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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Nov 25. 2020

아파트가 뭐라고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통보를 받았던, 테뉴어를 보장받은 교수처럼 든든한 평생직장을 얻었다고 기뻐하던 그 가을 전까지 구청 공공근로, 계약직 사원, 레스토랑 및 커피 전문점 아르바이트, 과외 교사 및 논문 번역 등의 임시직으로 일하며 취업준비를 했다. 합격은 늘 희망을 가득 안긴 채 한 발짝 앞에서 멀어졌고 수입은 불안정했으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투명한 미래와 자기 의심은 내 청춘을 갉아먹었다.


그 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구정 연휴였다. 아직은 내가 무슨 일을 하며 밥을 먹고살지 좋게 말해 무수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고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청년 백수이던 그때, 큰 이모의 시가가 소유한 전원주택으로 엄마를 따라 이모들과 함께 1박 2일 여행을 갔다. 우리 도시에서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온천마을이 지척인 산 속이었다. 관리에 수고와 비용이 꽤 들어갈 것이 분명한 집을 둘러보며 표현이 풍부한 옥임 이모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촌 동생과 몇 년 만의 안부를 주고받고 있는 곁으로 엄마와 이모들은 주방의 거대한 아일랜드에서 장을 봐온 식재료들을 늘어놓고 끼니를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나 밖에서난 여자들은 먹을 걱정과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재료를 다듬으며 큰 이모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이번 명절 선물로 준 것들을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옥임 이모도 질세라 꽤 잘 나가는 큰 딸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 의기양양하게 이어갔다.


순간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열로 따지자면 옥임 이모의 큰 딸보다 위고 오빠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데다 대학 졸업한 지가 몇 해 째인데 용돈이며 변변한 명절 선물 한번 갖다 안기지 못했던 나는 그 구정조차 엄마에게 약간의 세뱃돈을 받았고 여행까지 따라나선 참이었다. 자식을 둘이나 두고도 자랑할 것 하나 없는 엄마가 어떤 심정일까 생각하며 면목없고 부끄러운 마음에 왜 여기까지 따라왔나 후회하던 참이었다.


그 순간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과외하는 곳에서 김을 선물 받아 가지고 았더라."

"그랬구나."

옥임 이모의 호응과 함께 화제는 자연스레 다시 끼니로 흘러갔지만 엄마의 작고도 확실했던 그 목소리는 오래도록 가슴에 어떤 무늬를 그렸다.


오죽하면 그런 걸 자랑이라고 했을까 미안함과 자책감을 느끼다 자식이 일하며 처음으로 받아 가지고 간 명절 선물을 자매들에게 이야기하는 엄마의 소박한 마음에 울컥 눈물이 나고 말았다. 동생들 앞에서 울 수는 없어서 덥다는 핑계로 창가로 다가가 마음을 달래며 꼭 취업해서 추석선물은 그럴싸한 것으로 챙기드리고 말리라 다짐했었다. 그것은 다행히 현실이 되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직장이 주는 경제적 안정에 힘입어 그 순간들을 추억하며 살아간다. 선물이나 현금, 식사를 대접하는데도 어려움은 없어졌다. 취직을 못해 늘 부모님의 짐이라 스스로 생각했던 내가 결혼하고 맞벌이를 하며 이젠 퇴직하고 연금으로 살아가는 두 분보다 더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어쩌다 소유한 집은 몇 년 사이 산 가격에서 꽤 올랐다.


어차피 내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은 크게 오르지 않은 데다  먹고사는 건 비슷하지만 가끔 직장에서 힘 드러운 일을 겪거나 불안한 미래를 떠올리다 보면 없는 것보다는 다행이다 안도감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세상 보는 눈이 있어서 이런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저 운이었다. 어느 순간 아파트 가격에 비례해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자꾸만 훈수를 두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뭘 좀 하시라고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된다.’ 젊어서는 우리들 때문에 이젠 연금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이사를 하지 못하는 부모님을 다그친 것이다.


엄마라고 지난날에 아쉬움이 없을 리 없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운이 좋아 삶의 안정을 이제 조금 맛보는 내가 설익은 판단과 가치관으로 망설임과 주저를 실패로 단정 지으며 그럴 의지도 생각도 없는 엄마를 흔들며 평가하고 있었다. ‘현금 쥐고 있지 말고 얼른 옮기시라.’고.


부모님의 더 안정적인 노후를 바라는 마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돈의 가치가 급속도로 떨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걸로 노후를 보낼 부모님을 뭐라도 해서 도우고 싶었지만 요지부동인 생각을 바꾸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싫다는 사람에게 나의 기준과 잣대로 인생을 좌지우지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쩌면 마음속에는 고작 조금의 성취에 취해 적어도 이 나이에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한다며 비교하고 평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무수히 많은 시험을 보고 불합격 소식을 되풀이해서 듣던 시절, 엄마는

"다른 자식들은 잘만 돈 벌어 오던데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너는 뭐 하는 거냐? 엄마 친구 딸은 이렇다던데."

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인품이 훌륭한 마더 테레사라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가장 속을 끓이고 있을 자식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도 없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을 그 말을 참고 삼켰을 사람이었기에 과년한 큰 딸이 과외교사를 해서 받은 동원 양반김 선물 세트를 이모들에게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끄러워하거나 안타까워하기 전에 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한번 더 생각하고 알리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놈의 아파트가 뭐라고. 어느새 부모님의 삶을 아파트 가격과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로만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보다 여유로운 삶을 누리며 살기 위해 자산 증식과 유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잣대로 누군가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엄마는 나의 조언에 담긴 무의식적 뉘앙스를 눈치채고 마음을 다치셨던 것 같다.


'너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지금처럼 소박하게 살면 되니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단호히 선을 긋던 엄마가 안타까워 결국 말다툼을 하고 말았던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김을 받았다고 담담히 말하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빠와 사촌동생의 그럴싸한 선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이 받아온 김을 담담하게 자랑하던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가.


딸이 앞으로 무엇이 될지 제대로 밥벌이는 하고 살지 누구보다 걱정했을 거면서 당사자인 나를 헤아리느라 하고픈 말과 솟아올라오는 감정을 수도 없이 집어삼켰을 엄마의 엄청난 인내가 바로 딸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을 알았다. 나도 사랑 때문에 엄마가 조금 더 넉넉하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길 바라며 욕심을 부렸지만 아직 엄마를 따라가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 뒤 우리가 사는 지방 광역시에는 입지 좋은 동네에 5천 세대에 육박하는 브랜드 아파트가 분양을 했다. 청약 통장을 가진 시민 3명당 한 명이 신청을 했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간 딸이 거듭 설득을 한 것이 통한 것인지 웬일로 신청을 하셨다고 한다. 당첨발표가 나던 날, 내 일처럼 기다렸지만 역시나 행운은 우리 몫이 아니었다.

“내 평생 살며 거저 오는 운은 내 몫인 적이 없다.”

약간은 기대를 품었던 듯 아쉬움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으며 엄마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날 이후, 내 기준대로 부모님이 잘 살기를 바라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엄마의 생각이 바뀌어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겠다. 그간 경험으로 쌓은 것들을 동원해 엄마의 결정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고작 아파트가 뭐라고 엄마의 남은 시간을 내 멋대로 계획하며 지나온 삶을 아파트 값으로 매기지 않기로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흔들리면서도 딸을 끝까지 믿어준 엄마의 마음을 이젠 돌려드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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