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민음사>를 읽고.
네루다의 바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문학작품보다는 영화 ‘일 포스티노’로 먼저 다가온 작품이다.
오래전, 시노래모임 ‘나팔꽃’ 공연 때 도종환 시인이 자신의 시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시와 사람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좋은 작품의 예로서 영화 ‘일 포스티노’를 추천해 주었다. 유명한 시인과 한 우편배달부의 아름다운 우정이야기라고, 시인은 ‘네루다의 바다’ 앞에 서 있는 듯,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목소리는 투명하게 진동했다. 그런 시인의 모습은 그대로 내게 시가 되어 ‘일포스티노’는 언젠가 한 번은 꼭 보고 싶은 ‘시’를 품은 영화였다. 그런 ‘일 포스티노’를 우연히 서가를 정리하다가 한 권의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이름으로, 진한 바다내음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내 가슴은 기쁨으로 출렁거렸다.
이야기의 배경은 칠레의 이슬라 네그라. 시간이 멈춘 듯 나태함과 왁자지껄함이 가득한 바닷가의 작은 섬마을이다. 이런 작은 섬에 위대한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가 휴양차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리오는 어부를 아버지를 둔, 그러나 어부가 되고 싶지 않은 치기어린 젊은 청년이다. 이런 마리오가 수신인이 단 한 사람뿐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취직하게 되면서 ‘시’에 눈뜨게 된다. 단순한 우편배달부와 수취인의 관계에서, 순박한 마리오의 질문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메타포, 그게 뭐죠?”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파블로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마리오는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에 귀 기울이며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노력하게 된다. 아름다운 영혼의 개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마리오에게 시가 선물처럼 찾아오게 된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베아트리체라는 아름다운 처녀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날마다 그녀에 대해 시를 쓰고 들려준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마리오의 영혼을 시의 본질속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게 하는 마법의 열쇠로 작용한다. 흐르는 시간속에서 시인의 메타포는 그대로 마리오의 삶속으로 들어가 삶의 본질에 눈뜨고 영혼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슴으로 ‘메타포’를 인식하게 된 마리오가 자신이 살고 있는 칠레의 현 실상을 파악하게 되고, 민중의 언어로서 ‘시’를 표현해 낼 때의 그 감동이란, 시와 삶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순수한 본질로서 다가와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된다.
이 작품을 쓴 안토니오 스카르메타(1940년~ )는 위대한 시인인 네루다가 누구와도 편하게 이야기하는 친근한 성격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을 발표(1985년)하기 전에는 이 작품을 자신이 직접 감독하고 배우로도 출연해 영화로도 만들었다 하니, 작가의 이 작품에 대한 열정을 가히 짐작해 볼 만 하다.
경계가 사라진 바닷가를 앞에 두고 소박한 시어를 건넬것만 같은 파블로의 사진이 담겨있는 책을 덮는 순간, 내 가슴은 갓 잡아올린 한 마리 물고기처럼 생생하게 파닥거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위대한 만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에게 ‘위대한 만남’이란 다름아닌, 자신안의 어두움을 스스로 밝힐 수 있도록 내적인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만남을 말한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우연한 만남’이 ‘위대한 만남’으로 싹트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시노래모임 나팔꽃과의 만남이었다. 아주 오래전, ‘꽃피는 5월’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싸늘했던 어느 날 오후, 친구와 공원을 거닐다가 우연히 시노래모임 ‘나팔꽃’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추운 날씨에 몇 되지 않은 관객으로서 덜덜 떨면서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시노래속에 담겨있는 근원적인 그리움의 감정들이 내 무의식을 건드렸던 것 같다. 그 때 이후로 ‘시마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으며 주위의 사물에 대해서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도 ‘메타포’가 찾아들었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물음, ‘나를 나답게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함...’
마리오처럼 삶이 시가 되진 못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나팔꽃’ 꽃그늘에 머물다 보니 내 마음에도 어느새 나팔꽃을 닮은 작은 시마음이 넝쿨지고 있었다. 가끔식 일상에 지쳐 피곤해 질 때면,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팔꽃’ 향기를 맡으며 힘을 얻는다.
나팔꽃 / 김현성
아침에 나의 머리맡에
부지런한 나팔꽃 인사하지
나를 위해 그대 빵을 굽고
방안 가득 커피향이 좋아
사는 날 가끔 힘이 들 때
망설이던 눈물 흘려도 되
하늘 향해 뻗는 나팔꽃 봐
마음까지 하늘에 닿겠네
이른 아침 창밖을 봐
높이 나는 새들 얼마나 힘찬지
또 밤새 서 있는 푸른 나무들 좀 봐
이른 아침에
<김현성 시집 '그대 어서 와 그리움 나누고 싶다'에서>
삶의 ‘메타포’에 한번이라도 물음표를 가져 본 사람이라면, ‘시’의 본질에 느낌표를 가져보았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읽어보아도 좋을 문학작품이다. 그리고 한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말해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 시노래모임 나팔꽃 : 작게, 낮게, 느리게
'나팔꽃'은 1999년 봄, 시인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유종화와 음악인 백창우 김원중 배경희 김현성 홍순관 류형선 이지상 안치환 이수진 등이 모여 만든 시노래 모임입니다. 시와 노래의 만남은 디지털 시대를 맞아 변방으로 밀려나던 시가 새롭게 존재 의의를 찾으며 대중을 만나는 작업이며, 신세대 문화의 홍수 속에서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고 있는 노래가 새로운 시정신으로 무장하여 서정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시와 노래는 한 몸, 시는 시집 밖으로 걸어나와 자연과 인간의 친구가 되는 노래가 되어 우리 삶 속에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나팔꽃 소개글-홈페이지에서 데려옴)
아쉽지만 현재는 '나팔꽃' 활동이 잠시 멈춰있다.
2012년 2월 12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