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황선미 글, 사계절
2003년 어느 봄날, 도서관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창밖으로는 목련 나무가 커다란 하얀 꽃들을 달콤하게 피워 내고 있었고, 도서관은 부드러운 적막으로 가득했다. 열린 창문으로는 목련 나무가 그림자로 길게 드리워져 몇 개 되지 않은 작은 서가에 내려앉기 시작했고, 달콤한 향기는 이책 저책을 건드리며 날아다녔다. 달콤한 향기에 몇몇 책들이 기지개를 켜는 듯도 보였지만, 나른함에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때 서가의 한구석에서 오랜 잠에 빠져 있던 한 권의 책이 꿈틀거렸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책이었다. 책이 잠시 흔들거리는 듯싶더니, 암탉 한 마리가 터벅터벅 책에서 걸어 나와 도서관을 거닐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이 암탉의 마음에 들었다. 그때 암탉의 눈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입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 이번에 새로 온 사서구나!’ 암탉은 생각했다. 졸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마당에서 햇살을 받으면서 졸고 있을 때의 모습과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심심했던 도서관이 왠지 재미있어질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암탉은 그 여자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암탉은 재빠른 걸음으로 창밖의 목련 나무에게 다가가더니, 나뭇잎 하나를 저 여자 곁으로 날려 줄 수 없는지 부탁했다. 목련 나무는 좀 당황스러워하는 듯했지만,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목련 나무는 바람을 기다렸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을 때, 목련 나무는 큰 숨을 불어 여린 나뭇잎 하나를 졸고 있는 여자의 머리맡으로 날려 보냈다.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뭇잎 하나가 옆에 놓여 있었다.
“어, 나뭇잎이네. 어디서 날아왔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 곳에서 눈이 멈췄다.
목련 나무의 그림자 끝에서 삐죽 나온 한 권의 책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심심해. 오늘은 아무도 안 오려나 봐.”
여자는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서가에 삐죽 나와 있는 책으로 다가갔다.
“책이 왜 나와 있을까?” 책을 제 자리로 밀어 넣다 말고, 여자는 웬일인지 책을 빼 들었다.
암탉은 표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여자를 보면서 왠지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과연 내 이야기를 읽어 줄까?’ 한동안 자기 이야기를 읽어 주는 사람이 없어 쓸쓸했던 암탉은 여자가 꼭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 주기를 바랐다. 암탉은 창가의 목련 나무 그림자에 앉아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책을 펼치자, 아카시아 꽃내음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꽃향기가 나는 책이라니, 멋지네.” 여자는 웃으면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입에서 ‘잎싹’이라는 이름이 불려 나왔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기다리고 있던 암탉은 기쁜 마음에 벌떡 일어나다가, 하마터면 창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잎싹은 나는 듯이 걸어가 책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책 속의 글씨가 잠시 흔들렸지만, 여자는 자신의 눈이 피곤해서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읽어나갔다. 따돌림당하는 신세였지만, 안전한 마당을 나와 헤매는 잎싹을 보면서 여자도 함께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아, 무서운 족제비를 만나면 어떡해. 잎싹 힘을 내!’
여자의 어깨는 가끔 숨이 가뿐 듯 오르락내리락했고, 가끔 눈자위로 손이 올라가기도 했다. 언제나 자신의 알을 꼭 품고 싶은 소망을 가졌던 암탉 잎싹이, 우연히 발견한 ‘알’을 기적처럼 소중하게 품는 모습을 보면서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면서 잎싹의 간절한 소망을 응원했다. 알을 품은 잎싹을 지키다가 눈앞에서 족제비에게 죽임을 당하는 청둥오리 나그네를 보면서 여자도 함께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고, 알에서 갓 태어난 아기 오리를 보면서는 함께 감동에 젖어 눈물지었다.
"잎싹은 날개 밑에 아기를 품고 아카시아나무 아래에 엎드렸다."(p.92)
여자의 눈에는 어느새 잎싹의 모습 위로 엄마의 다정한 모습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바람에라도 날아갈세라 언제나 자신을 꼭 안아주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
“마당으로 가지 말고 저수지로 가.”라는 청둥오리 나그네의 말을 따라, 저수지로 간 잎싹은 많은 어려움을 만나면서도 엄마의 강한 사랑으로 아기 오리 초록머리를 잘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여자는 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물 한 방울이 잎싹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잎싹의 마른 깃털이 촉촉해지면서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그 따뜻한 깃털 위에 얼굴을 묻는 아기 오리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초록머리가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청둥오리 무리를 따라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잎싹을 위로하고 싶었던 여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잎싹, 힘을 내.”
