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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호랑 Feb 06. 2019

[연합] 러브레터

사랑이라는 연합

히로코는 죽은 이츠키를 잊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은 다시 이츠키와 함께 지내기를 기원한다. 불가능한 미래를 맞이하기를, 과거로 다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반지를 들고 나와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지친 여자가 결혼해 달라고 말하게 하는 남자인 이츠키를, 히로코는 잊지 못한다.

그런 마음은 어떤 열망을 낳는다. 인간은 현실 그대로의 세계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마음속 세계가 있다. 마음속 세계는 절망에 빠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기억을 조작한다. 하지만, 어떤 마음의 열망은, 분노는, 원한은, 기억된 과거를 조작하는 것만으로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침묵의 시선’은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 노부부는, 아들을 죽인 사람들과 한평생을 한동네에서 살아 왔다. 백 살이 넘어서 이제 둘째 아들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은, 첫째 아들이 죽은 다음 날부터 이가 하나씩 빠졌다고 한다. 부인은,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학살의 생존자를 만나자마자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마음속에서, 아무리 기억된 과거를 조작한다 해도,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는 없다. 조작에는 한계가 있다. 마음속 세계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그 마음의 주인은 현실 세계에서는 미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마음은, 미래를 완전히 빼앗긴 마음은, 고통을 안고 가거나 실성한다.
죽음은 미래를 완전히 빼앗는다. 미래를 완전히 빼앗긴 사람은 누구보다도 고통스럽다. 자식이나 연인은 자신의 미래를 위한 연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다. 자손을 통한 영원한 자기 확장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도 이츠키는 중요한 연합의 대상이지만, 부모나 연인에게 중요한 만큼은 아니다.

그래서, 히로코는 누구보다도 고통스럽다. 이츠키가 죽은지 삼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츠키를 그리워한다. 이츠키의 졸업 앨범에서 발견한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서까지 위안을 얻고자 한다. 히로코의 마음은 불가능한 미래가 현실이 되기를 원한다. 히로코는 시게루와의 연애라는 합리적인 미래를 선택했으면서도, 이츠키를 사랑하던 습관, 이츠키와의 미래라는 불합리한 염원을 버리지 못한다.

우연히도 이츠키는 중학교 시절, 이름이 똑같은 여학생과 한 반이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히로코는 이츠키군이 아니라 이츠키양의 주소로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히로코와 이츠키양은 편지를 교환하는 사이가 된다.

이츠키양은 오래 전 이츠키군과의 일화를 다시 떠올린다. 역시 이츠키군은 그때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츠키양의 기억 속에서, 그는 처음부터 (정작 이츠키양 자신은 전혀 몰랐지만)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이름이 같다고 놀림을 받을 때, 처음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그는, 이츠키양이 눈물을 보이자 분노한다. 평소에는 이츠키양에게 말 한 마디 걸지 않다가, 그녀가 뒤바뀐 시험지를 돌려달라고 하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능청스럽게 시험 답안을 맞춰 보며 시간을 끌기도 한다.

이츠키양은 지금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츠키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창가에 기댄 채 미풍에 흩날리는 커튼 뒤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응시한 적이 있다. (이츠키역을 맡은 배우가 미소년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이 영화가 그렇게 아름답게 기억될 수는 없었겠지.) 그리고, 이츠키군이 발목을 다쳐서 공식적으로는 출전하지 못하게 된 육상 경기가 열렸을 때, 그가 트랙 바깥에서 시합에 참가한 선수들과 함께 뛰다가 넘어지는 장면을,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로 분명히 목격했으면서도 모른 척한 적이 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는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그에 대한 호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그에게 열망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츠키군은 평소에는 학교 생활에 성실하지도 않고, 시험 성적도 형편 없지만, 그 경기에서 만큼은 불가능한 것에 도전한다. 부러진 다리로 멀쩡한 선수들을 패배시키려 한다.
이츠키군은 뻔한 결과, 예상된 절망을 극복하려 한다. 이츠키군은 체념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의지는 폭발할 듯이 뻗어나간다. 이츠키양은 그러한 의지가 지향하는 미래를, 기꺼이 함께 바라보고 싶어진다. 이것은 명백한 사랑이며, 두 사람을 놀리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같은 종류의 사랑이다. 그래서, 이츠키양은 유치한 아이들 장난에 동참할 수 없기에, 자기 감정으로부터 도망친다. 모른 척한다. 이츠키양은 사랑을 느낄 때마다 거부하기에, 그 사랑을 인식할 수가 없다.

