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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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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Aug 13. 2020

잠 못 이루는 밤, 열은 내리지 않고

초보 엄마의 좌충우돌 기록

돌아올 수요일, 20대 국회의원 선거의 사전투표일을 시작으로 아이와 함께 처음으로 남편에게 가기로 했다. 인사이동된 지 2달 반만이기도 했고, 자리를 며칠 비우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공백 기간 동안 가급적 일에 무리가 없도록 사전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챙겨두었다. 떠날 일만 남았다.


그날은 모처럼 봄의 축복 어린 햇빛이 세상에 고루 내렸다. 아이가 콧물을 조금 흘리긴 했지만 환절기면 언제나 겪는 일이기에 마음에 두지 않았다. 선거일 아침 일찍 한국을 떠나는지라 주말 하루 마련된 사전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투표를 마치고 병원에도 들러 콧물감기약을 탔다. 별 이상은 없다고 했다.


세상은 평화로웠고 따스하고 빛이 났다. 아이의 신이 난 표정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밖에서 머물렀다.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려던 참이었다. 아이 몸이 너무 뜨거웠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있는 것 같아서 재보니 39.1이었다. 나갈 때만 해도 멀쩡하고 컨디션도 좋았는데 갑자기 오른 열이었다.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을 만들어 이마에 올려주니 싫다고 거부하며 떼내다 곧 열에 취해 잠이 들었다.


행복의 빛으로 가득하던 휴일의 반짝거림이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눈을 감은 채 작은 신음소리를 내는 아이의 열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약도 먹였고 차게 적신 거즈 수건으로 계속해서 온몸을 닦아주었지만 39-40도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수많은 고열의 고비가 있었지만 늘 남편이나 엄마와 함께였다. 서툰 나 혼자 아이를 챙기다 무슨 일이 날까 덜컥 겁이 났다. 더군다나 4일 후에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폐렴이나 독감이면 어떻게 하나...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시계가 어느덧 4시를 넘었다. 택시를 타고 토요일 오후 5시까지 진료를 보는 아동병원으로 갔다. 건물 4층에 자리 잡은 병원의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순간 입이 벌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보이는 대기실에 50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엄마들과 아기들이 바글거렸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접수를 하고 아이를 안고 자리에 앉아 물을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였다. 기다리다 해열제를 한번 더 먹였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의사는 끝없는 진료 릴레이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환자나 보호자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증상도 듣는  마는  했다. 열이  시간을 묻더니 별말 없이 내일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조금도 해소되지 않은 불안감만  커진  진료실에서 쫓겨났다.  종류의 해열제가  봉투를 받아 들고 왠지 화가 나는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Photo by camilo jimenez@unsplash


깊은 밤이 시작되려는데 열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교차 해열을 했지만 여전히 열은 그대로였다. 머릿속에서 어디서 듣고 읽은 온갖 일들이 떠올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폰을 들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모든 문제 증상이 다 내 아이 일인 것만 같았다. 고민 끝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아빠가 오셨다. 우리는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큰 병원의 야간 응급실로 갔다. 오늘 하루 병원만 세 번째였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이 아닌 당직의가 증상을 듣더니 독감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독감은 아니었다. 급성으로 열을 내리게 해주는 해열 주사를 맞고 이어서 온수 찜질을 했다. 나서부터 한 번도 팔뚝과 허벅지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적이 없는 가늘고 조그마한 여린 몸이 기저귀만 남긴 채 발가벗겨졌다. 어리둥절한 아이에게 간호사가 와서 따뜻한 물을 끼얹어 주었다. 약기운이 도는지 이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기에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추워하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걸쳐주고 싶었다. 간호사가 단호하게 안된다고 그대로 두라고 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병상의 중간에 앉아 발가벗겨 진채 오돌거리는 아이가 안쓰러워 아빠와 나는 병상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해열 주사와 온수 마찰의 효과는 기적적이었다. 떨어지지 않던 열이 곧 확 꺾이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Photo by Adhy Savala@unsplash

처음 겪는 응급실은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듯 달랐다. 형광등이 너무 밝아 병실에 놓인 수많은 물건들의 색은 쨍하게 다가왔고 알 수 없는 전선과 기계가 주는 위압감이 도드라졌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늦은 밤 병상을 차지하고 누워 의사의 처치를 기다리는 여러 사람들의 얼굴에 서린 지친 표정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끔찍한 사고는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는 아이를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었다.


"함께 있어줄까?"


묻는 아빠께 집에 가셔서 편히 쉬시라고 말씀드리고 택시비를 쥐어드리고 아이와 함께 돌아왔다.

