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대나무밭이 필요해요.
Q. 정말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말 못할 고민이 있어요. 남들에게 말하자니 너무 부끄럽고 두려워요. 왜냐면 남들이 보는 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경우의 고민이거든요. 그런데 또 아무한테도 말을 못하니 고민이 곪아서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안녕하세요. 누군가에게 말은 못하겠지만, 또 말을 안 하자니 너무 답답한 감정을 느끼시는군요. 정말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해봐서 더더욱 공감이 갑니다.
나 자신이 느끼는 나와 사람들이 보는 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 내가 어떤 고민을 말하면 실망하고 비웃을까봐 속으로만 끙끙 앓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비밀 블로그를 개설해서 그런 고민들을 계속해서 적어나갔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로지 저만 읽는 거기 때문에 미사여구나 맞춤법, 문장구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렇게 쓰면서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계속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고민들을 비밀 블로그라는 감정을 토해낼 수 있는 ‘대나무밭’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위안이 되더군요. 임금 자리에 오른 뒤에 귀가 나귀의 귀처럼 커진 경문왕의 비밀을 복두쟁이가 혼자만 간직하고 있을 땐 시름시름 앓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대밭을 향해 외쳤을 때 비로소 그 병이 나았던 것처럼 저도 고민들을 쓰며 내면의 병이 차츰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비밀 블로그에 감정을 쓰면서 제가 실제로 제 본연의 모습을 찾아갔다는 거였어요.
우리는 3가지의 모습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실제 자기 모습인 '실제적 자기'와,
내가 되고 싶어 하고 소망하는 자기 모습인 '이상적 자기',
그리고 내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모습인 '당위적 자기'로 이루어져있어요.
이 세 가지의 '자기'에 대한 모습이 모두 우리를 표현하는데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토리 하긴스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실제 자기와 이상적 자기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불만족스럽고 우울한 정서를,
실제 자기와 당위적 자기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불안과 같은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질문자님의 경우에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당위적 자기와 실제 자기 사이의 간극이 커, 그 간극 사이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으신 거 같습니다. 누군가의 시선이 두려워 고민을 말하기가 꺼려진다면, 혼자 고민을 정리하고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실제적 자기, 이상적 자기, 당위적 자기가 모두 다른 건 정상이지만, 그 격차가 크면 클수록 본인 스스로가 받는 심리적 압박감이 훨씬 더해질 겁니다. 고민들을 정리해보며 그 격차를 차츰 차츰 줄여나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