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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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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Jul 16. 2020

Prologue

5년간 아이와 내가 살아온 이야기의 시작

2016년 1월 4일, 아직 사방은 어두웠고 이불 밖의 공기는 싸늘했다. 남편이 5년 간의 해외파견 근무를 떠나는 날이었다. 첫 비행기를 타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새벽같이 눈을 떴다. 이미 그는 일어나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고 있었고 아이는 고른 숨을 내쉬며 세상모르는 단잠에 빠져 있었다.


짐 챙기는 것을 돕고 출근 준비를 한 뒤 남편이  아직 잠들어 있는 아이에게 뽀뽀를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네 달 뒤면 두 돌이 돌아오는데... 자라나는 아이를 곁에서 보지 못할 남편의 심정은 어떨까? 도무지 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애정과 갈망, 안타까움과 슬픔, 미안함과 죄책감을 모두 담은 작별인사였다.



그의 상하이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우리 부부는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했다. 하던 일도 몸담은 직장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서 나는 선뜻 그를 따라나서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의 파견기간은 길면서도 한편으로 짧았고 돌아와도 정년은 보장되지 않았으며 아이는 너무 어렸다. 그나마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내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의 예방접종 등 병원 문제도 한몫했다. 긴 논의 끝에 그는 혼자 떠나기로 결정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거대한 여행용 가방을 짐칸에 싣고 택시를 타고 이제 막 기지개를 켜려는 새벽의 도시를 가로질러 달렸다. 도심의 경계를 자연스레 나누는 산을 뚫은 터널을 지나. 이 도시에서 가장 긴 터널 안은 뜻밖에도 정체 중이었다.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뉴스를 듣는지 마는지 남편은 평소처럼 말이 없었고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을 챙겼는지 물어보고는 이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선 곳으로 혼자 떠나는 자의 마음을 머무는 자가 다 헤아릴 수 없고, 두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와 단둘이 남겨져 일상을 이어가야 하는 자의 심정 또한 떠나는 자가 다 보듬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야 완벽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듬더듬 터널의 반대쪽 출구를 향해 나아가는 택시 안에서 남편과 내 앞에 펼쳐질 5년을 떠올려보았다. 막연하기에 아무런 실감도 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공항에 도착했다. 어렴풋이 밝아 보이는 하늘이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인지, 비현실적으로 빛나는 공항 때문인지   없었다. 실었던 짐을 끌어내려 현관 입구에 있는 카트에 옮겨 싣고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모든 것은 그동안 학습한 해외여행의 규칙에 맞게 순조롭게 흘러갔다. 여권을 보여주고 짐을 부친  기호에 맞는 좌석을 배정받고 티켓을 받아 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여행 매뉴얼에 집중하며 움직이는 일은 잠시나마  있을 작별을 잊게  주었다.


하지만 너무 빨리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우리는 2층 커피숍에서 커피를 한 잔 사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택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대화 조금과 과장된 감정을 실은 격려의 말을 나누었다. 어린아이와 나를 남겨두고 먼 곳으로 떠나는 그는 미안함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말이 없었고, 나는 아빠도 없이 어린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비장했다. 세월은 이 모든 것을 아련한 추억으로 만들 것이며 삶은 의지와는 늘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지만.  


법무부 직원이 여행자가 내미는 여권을 받아 들려고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탑승장 입구에서 우리는 미안하고 안타깝고 비장하고 두렵고 걱정되며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감정을 마음에만 담아둔 채

"잘 지내고."

"들어가면 연락해라."

는 일상어만을 주고받았다.


그가 들어가며 한참 손을 흔드는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바깥에 남아 연락을 기다렸다. 아직 출근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고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저 해프닝이기를 바랐던 것도 같다. 그 사이 남편은 출국심사대를 통과하여 탑승장 근처 공항 면세점에 당도했고 전화를 했다.



내가 즐겨마시는 길고 가는 파란 병에 든 독일산 리즐링을 발견했는데 한 병에 25불인데 두 병 사면 15% 할인을 해 준다며 어쩔까 물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은 이미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남겨진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두 병 사서 다음에 만나면 마시기로 했다.


그를 태운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까지 보면 회사에 지각할  같아서 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이 세상은 환하게 밝았고 경전철 안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내뿜는 현실감각 때문인가?  전의 이별의식의 여운은 꿈처럼 몽롱하게 느껴지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지상철의   바깥으로는 너른 논과  사이 낮은 시골집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종종 하늘에  비행기들이 가깝게 보였다.


막 이륙한 이들과 착륙한 이들이 품은 설렘과 아쉬움, 두근거림과 안도감 같은 감정들이 비행기 안에 가득할 것이다. 떠남과 도착이 교차하는 공항으로부터 미끄러져 떠나며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무수한 작별과 재회를 떠올렸다. 내 앞에 가로놓인 낯선 삶을 그제야 실감했다. 회사로 곧장 가는 셔틀버스가 정차하는 역에서 내렸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사이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진짜 간다."

"그래, 몸조심하고 봄에 보자. 밥도 잘 챙겨 먹고. 도착하면 전화해."

"그래, 너도 몸 잘 챙기고."



그는 앞으로 5년간 자신이 속할 곳으로 떠났다. 우리는 그 해 4월의 어느 날 푸동 공항에서 영화 같은 재회를 하게 될 예정이었지만 그렇게 작별했다.




Photo by Pexels@Pixabay


돌이켜 보면 나는 혼자 떠나는 남편이 조금은 부럽고 미웠던 것도 같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야 남겨진 내 역할이 무겁고 힘들고 두려웠음을 알았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왜 이리 힘이 들었을까?


남편 없이 생계를 위해 일하며 어린아이를 키웠다. 친정엄마가 퇴근하고 난 뒤와 주말 이틀 내내 아이와 단둘이 보내며 나는 때로는 너무 좋은 엄마이다가도 때로는 나쁜 엄마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부서이동으로 바뀐 환경에서 내게 선입견부터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남겨진 남편의 가족 특히 시어머니의 감정도 마주하느라 소진해 버리기 일수인 에너지로 겨우 아이를 돌봤다. 무수히 많은 날, 자기혐오에 빠졌다.



그래서 지나치게 비장했고 예민했으며 과하게 쿨한 척 현실을 회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알면서도 잘 몰랐다. 몰랐기에 늘 다른 것을 더듬었고 얻을 수 없는 높은 기준의 나를 지나치게 갈망하느라 아이 몫의 혼란과 어려움도 있었을 거라는 사실을 헤아릴 수 여유조차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남편의 해외근무가 끝이 보이는 지금이 되어서야  시간  나와 아이를, 때로는 남편을 돌아본다. 태풍 속에 있을 때는 눈조차 제대로   없이 그저 날아가지 않도록 버티고  있을 수밖에 없었음을 느끼면서.


남겨진  살아내는데 급급하여 아이와 나누었던 많은 일들을 제대로 복기해 보지 못한 짙은 아쉬움과 떠난 자에게 들려주지 못한 시간이, 그래서 종종 같은 실수를 거듭하는 나를 깨닫는다. 남편과도 드문드문 일상이라기보다는 이벤트에 가까웠던 재회를 반복하며 소통보다는 단절하는 경험을 거듭한 세월이 오래도록 안타까웠었다.  돌아함께할 우리를 위해 오랜 과거로부터의 기억을 차곡차곡 정리해 보자고 이제야 용기를 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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