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은 긍지가 없다.
자존감이란, 남들과 자기를 비교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고 발전된 모습을 살펴 봄으로써 스스로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 것이라는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려고 의도한 적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다가 그만 열등감에 빠져 괴로워하곤 합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 봄으로써 자긍심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긍심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고 해도, 저절로 우열을 인식하는 우리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열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엄연히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열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우열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열 관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든 과거를 완벽히 통제하고 기억할 수 없기에, 모든 결과는 우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취는 노력의 결과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 온 사람 자신조차도 언제부터, 왜, 그렇게 해 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업적은 칭찬받아야 하지만, 칭송받을 것까지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자기 자신이 게을러졌는지, 부지런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죠.
모든 아이들은 공부 잘 하는 친구를 부러워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자신이 언제부터, 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 아닐까요.
둘째, 이 세상에서 우열이 사라질 경우, 동물들의 세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인간 사회 만큼은 지금까지 유지해 온 역동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열의 격차, 우월에 대한 열망은 인간 개개인을 넘어 인류 전체를 움직이는 근본 동력이기에,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지독한 생명력을 발산하는 존재로 만들려 했고, 이에 따라 인간은 원대한 목표를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끊임없이 비교하고 선택하는 본성을 지니게 되었죠.
그런데 자연이, 또는 조물주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어요. 자기 욕심 채우는 데에만 급급한 인간들 틈에서 연합과 평화를 선택한 인간이 탄생한 겁니다.
상당히 많은 인간들이 이를 선택했기에, 인류는 우열과 열망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평화라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죠. (자연은 최대한 다양한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끊임없는 비교와 선택의 열망으로 끓어오르는 세상을 감상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연합과 평화마저도 다양한 선택지 중의 하나로써 주어졌던 겁니다.) 굳이 인간의 위대한 점을 찾자면, 이를 선택했다는 점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월한 인간이란, 조물주가 손에 쥐었다가 바닥에 흩뿌린 모래알 중에 우연히 높은 곳에 자리잡은 자라고요.
이것이 세상이라는 시스템의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은 개개인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 무리가 발산하는 생명력의 역동성을 감상하고자 할 뿐이며, 이를 위해서 우열을 인식하는 마음을 우리 가슴속에 심어 넣은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존감이란, 스스로에 대한 긍지가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올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복권에 당첨된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산 복권이 꽝이라고 해서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이죠. 다가오는 시시각각의 순간들을 맞이할 때, 과연 행복에 대한 기대감을 유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월한 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열망 진행형이어야 하는 우리 마음은 조금만 그럴 듯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우월한 자로 판단하고 열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마음이 단지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게 되면,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어떤 앞날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앞에서 제가 주워 들었다고 했던 자존감의 의미도 맞는 말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니까요.
물론 당연하게도, 우리는 부자 미남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학벌이나 재산 같은 객관적 지표에 의한 열등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조국 장관에 대한 가짜 뉴스들도 자존감과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도, 증거나 정황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정할 수 없다고만 말하는 기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한 사람이 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자의 자격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을 자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이것이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 있어서 희망은 기본적인 의식주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타임머신이 발명되어 우리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면, 불지옥이 따로 필요 없을 겁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희망을 성취하자마자 그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이내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는 무한 반복일 뿐임을, 마치 기록된 과거처럼 분명히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이건 마치 입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연히 군대에 가도 휴가는 나오는 법입니다. 휴가를 나오면 얼마든지 놀러다닐 수 있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대에 복귀해야 한다는 점이죠. 복귀한 뒤에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휴가 날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미래를 보고 돌아온 자는 영원히 제대를 할 수 없는 군인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보다 나은 것을 선택하고 차지함으로써 우월한 존재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 세계를 보다 크고 아름답게 확장하리라는 데에서 희망을 느끼는 본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는 우열의 관계가 지도처럼 이미 그려져 있죠. 이러한 안내도가 있기에, 우리는 여기에 따라서 보다 우월한 것을 향해 분명한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누구나 가지고 있고, 따라서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세속적 욕망이란 거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유명 인사들을 욕할 수는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위치를 열망하는 우리 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죠.
조국 장관은 우리 마음속 지도에서 매우 우월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의 단서가 가짜 뉴스로 나타난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기에, 무언가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이상 확장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생명력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어떤 인간은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 주기도 하죠.
사실 완전하고 명백하게 우월한 인간이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조국은 그런 인간처럼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유머 감각이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유머 감각의 우월성을 객관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유머는 희망 외에 절망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우정이라는 연합에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기에 너무나 중요한 것인데도 이런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논의가 없는 듯합니다. 우리가 지대넓얕이라는 팟캐스트를 좋아하는 것은, 견해가 다른 네 사람이 다른 이를 굴복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유머를 통한 연합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기사들을 써내려 간 기자들은 가짜 뉴스에서 희망의 단서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 그들이 과오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법무부 장관으로서 업무를 수행하는 조국을 지켜봐야 하는 때가 오면 우울증과 싸우며 시간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월성 획득에 대한 희망을 잃고 마음속에만 있던 절망을 눈앞에서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