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이겨내는 법

변명거리를 이유로 치환하기

by 권민창

남들이 좋아하지만 나에게는 끔찍이 싫은 음식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이유는 대개 과거의 안 좋았던 경험과 맞물리는 경우가 많은거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가지와 국수인데요.
IMF와 맞물린 초등학교 시절, 한창 아나바다 운동이 성행할 때 학교 급식을 남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원래부터 가지 특유의 물컹거리는 식감과, 라면보다 심심하고 빨아들이는 맛도 시원찮았던 국수를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급식에 공교롭게도 두 개가 겹쳐나왔고, 먼저 다른 맛있는 반찬들과 함께 배불리 밥을 먹은 저는 국수와 가지만 남은 식판을 들고 배식구로 갔습니다.

그 때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억지로 가지와 국수를 삼켰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로 가지와 국수를 보면 그 때의 기억이 잔상처럼 남아 자연스레 피하게 됐던 거 같아요.

영어회화 종일반에 다닌지 3개월차입니다. 처음엔 말도 잘 안 나오고 얼굴도 빨개졌지만, 이제는 단어나 문법을 잘 모르더라도 제가 가지고 있는 영어단어들을 총동원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참 배우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일반은 아니지만, 다른 반에 제 할아버지뻘의 어르신이 계십니다. 잘 다려진 셔츠, 각 잡힌 바지를 입으신 아주 트렌디해보이는 어르신입니다.

학원 특성상 연령대가 평균 20대 중후반이라 저도 처음엔 적응하느라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어르신은 저보다 훨씬 더 힘드실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영어가 존댓말과 반말의 경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같이 어울리는 게 굉장히 힘드니까요.

2개월 정도 먼발치에서 어르신을 지켜봤는데, 안타깝게도 제 예상이 적중한 거 같았습니다.
학원 복도를 지나가면 학생들이 공손해지고, 갑자기 정적이 흐릅니다.
제가 말동무가 되어드리고 싶지만,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거 같아 속으로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진 못합니다.

점심 시간, 밥을 먹고 모처럼 시간이 나서 학원 근처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어가 들립니다.
본능적으로 옆을 돌아보니 놀랍게도 그 어르신이었습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영어문장을 반복해서 따라하고 계셨어요.
학원에서 따라하면 괜히 학생들이 불편해할까봐, 나와서 혼자 영어 연습을 하고 계신 거 같았습니다.
선택이 정말 쉽진 않으셨을텐데,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에 정말 많은 감동과 동기부여를 받았던 거 같습니다.

최근에 친구의 추천으로 가지볶음을 먹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안 먹었을테지만, 어르신의 노력을 본 뒤로 저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습니다. 끔찍이 싫었던 물컹한 식감이 오히려 가지의 맛을 돋구어주더군요.

누구에게나 괜히 두렵고, 하고 싶지 않으니 이리 저리 변명거리를 만들고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는 가지와 국수 같은 존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면 충분히 우리의 역량으로 소화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을 극복하고 이겨낼 기회의 문은 조금씩 좁아지는 것 같아요.
생각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보시길 바랍니다.
못할 수 밖에 없었던 많은 변명거리들이, 해야만 하는 이유로 치환될 때 여러분의 인생도 훨씬 다채로운 찬란함으로 빛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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