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라는 연합: 별로인 우리는 친구가 고맙다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를 버려.
우린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해.
- 양미숙 -
양미숙의 말처럼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세상은 공평함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약동하는 생명력에만 관심이 있다. 공평함을 누리는 양미숙이 아닌,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가려는 양미숙에만 관심이 있다. 세상은 무수히 다양한 사물을 전시한다. 그리고, 무수히 다양한 조건을 타고나는 인간들은 온 세상의 자기화라는 동일한 열망에 불타오른다.
그래서, 남들보다 우월한 조건을 타고나지 못한 양미숙은 고달프다. 하지만, 우월한 조건을 타고난 사람도 자기화라는 열망이 있는 한, 시간의 고문 아래 놓여 있는 한,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보다 더 크게 확장하려 한다. 하지만, 확장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패배시켜야 한다. 양보를 위해 태어난 인간은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보다 더 크게 확장하려 한다. 확장을 하려면, 욕망을 실현하려면, 누군가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양미숙에게는 학교 선생님이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다. 남들보다 열심히 살 수 있는 건강이 허락되어 있다. (양미숙은 언제나 건강을 위해서도 노력한다. 그녀는 건강식품이나 건강 의료기기를 달고 산다. 예를 들자면, 손에 들고 필요 부위를 마사지 할 수 있는 소형 안마기, 판초 우의를 입고 뜨거운 수증기가 나오는 상자 위에 앉아 사우나를 즐길 수 있는 장비 등을 이용한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그대로 머무를 수가 없다. 그녀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전교 왕따였고, 교사로 재직 중인 지금도 그렇다. 처음부터 완전히 혼자 힘으로 세계의 자기화를 추진하기는 힘에 벅차다. 연합할 인간이 있어야 한다. 수학여행 기념사진에 얼굴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왕따였던 그녀를 배려한 서선생이 첫번째 연합의 대상으로 보인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녀는 서선생의 친구가 아니라, 이를 넘어선 연인이 되고자 한다. 보다 확장된 세계를 위해서는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어야 한다. (서선생이 여성이었다면 사태가 그 지경까지는 안 갔을 텐데.) 그래서 그 가능성을 위해 온갖 사소한 단서들을 찾아 헤멘다. 술에 취한 서선생이 좁은 승용차 뒷자석에서 양미숙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다가 그녀의 귀를 잠깐 만진 것에서, 서선생이 그녀에게 보낸 업무 관련 메시지(회의 시간에는 졸지 말라는 문자)에 통신사 부가서비스로 인해 덧붙여진 특수 문자에서, 운동장에서 삽질 중인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보러 온 서선생의 '그냥'이라는 한 마디 대답에서,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확보하려 한다.
양미숙은 서선생과 사귀는 중인 이유리 선생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서선생의 딸인 종희와 연합한다. 종희는 부모님의 이혼을 막기 위해, 양미숙은 서선생이 이유리 선생을 잊고 자기를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해, 온갖 계획을 꾸미고 실천한다. 양미숙은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이제는 완전히 인기가 없어진 러시아어를 고등학교에서는 더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어, 중학교로 내려와 영어를 가르치는 그녀는, 이른 아침에는 영어 학원을 다니고, 낮에는 본업인 교사 업무를 하고, 퇴근 후에는 서선생의 아이디로 이유리 선생에게 끊임없이 음란한 메시지를 전송하고, 종희와 공연 준비도 한다.
이 모든 양미숙의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유리 선생은 서선생과 술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양미숙은 이유리 선생의 옷을 입고, 둘 사이를 방해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이유리 선생이 도착하기 전부터 만취해 있던 서선생은 양미숙과 먼저 만나게 되고, 양미숙은 제정신이 아닌 그를 모텔로 데려가 재우려 한다. 하지만, 이유리 선생의 옷을 입었기 때문인지, 그는 양미숙을 이유리 선생이라고 착각한다. 양미숙은 자신이 이유리 선생이 아님을 거듭 밝히며 떠나려 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고, 술에 취한 채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서선생과 결국 동침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서선생과 나란히 침대에 누운 양미숙은 이제 새로운 미래를, 희망을,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머무르고 있으니까, 이 모텔에는 별을 다섯 개 주어야 한다고, 간판은 금으로 만들고, 방 안의 사물들도 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은 공동의 미래를 전혀 꿈꾸지 않는 서선생의 부정으로 이내 부서지고 만다. 답답한 마음에 커튼을 열어젖히지만 그 뒤에는 창문이 아닌 벽이 있다. 가망 없는 그녀의 미래처럼. 그래서 다시 그녀는 서선생의 얼굴을 보며 일갈한다. “못~생겨 가지고는, 그래도 난 재재재작년 그날, 티코 안에서는 진실했어!”
