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만나는 삶
아침부터 시원하게 비가 내리는 금요일입니다.
어제저녁, 과식할 일이 생겼어요.
많이 먹었더니 역시나 새벽에 일어나기 어렵네요.
평소보다 1시간 반을 더 자고서야
정신이 들어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무언가를 반복하며
얻은 소중한 감각이지요.
아주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를 알아가는 건요.
어제처럼 실패하는 날도 있지만
다음에는 알아차릴 테니까요.
그렇게 하루하루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 소개해 드릴 그림책은
전미화 작가의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얼굴을 옆으로 든 한 여인이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벌거벗은 채 앉아 있습니다.
표정도 없고 중성적이라
가슴이 아니라면 여자인지 몰랐을 것 같아요.
뒷 표지에는 굵은 선으로 마무리한
싱그러운 초록의 숲이 보입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함께 만나 볼까요?
속표지를 보면 벤치에 앉아 비둘기들과 함께
딸기우유와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있는
그녀가 보입니다.
분위기를 봐서 하루 이틀 일은 아닌 것 같네요.
퇴근시간이 다가왔네요.
6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자기의 할 일에 골몰한 동료들과 달리
업무용 PC의 전원을 껐어요.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내려 걷는 거리는
차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끄럽습니다.
홀로 표정 없이 무심히 걷다
나이트 홍보 전단지에 미끌렸던 것일까요?
그녀의 앞에는 부실하게 내버려진
공사현장이 보이는데요.
장바구니 가득한 물건들을 한 손에 들고
목발을 짚은 채 집에 도착했는데
현관에서 하필 계란도 깨지죠.
재수 없는 날이었을 텐데...
그녀의 표정은 화도 슬픔도 담지 않습니다.
그것은 체념에 가까운 묵묵함이네요.
늘 그래 왔는데 뭐 별다르다고...
그러던 어느 날,
편지와 함께 작은 화분 하나가 배달되어요.
다투고 헤어진 애인인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덤덤하던 그녀는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주먹을 부르르 쥡니다.
버리려고 모아둔 물건들 틈에
그 화분을 놓아둡니다.
심긴 식물이 축 쳐진 것을 발견하고
미안했던 것인지 창가에 옮기죠.
햇빛을 받아 되살아 난 식물에
분무기로 물도 뿌리고 영양제도 주고요.
분갈이를 하고 남은 원래 화분에 새 씨앗도 심어요.
그렇게 그녀의 공간, 아니 삶은
조금씩 새로운 크고 작은 화분들과
그것이 선사하는
다채로운 색감의 생명력으로 가득해집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그 초록의 생명들이
그녀를 어디로 이끄는지는
책을 통해 직접 봐주셔요.
이 그림책은
황색의 크라프트지에 그려졌다고 해요.
그림에서 느껴지는 두꺼운 입체감은
종이의 성질이 물감,
작가 특유의 굵고 강한 그림과 만나
더욱 강조되는 것 같네요.
이야기의 초반, 어떤 장소에서도
시종일관 덤덤한 무표정의 주인공은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감각과 감정에 무뎌진
저나 보통의 우리들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매일 글을 쓰기 전의 제 모습을
지금의 제가 내려다본다면 딱 이랬을 것 같아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고
무엇에도 그저 덤덤하게 바깥의 자극을 차단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마음의 음소거 버튼을 눌렀지만 내면의 소리마저 함께 사라져 버린 일상들.
슬픔과 좌절을 느끼지 못하는 대신
기쁨도 행복도 같이 꺼져 버린 하루에
갑작스러운 작은 화분의 등장,
조금씩 건네기 시작한 손길은
그녀의 표정과 일상을 조금씩
하지만 거대하게 바꿔 갑니다.
글 하나 없지만
수많은 말을 하고 있는 이 그림책을 보면서
제게는 글쓰기였던 그녀의 초록이
여러분께는 무엇일까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내 이름은 빨강
** 책 소개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터넷 서점에 공개된 출판사의 작품 이미지 중 일부입니다.
그림책 애호가의 한사람으로 그림책의 저작권 보호에 동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