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저물어가는 12월이다. 2025년 새해가 바로 코앞이다. 항상 이맘때면 마음이 급하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꼬이지 않게 잘 매듭지어야 하고, 빛나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컴퓨터 화면이 세상 전부이기도 한 것처럼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때가 있다. 도서관에서 쫓기듯 일을 하고 있을 때, 어르신 한 분이 살며시 다가와 귤 하나를 손에 쥐여주신다. “먹으면서 해.” 잠시 따뜻한 휴식이다.
우리 도서관에는 해마다 시니어 봉사 어르신들이 오셔서 거의 일 년을 함께 보낸다. 여러 해를 함께하다 보니, 어르신들이 꼭 집안 어르신인 듯 편안하고 다정하다. 어르신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꼭 먼저 나를 챙겨주신 후에 서로 다과를 나누신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어르신들의 사랑스러운 손녀가 된 듯한 기분에 빠져들기도 한다.
11월부터 ‘도*도* 시니어 독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홍보물을 보고 자녀분이 어머니를 모셔 오기도 하고, 도서관 기존 프로그램에 참여하셨던 어르신과 시니어 봉사 어르신들도 함께 참여하셨다. 첫 모임 책은 권정생 작가의 그림책 『강아지똥』으로 시작했다. 책을 읽어 드린 후에 준비한 발문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르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에는 민들레꽃처럼 강인하면서도 깊은 여운이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한 어르신은 모임 후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마침 권정생 작가의 일대기가 나와서 정말 몰입해서 보셨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민들레꽃처럼 환하게 웃으시면서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뜬 소녀처럼 해 주셨다.
“정말 그 작가는 어렵게 살면서도 욕심이 없더라고.”
12월 독서 모임에는 소녀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그림책 『포인세티아의 전설』로 준비했다. 어르신들과 선물과 나눔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가 크리스마스 꽃으로 알고 있는 ‘포인세티아’의 유래를 말해주는 책이다. 나에게 포인세티아는 아주 어렸을 때, 언니의 초록 모자에 달려있던 빨간 꽃 모양의 장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포인세티아를 보았을 때는, 이파리인지, 꽃인지 애매한 강렬한 붉은 잎들이 참 신기했다. 이렇게 독특한 모양의 식물이 크리스마스를 대표하게 된 데에는 멕시코에 살았던 루시다라는 소녀에게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그림책을 쓰고 그린 토미 드 파올라는 칼데콧 아너 상, 뉴베리 아너 상, 스미스손 상 등 많은 상을 받은 어린이책 북 아티스트이자 작가이다. 작가는 한 아이가 크리스마스에 아기 예수에게 풀을 선물했다는 포인세티아 전설을 듣는 순간, 이 특별한 이야기를 책으로 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루시다는 멕시코의 산간 지역에서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작은 여자아이다. 루시다는 날마다 당나귀들도 돌보고, 엄마 일도 도와드리고, 동생들도 돌보면서 바쁜 하루를 보낸다.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루시다의 가족은 일요일이면 꼭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린다. 루시다의 어머니는 성당 신부님에게서 크리스마스에 아기 예수님이 덮을 담요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담요를 만드는 엄마 옆에서 루시다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아기 예수님이 덮을 담요를 만드는 데 자신도 한몫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엄마가 큰 병을 앓게 되고, 아기 예수님의 담요는 완성되지 못한다. 루시다는 자신의 잘못인 양, 너무 슬퍼서 크리스마스가 되었는데도 성당에 가지 못하고 숲속에서 울고만 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 루시다에게 말을 건넨다.
“루시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 때문에 아름다운 거란다. 네가 뭘 가져가든지 아기 예수님은 좋아할 거야. 마음으로 주는 선물이니까.”라는 말을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 말을 들은 루시다는 주변에 무더기로 자라 있는 풀을 한 아름 꺽어 안은 후에 곧장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풀들을 아기 예수님께 선물로 드리고, 루시다는 그 옆에서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루시다의 주변에 있던 초록 풀들에서 마치 빨간 별들이 쏟아져 나온 듯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루시다의 간절한 마음이 아름다운 붉은 꽃으로 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루시다의 간절한 마음이,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특별하게 만나는 빨간 별의 꽃, 세인세티아를 탄생하게 하였다. 멕시코에서는 포인세티아를 ‘성스러운 밤의 꽃’이라는 의미로 ‘라 플로르 데 노체부에나’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그림책을 읽어 드리고, 어르신들과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기억을 나누었다. 어르신들의 어린 시절은 물질적 어려움은 있었을지라도, 세상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행복하셨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어느새 작은 꼬마 아이가 되어 들판을 뛰어다니고, 초록 이파리를 한 아름 안아 든, 볼이 빨간 소녀가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진짜로 겨울이면 볼이 빨간 아이였다.
그중에서 시니어 봉사자이기도 하신, 한 어르신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군대를 다녀오신 후에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었는데, 밤 중에 웬 청년들이 집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하셨다. 그때는 그저 신기했던 노랫소리가,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의 신앙으로 이끌어 준 수호천사의 나팔 소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하셨다. 현재, 나이 들어 몸이 아프고 나니, 모든 것에 겸손해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나는 이 어르신께 따뜻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나에게는 최근까지도 20년 이상을 사용한 업무 도장이 있었다. 인주를 꼭 묻혀야만 하는 번거로운 도장이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이런 내가 많이 불편해 보였는지, 올여름에 직접 서울에 나가셔서 도장을 파와 선물해 주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에 감격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편리한 도장에 사용할 수 있는 리필잉크를 또 선물해 주셨다. 붉은빛이 없어져 가는 희미한 도장으로도 열심히 찍어대는 나를 보면서 안타까우셨나 보다. 어르신의 세심한 마음 쓰심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12월 독서 모임이 끝난 후, 도서관에 크리스마스 환경 준비를 하면서 포인세티아를 새 식구로 맞아들였다. 도서관에 막 들어서면 빨간 별꽃, 포인세티아가 보인다. 역시나, 어르신들은 포인세티아를 보자마자 예쁘다고 하시면서 한 말씀씩 하신다.
“아, 이 꽃이 바로 포인세티아래요.”
“정말 별꽃처럼 생겼네.”
책에서 보던 포인세티아를 도서관에서 직접 보니, 정말 좋다고 하신다. 그런 어르신들의 웃음을 마주하면서 붉은 별꽃도 이파리를 더 붉게 물들인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새해 소망 한 가지가 떠오른다. 내년에도 이 따뜻한 어르신들을 도서관에서 계속 뵙고 싶다는 소망이 생겨났다. 어르신들, 내년에도 우리, 도*도*에서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