가능성이 없는 미래는 못생겨진다. 우리는 희망찬 미래는 금으로 장식하고, 절망적인 미래는 못생긴 것으로 취급한다. 이제 양미숙은 재재재작년의 진심을, 과거에 품었던 희망을, 벅차 올랐던 마음을, 아쉽지만 뒤로한 채 새로운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피부과 의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양미숙의 긴 이야기에 질린 의사는 몰래 이사를 가고 난 뒤였다.)
겪어보지도 않고 아는 척 하지마.
- 양미숙 -
양미숙은 서선생과 동침한 사실을 들키게 되어 궁지에 몰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는 할 말이 있다. (상대방이 듣지 않아도 할 말은 한다. 피부과 의사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을 전부 다 이야기한다. 영어학원에서는 학교에서 어떤 과목을 가르치고 있냐는 아픈 질문에 갑자기 반말로 당신은 누구냐고 대꾸한다. 수업에는 전혀 관심 없이 뛰놀며 노니는 학생들 틈에서는 러시아어의 인기 하락이 천민자본주의 때문이라고 허공에 대고 일갈한다. 양미숙은 우리의 심경을 대변한다. 의사들은 증상에 시달리는 환자 위에 군림하지만, 정작 증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 일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어떤 전문가들은 불필요한 영어를 남발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혼란에 휩싸이는 우리 일반인들을 무지의 굴욕 상태로 몰아붙인다.)
그녀는 세상이 공평하리라는 기대가 없다. 행복은 저절로 얻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은 쉽게 얻는 행복도 자신에게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별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왔다. 영화 '더 리더'에서 나치에 부역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케이트 윈슬렛이 자신의 과거가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강변하다가 격앙되어 탁자를 치며 분노한 것처럼, 양미숙도 하소연한다.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인간은 누구나 시간의 고문에 마음이 문드러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하소연할 나름의 분량이 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끼친 자조차도 나름대로 하소연할 내용이 있다. 시간에 시달리며 노예 생활을 한 우리는 그래서 모두 억울하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화하여 내가 겪은 시간의 고통을 속속들이 알게 하고 싶지만, 거기까지는 불가능하다. 거기까지는 자기화의 범위가 아니다. 아무리 자기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자기 스타일로 온 세상을 채우고, 황금종려상과 노벨 문학상을 열 개씩 받는다 해도, 어떤 타인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알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억울하다.
당신 누구야.
- 양미숙 -
합리적인 서선생의 부인은 지혜로운 판결로 갈등을 결론짓는다. 서선생 부부는 화해하고, 양미숙은 모두 잊고 새출발을 결심했음을 선언한다. 때마침 교내 방송에서는 양미숙과 종희의 공연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다. 영화에서는 ‘고맙습니다’와 ‘천만에요’같은 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분만 나온다.
왕따였던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연합을 한다. 종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양미숙이 몰래 이사한 피부과를 찾아갈 때도 동행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에게 고맙다고 인사해야 한다. 그들의 공연은 고맙다는 인사들이 이어지다가, 왠지 떠나고 싶지 않다는 대사,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냐는 대사로 마무리된다. 친구가 생기고, 희망이 생긴 사람은 이제 세계를 자기화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떠나고 싶지 않게 된다. 인생은 희망과 절망이 결정한다.
온 세상의 자기화라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인간은, 혼자서는 세계의 자기화를 충분히 이룰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인간과 연합해야 한다. 이것은 삶의 기본 조건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우정이 있어야 한다.
비록 우정이란 자기화에 방해가 되면 언제라도 저버릴 수 있는 것이지만, 그전까지는 우리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정을 저버린 친구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연락을 끊은 친구에게도, 지난날 우리에게 희망을 선물해 주었음을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의, 미래의 노예다. 자기화라는 지상 과제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우정을 저버린 친구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연락을 끊은 친구도, 나와 마찬가지로 미래라는 주인에게 혹사를 당하며 살아온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