게도 그 시간이 필요했다.
미르는 간 수치와 신장 수치를 낮추기 위해 1년 넘게 매일 약을 먹어야 했다. 병원에서 퇴원하기는 했지만 미르의 투병 생활은 계속되었던 셈이다. 차 타는 걸 싫어하는 미르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여야 하는 순간들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는 지쳐갔다. 하지만 미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살고자 힘을 내준 미르를 위해서라도 뭐든 해야만 했다.
안타까운 점은 미르의 수난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014년, 살던 곳에서의 생활을 접고 다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 도시에 적응해나가던 중 미르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이마에 피부병이 심하게 생겨서 대머리처럼 털이 다 빠지고 만 것이다. 몇 달의 고생 끝에 피부병이 낫자 이번에는 혈뇨를 보기 시작했다. 병원 진단 결과는 결석이었다.
문제는 결석의 경우 재발의 위험이 높다는 점. 미르 역시 돌을 빼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재발하고 말았다. 수술요법이 아니라 약물 치료로 돌을 없애보려고 했지만 6개월 가까이 약을 먹였음에도 미르의 돌은 줄어들지 않았다.
가능하면 수술을 시키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미르의 간 때문이었다. 몇 년 동안 약을 먹여가며 수치를 낮춰 놓았지만 미르의 간 수치는 정상견들보다 몇 배는 높았다. 그렇기에 결석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도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없었다. 수술을 하기에는 위험한 수치라고 했다. 간장약을 먹여서 먼저 수치를 낮춘 다음에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쿠싱증후군이 의심된다고 해서 거기 필요한 검사도 받아야 했다.
오른쪽 뒷다리의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수술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쿠싱증후군은 상당히 힘든 병이다. 천만다행 미르의 검사 결과는 쿠싱증후군이 아니었다.
사람 중에도 선천적으로 간이 약하게 태어나는 이들이 있다.
미르도 그런 케이스라고 보면 되는데, 급성 간염을 앓으면서 간 상태가 더 안 좋아졌던 것 같다.
나는 미르가 건강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주지 않았다. 미르는 신장에 돌을 지닌 채 지내야 했고, 조금만 무리를 했다 하면 어김없이 혈뇨가 보였다.
그리고 심장병 진단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미르는 아프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었다. 이 지상에서 살았던 16년 동안 쉬지 않고 병마에 시달렸고, 약을 입에 달고 지냈다.
미르가 이 병 저 병 앓는 동안 나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았다. 수술 부작용으로 심하게 고생을 하기도 했다. 미르를 산책시키고 목욕시키는 일이 힘든 순간들도 있었다. 산책을 시키려면 걸어야 하는데 몸의 진동이 울릴 때마다 통증이 너무 심했다. 목욕을 시키려고 몸을 구부리면 그때는 더 아팠다. 이런 나를 대신해 남동생이 먼 거리를 마다하고 달려와 미르를 산책시키고 목욕까지 시켜주었다.
그러고 보면 나 혼자 미르를 사랑했던 게 아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마당에서 키우는 개에 익숙했고, 보신탕 문화에 길들여진 분이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나와 여동생이 개를 키우기 시작한 뒤로 달라지셨다. 미르와 힘찬이를 데리고 부모님 댁에 놀러 가면 "한 그릇 거리도 안 되는 녀석"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어색하지만 다정한 손길로 개손자들을 안아주고 쓰다듬어주셨다.
그건 나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여동생과 나를 볼 때마다 "개한테 정을 다 줘서 너희가 결혼을 안 하는 거다"라고 타박하시면서도 미르와 힘찬이를 예뻐하셨다. 엄마는 집안에서 개를 키우는 사람들을,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 하셨더랬다. 그러나 개손자가 생긴 뒤로는 밖에서 말티즈나 요크셔테리어를 만나면 미르와 힘찬이가 떠올라 괜히 말을 걸게 되고, "예쁘다, 귀엽다" 칭찬을 하게 된다고 하셨다. 저게 무슨 짓들이냐고 쯧쯧 혀를 찼던 예전과 비교하면 크나큰 변화였다. 여동생과 내가 미르와 힘찬이를 데리고 본가에 가는 날이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배변패드와 사료를 미리 사놓고 기다리기도 하셨다.
먼 도시에 살고 다리마저 불편했던 엄마는 미르가 급성 간염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자 남동생을 대동하고 병문안을 와주기도 했다. 사람 손자도 아니고 개 손자의 병문안이라니. 엄마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엄마는 미르가 살아있던 내내 미르를 걱정하고 아껴주셨다.
여동생은 차를 구입한 뒤로 미르가 병원에 가야 할 때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와 운전기사가 되어주었다. 미르에게 좋은 곳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그녀는 우리를 데리고 바다로, 강으로, 산으로, 자주 여행을 가주기도 했다. 재미없는 엄마와 사느라 심심했던 미르에게 이모는 최고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미르가 급성 간염으로 입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한밤중에 병문안을 와주었던 별이 엄마와 아빠는 별이를 데리고 우리 집을 종종 방문해 미르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언니들과 형부들도 통화를 할 때마다 미르의 안부를 꼭 물어주었다. 나의 지인들도 그러했다.
나는 이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미르를 향한 나의 사랑을 존중하는 마음.
그 마음에서 우러나온 다정함과 따뜻함이 미르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라 믿는다. 그 사랑과 관심이 미르에게 생명력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건 아닐까, 이 글을 기록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 곁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미르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로 작동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나의 미르도 두 살 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천수를 누렸다.
비록 건강하고 쾌청한 삶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한 세월이었으니 마냥 고통스럽지만은 않았으리라. 부디 그러했기를, 지금은 고통 없고 슬픔 없는 곳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기를 마음 모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