이 영화에서, 히로코, 이츠키양, 이츠키군 외의 인물들은 대부분 다소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너무나 애틋하고 예쁜 영화인데도 코미디 영화 못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영화가 시종일관 무겁게 흘러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런 성격을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츠키군과 이츠키양의 고상한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성인이 된 이츠키양의 성격은 매우 쾌활하게 묘사되는데, 이는 히로코와 대비시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이츠키양과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인물은 이츠키양에게 이츠키군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던 사나에다. 이츠키군과 이츠키양이 사나에처럼 연애를 위해서라면 개그 캐릭터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친구들의 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가까워지려고 했었다면, 우리에게는 애틋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미래와 가깝지 않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아름답고 젊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너무나 젊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기에, 타협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거듭되는 실패를 맛본 뒤에, 작은 성취에도 만족할 줄 알게 된 중년이 아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어린 학생들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곳을 바라보는 성격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의 놀림에 아랑곳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놀림에 동참하는 개그 캐릭터가 되기는 싫었을 것이다.
개그 캐릭터는, 고양된 어떤 곳을 바라보는 그들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가까워질 수 없다. 만약, 이츠키군이 살아 남아서, 중장년이 된 두 사람이 재회했다면, 친구들의 놀림을 유머로 받아 넘기며 연애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는 법을 모른다. 그들은 여전히 과묵하고, 여전히 아름답고 고상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들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남녀가 연합할 수 있다고 믿는 유치한 아이들 장난 가운데에서 원대한 미래를 꿈꾸기를 원치 않는다.

두 사람은 여전히 가까워질 수 없었고, 그 와중에 이츠키양의 아버지가 고열로 사망한다. 몸져 누운 어머니를 대신 해서 집안 일을 도맡아 하던 이츠키양은 방학이 끝나도 등교를 할 수 없었다.
그때, 이츠키군이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을 대신 반납해 달라며 이츠키양의 집을 찾아 온다. 그녀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하면서 목이 메이는 것을 숨기지 못하며, 이츠키군은 그녀가 절망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처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던 그가, 이츠키양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다음에야, 이름이 같다고 놀려 대던 반 친구들에게 분노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랑은 대를 이어 영원히 자기 세계를 확장하기 위한 연합이기에, 어떤 연합보다도 구성원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강하다. 그래서 과묵한 그도 어떻게든 그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조의를 표하는 인사를 한다. 그런 마음은 전해진다. 이츠키양은 밝게 웃는다.
그때는 아름답지 않은 개그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친구들도 주위에 없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있었고, 그녀는 이제 그를 향해 사랑의 표정을 마음껏 지어보여도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사람은 그림을, 다른 사람은 웃음을, 주고 받는다. 영화 ‘물랑루즈’에서 이완 맥그리거와 니콜 키드먼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노래했던 때처럼,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크리스챤 베일이 여인과 미소를 주고 받음으로써 사랑을 확인했던 때처럼,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신랑을 위해 결혼식 주례 내용을 수화로 동시 통역하는 신부가 웃음지을 때처럼, ‘색계’에서 탕웨이는 노래와 춤을 선사하고 양조위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면서 사랑을 확신했던 때처럼, 이츠키군과 이츠키양은 마음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어려서 남녀 간의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 어려서, 어린 만큼 그들 앞에 무한히 펼쳐진 미래가 너무나 벅찼고, 어떤 어휘도 벅찬 미래로 가득한 마음을 온전히 표현해 내지 못했기에, 그들은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마 이츠키군은, 부러진 다리로 멀쩡한 선수들을 극복하려 할 만큼 열망에 차올랐던 그는, 그렇게 강한 열망 만큼 원대하고 완전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고 가까운 미래로 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게 된 그는, 이츠키양과 단 둘이 만났을 때도 그런 사정을 얘기하지 못한다.
이츠키군과 사랑으로서 연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등교한 그녀에게 이츠키군의 전학 소식은, 연합에 대한 배신이자 일방적인 연합 파기 선언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츠키양은 애꿎은 꽃병을 박살낸다. 미래를 잃고 상처받은 마음은, 절망한 마음은, 어떤 것을 파괴해야만 진정되는 경우가 있다.