그 소리는 여자의 눈물 자국이 묻어 있는 책 속으로 스며들더니, 아카시아 꽃잎을 타고 잎싹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잎싹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랑하는 내 아기 초록머리를 이렇게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해.”
잎싹의 마음이 여자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무리와 함께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는 초록머리를 보면서 마음 한곳이 무너지면서도, '초록머리가 있어 행복했다'는 잎싹 앞에 배고픔에 눈이 번득이는 족제비가 다가가는 것을 보면서 여자의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한 가지 소망이 있었지.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그걸 이루었어. 고달프게 살았지만 참 행복하기도 했어. 소망 때문에 오늘까지 살았던 거야. 이제는 날아가고 싶어. 나도 초록머리처럼 훨훨,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p.189)
여자는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면서도 잎싹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잎싹, 너의 소망은 왜 이렇게 슬프게 이루어져야 하는 거야. 이런 아픔을 어떻게 사랑으로만 이겨낼 수 있는 거야.” 이런 여자의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아, 미처 몰랐어! 날고 싶은 것, 그건 또 다른 소망이었구나. 소망보다 더 간절하게 몸이 원하는 거였어.”(p.189)
잎싹의 터지듯 울먹이는 소리에 여자의 마음에서도 알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잎싹, 나도 날고 싶어’
배고픈 새끼들을 위해 잎싹을 사냥하는 족제비에게 온전하게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잎싹을 보면서 여자의 가슴 한 곳도 붉게 무너져 내렸다. 무거웠던 육신의 몸을 벗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잎싹을 보면서 여자는 오열했다.
평생 자신을 고이고이 곱게 지켜 주고 사랑으로만 안아주던 엄마의 사랑도 함께 쏟아져 내렸다.
엄마의 사랑이란 이렇게도 깊고 아름답게 슬픈 것인가.
여자는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오래도록 울었다.
어느새 창가의 목련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잎싹도 오래도록 울먹이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리는 것을 느꼈다. 초록머리가 자신의 품을 떠나 자신의 세계로 떠나는 것을 지켜봤을 때의 그 허전하고 슬펐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의 목련 나무에게 가더니, 눈물로 흐릿해진 눈으로 하얀 꽃망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 잎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잎싹, 너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멋진 엄마였어. 나도 너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어.”
여자는 잎싹과 함께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한 나무 아래 서 있는 상상을 한다.
그때 도서관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면서
“정애 선생님, 도서관 아직 안 끝났죠?” 묻는다.
여자는 웃으면서
“네.” 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책상으로 가 <마당을 나온 암탉> 책을 소중하게 안아서, 도서관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는다.
여자는 자리에 앉더니 하얀 노트에 또박또박 글을 적는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 잎싹이라니…….
동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었다니, 이렇게 마음 아픈 글이었다니. 머리에 돌덩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란 심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나의 잎싹, 엄마의 사랑을 이렇게 휘몰아치는 감동으로 나를 울게 만들다니….
친구와 약속이 있어 늦게 집에 가는 날이면, 항상 버스 정류장에 붙박이처럼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세상에서 제일 넓은 품을 가진 우리 엄마를 닮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엄마 잎싹.
잎싹, 이제부터 내 마음 풀밭에 살면서 너의 그 향기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지 않으련?
나의 잎싹, 나의 친구. 나의 소중한 이름 잎싹.
황선미 선생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이렇게 아름다운 잎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걸까.
잎싹은 또박또박 쓰이는 글을 읽으며 웃음을 짓는다.
도서관은 목련꽃 향기로 가득하다.
정애 씨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엄마를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8살~9살 무렵이었을까요? 항상 엄마가 어디 가실 때마다 따라다니곤 했는데, 그날도 아빠 일로 출장 가시는 엄마를 따라나서는데, 아빠가 못 가게 붙잡는 바람에, 정애 씨는 꽤 넓었던 옥상을 30분 넘게 떼굴떼굴 구르면서 목 놓아 울었답니다.
정애 씨, 하얀 노트를 채우고 전화기를 듭니다.
“엄마, 뭐 하고 있었어? 갑자기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나? 이따가 친구 만나기로 했어. 뭐라고? 알았어. 늦게까지 놀지 않고 빨리 집에 들어갈게. 사랑해 엄마. 하늘만큼 땅만큼”
2021년 1월 00일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