다행히 그날 밤엔 열이 다시 오르지 않았다. 밤새 열을 재다가 새벽녘에 지쳐 잠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이 되자 다시 미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열이 훅 올랐다. 주말 진료가 되는 어제 오후에 들렀던 병원으로 갔다. 걱정이 됐는지 동생도 엄마도 와 주셨다. 일요일의 병원도 아픈 아이들로 가득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한참을 기다려 어제와 다른 의사를 만났다. 그 의사는 오늘 휴진이라고 했다. 의사는 다짜고짜 독감 검사를 하자고 했다.


"어젯밤 열이 안 떨어져서 OO병원 응급실에서 독감 검사를 했어요. 그런데 또 해야 하나요?"


의사는 열이 언제부터 났는지 되물었다. 오전 11시 반경이었다고 했더니 의사는 12시간 이내 검사는 정확도가 낮아서 다시 해 봐야 한다고 했다.


'어제의 의사는 왜 내게 열난 시간만 묻고 그 사실을 설명해 주지 않았을까?'


또다시 면봉을 본 아이는 머리를 흔들며 울었다. 순간 어제 오후에 만난 같은 병원 의사와 응급실 당직의 모두에게 화가 나났다.


'그는 친절한 설명이 그리 어려웠을까? 당직의는 부모의 불안감을 해소해주려는 것이었을까? 그냥 검사비를 벌려고 했나?'


의미도 없는 질문과 화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다행히 독감은 아니었다. 급성으로 온 폐렴에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의사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요일에 부득이하게 비행기를 타야 할 일이 있다는 내게 정신이 나갔냐고 돌직구를 서슴지 않았다. 무조건 입원시키고 비행기 탈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1주일은 봐야 한다고 했다.


난리법석을 떤 주말이 지나고 아이는 토요일 오전에 갔던 원래 다니던 병원의 주치의에게 돌아갔다. 더 어릴 때부터 쭉 봐준 분이라 아이 상태도 잘 안다. 폐렴이 맞지만 입원보다는 통원치료를 하자고 약을 처방하고 링거를 맞는 식으로 집중치료를 해 주셨다.


며칠 만에 아이의 상태는 호전되어 우리는 다행히 푸동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중국의 미세먼지를 걱정하며 크게 아픈 뒤니까 무리하지 말고 혹시라도 조금 안 좋으면 먹이라고 약도 별도로 처방해 주셨다. 다행히 아이는 별 탈 없이 첫 상해 여행을 마쳤고 상해는 예상과 달리 하루를 제외하고는 미세먼지도 심하지 않았다.




4년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초보 엄마의 무지와 경험이 부족이 그 난리법석을 만들었음에 부끄럽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 뒤로도 아이가 아파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무수하게 보냈다. 그런 밤에 아이의 열을 내라다 보면 하얗게 표백된 시트가 깔린 넓은 병상에 발가벗겨져 영문도 모른 채 오들오들 떨던 그 모습을 떠올라 왠지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리고는 했다.


이제 열이 오르면 주방으로 가 상부장의 보관용기에 담긴 보리차를 한 스푼 덜어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아기 때부터 쓰던 거즈 손수건 몇 장에 물을 묻혀 위생팩에 넣어 냉동실에 잠깐 넣어둔다. 시간을 체크해 해열제를 몸무게에 맞춰 먹이고 수시로 물기가 촉촉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냉동실에 잠깐 넣어둔 수건을 꺼내 이마를 짚어준다. 끓인 보리차를 적당히 식혀 수시로 먹인다.


아이가 커 가며 면역력도 함께 자라 그때만큼 병원 신세를 지지 않게 된 것도 큰 몫이다. 그 시간만큼 엄마인 나도 아이가 아플 때 열을 효과적으로 내리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 갔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힘들었던 건 아이가 아픈 것만큼이나 불안하게 흔들였던 내 마음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우여곡절이 지나고 아이도 나도 많이 자랐다. 여전히 종종 잠 못 드는 밤을 맞는다. 처음의 막막하고 아득하던 시간도 이제는 약간의 피로를 동반할 뿐이다.


여전히 서툴고 많은 것을 놓치고 뒤늦게서야 배우는 엄마지만 그때처럼 비장하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한다. 무수한 첫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 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 테니까.


후회가 너무 많아 지나온 시간의 빛나는 행복을 종종 잊어버리고는 했던 순진하고 무지했던 초보 엄마가 가르쳐 준 것을 믿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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