약혼자와 사별한 히로코 만큼은 아니지만, 이츠키양도 이츠키군과의 미래를 잃은 적이 있다. 그래서, 고열로 쓰러졌다가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난 그녀는, 이츠키군이 생을 마감한 산 앞에서 그의 안부를 물으며 절규하는 히로코와 똑같은 대사를 작게 되뇌인다.
어쩌면 그녀는 이츠키군이 돌아가신 아빠 대신 의지할 수 있는 남성이 되리라고 기대했기에 상심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아빠의 죽음과 이츠키군과의 이별이라는 두 가지 절망을 동시에 안고 가는 것은,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나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꽃병을 박살 낸 자기 마음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녀는 이츠키군을 응시하고도 응시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처럼, 그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히로코와 이츠키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분명히 같은 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점이다. 히로코는 이츠키양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결과적으로는 이츠키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이츠키군만을 생각했다면 시게루와의 연애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로코는 어디까지나 시게루와 공동의 미래를 개척할 것이라는 의지 아래 이츠키군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려 한다.
그녀의 마음은 시게루와의 연합이라는 최대값을 항상 가리키고 있었다. 다만, 지난날 이츠키군과의 습관적인 행복이 너무나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어서, 최대의 가능성을 향해 전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생명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 본질이기에, 숙고하고 혁신하기에 앞서 습관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러브레터’는, 한 여성이, 중학교 시절에 한 남학생을 좋아했는데, 사실은 그 남학생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표면적으로는, 이미 잊은 과거를 다시 떠올림으로써 행복한 추억을 발견해 나가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 즉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츠키양은 아빠의 죽음, 이츠키군과의 이별이라는 두 가지 절망을 견디기 위해서 이츠키군과의 시간을 잊기로 한다. 한꺼번에 닥친 두 가지 절망을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다. 집에만 있어도 아빠의 흔적은 곳곳에 보였겠지만, 흔적 없이 떠난 이츠키군에 대한 마음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기에 보다 쉽게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츠키양은 히로코에게 편지를 받을 때까지 이츠키군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힘든 시간을 견디기 위해, 그리고 지난 시간을 더 잘 잊기 위해 다른 사람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학생 무렵에는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현재 시점에서는 쾌활한 여성이 되어 있다.) 할아버지가, 이름이 똑같았던 남학생이 너의 첫사랑이냐고 물었을 때조차 그녀는 너무나 천진한 얼굴로 아니라고 답한다. 하지만, 후배 여학생들이 찾아 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도서 대출 카드 뒷면의 그림을 발견함으로써 이츠키군에게 사랑받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 이츠키양은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노년에 깨달았다면, 이츠키양은 다른 표정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 만큼의 벅찬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때에서야 그 시절 자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각난 것 같다. 그래서 히로코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추억은 미래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비록 과거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졌던 일은,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오로지 기대뿐인 희망보다는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 그래서 추억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특히나, 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좀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 세계 확장의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려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자기 세계 확장을 시작한다. 사춘기 이전의 아이는 성애를 바탕으로 한 연합에 관심이 없다. 사춘기가 되서야 연인이라는 강력한 연합을 결성하려는 남자나 여자가 된다. 동시에 부모로부터도 독립하려 한다. 불과 몇 년 후면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모든 면에서 세계 확장이 가능하다. 그래서 젊은이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추억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미국 드라마 ‘웨스트월드’에서 석양이 내려앉은 장엄한 광경을 뒤로 하고, 자기만의 미래 따위는 꿈꿀 수 없는 안드로이드인 지미가, 마찬가지로 안드로이드인 돌로레스를 품에 안으며 언젠가 우리가 꿈꾸는 날이 올 거라고 말할 때의 ‘언젠가’는 ‘추억’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은 희망이 없으면 순간 순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를 긍정하며 살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언젠가’는 미래이고, ‘추억’은 과거를 가리키는 용어지만, 추억은 과거에 이루어진 적이 있으므로 미래에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기 때문에, ‘언젠가’와 ‘추억’은 모두 막연한 미래에 대한 것이다.  

‘러브레터’도 그러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앞서 말했듯이, 추억은 미래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츠키군에게 사랑받았다는 증거가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은 막연한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 된다. 이츠키군이 이츠키양을 그린 도서 대출 카드 뒷면의 그림은, 과거에 사랑받았던 이츠키양이라면 현재에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판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 생각치 못한 반전, 확실한 증거인 도서 대출 카드 뒷면의 그림으로 인해 이 영화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 영화는 추억이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어떤 할리우드 영화보다 ‘러브레터’의 해피 엔딩은 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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