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만나는 사람들 중에 가끔,
'관종 색갸. 너 지금 나랑 만난 얘기도 인스타에 글로 올릴거지'라고 묻는 밥샙들도 있습니다.
그땐, '나는 밥샙들 만난 얘기는 안 써 ㅎㅎ.'라고 가볍게 되받아쳐주곤 해요.
여튼, 제 글에 지인들이 많이 등장해서 요즘은 쓰기 전에 당사자에게 검열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정확하고 생생한 글맛을 전달하기 위해 귀하의 존함을 써제껴도 될깝쇼?' 같은 식이죠.
그래서 오케이 승인이 나면 인스타에 올립니다.
참 어렵죠. 글 한 번 쓰기.
오늘은 오케이 받은 강용이라는 후배에 대한 얘기입니다.
1.강용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 4년차 나는 직장 후배입니다.(직장에서는 4년차가 제일 웬수라던데.. 여튼 저는 강용이와 사이가 좋습니다.)
최근에 강용이가 승진을 했는데요, 저희 회사 특성상 승진을 하면 다른 지사로 가야합니다.
갈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아쉬웠는지 저한테 맥주 한 잔을 하자고 합니다.
2.저는 술을 잘 못 마시지만 맥주 한, 두 잔 마시고 얼굴 시뻘개져서 알딸딸한채로 전기장판 고온으로 켜놓고 잠드는 걸 좋아합니다.(일어나보면 등에서 탄내가 납니다. 그러니 다들 따라하지 마세요. 제 술버릇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집 근처에 프로그라는 맥주집이 있습니다.가격대는 좀 있지만, 크래프트 맥주는 카스나 하이트와같은 상업맥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 상쾌하고 유쾌하고 통쾌하고 청량한 맛이 있습니다.
아 지금 또 맥주 얘기하니 전기장판 온도조절기로 손이 가네요.
여기 사장님 부부도 너무 좋으시고 친절하셔서 혼맥하러 자주 갑니다.
3.우연히 강용이와 대화를 하다 맥주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프로그얘기를 했고, 제 얘기를 듣던 강용이도 '어! 선배! 저도 거기 진짜 많이 갔는데! 거기서 마실래요? 마침 가기 전에 사장님한테 드릴 것도 있고.'하더군요. 그렇게 둘이서 프로그에 가게 됐습니다.
4.1차에서 거나하게 취한 강용이와 저를 사장님이 굉장히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십니다.
강용이는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습니다.
화요라는 술입니다.
사장님이 술을 좋아하신다고 화요를 선물로 챙겨갔나봅니다. 따뜻한 녀석입니다. 사장님도 답례로 페퍼로니 피자를 서비스로 주셨습니다.
프로그는 진짜 페퍼로니 피자가 눈물 날 정도로 맛있습니다.
5.'선배, 제가 많이 존경해요.' 거나하게 취했는지 강용이가 뻘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전기장판 켤 때인가 싶었습니다. 더 취하기 전에 저도 강용이한테 줄 선물을 꺼냈습니다. 책입니다. 강용이도 저처럼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책을 좋아하거든요. 책 표지 앞면에 작은 손편지를 함께 넣어서 줬습니다. 내용은 뭐.. 오글거리니 패스하겠습니다.
6.편지와 책을 받은 강용이는 흉폭한 수컷이 주는 감성적인 선물이라 그런지 떨떠름해보입니다만, 그래도 고맙다고 안아줬습니다. 동물원의 고릴라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7.좋은 후배들과 선배들을 떠나보낼때마다, '왜 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빨리 떠나는걸까.'라는 원망과 아쉬움 섞인 생각들을 했었어요. 계속 옆에 두고 오래오래 보고 싶었습니다.
8.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이별을 많이 겪다보니, 좋은 사람이기에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거구나, 이 곳에서는 충분히 좋은 열매를 수확했기에 새로운 곳에 좋은 씨를 뿌리러 가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더라고요.
원망과 서운함보다는 그들의 앞날에 축복과 행복이 있기를 바라고 응원할 수 있게 됐습니다.
9.술을 마시고 나오는데 프로그 사장님이 병맥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신나서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니 맥덕후인 고등학교 동기가
'이거 좋은 맥주네.'한마디 합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네요.
우리가 함께 맥주잔을 기울였던 그 날이, 제가 느꼈던 것처럼 강용이에게도 소중하고 행복한 선물같은 하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