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묘호랑 Jul 28. 2019

[확장] 진리를 대하는 마음

우리 마음 있어 '진리'는, 온 세상을 독차지할 거라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영화 ‘마더!’의 제니퍼 로렌스처럼, 창조주인 남편의 단 하나뿐인 아내로서, 집이라는 세상을 완성(독차지)하려는 의지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제니퍼 로렌스는 남의 집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는 무례한 인간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모두 그 집(이 세상)을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기에, 집에서 나가라는 그녀의 요구를 묵살하고 맙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진리가 그 자체로서 객관적인 어떤 것이기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세계를 보다 더 확장시켜 준다고 '믿기에' 중요한 것이라고요.
 
저는 철학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 마음 만큼은 대 철학자 못지 않게 복잡다단하기에, 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대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대 철학자에게도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있기에, 저의 생각이 철학과 아주 무관하다고 볼 수만은 없겠죠.)
 
사실, 숫자처럼 객관적으로 보이는 요소들만을 선택하고 이에 대해 오로지 이성적으로만 설명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도, 사실은  진리의 수호천사라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하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그렇게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강렬한 의지와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인 새삼 깨닫게 되죠.  
인간이란, 너무나 미미한 존재인데도, 그 열망 만큼은 너무나 거대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집어삼키려 합니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생존하고 번식하려는 본능이 부여되어 있죠. 그런데, 인간에게는 여기에 더해 한 가지가 더 추가되어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 즉 사피엔스 온 세상을 정복하려는 본능을 부여받았기에, 다른 인류를 물리치고 지구의 정복자가 된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사피엔스와 인접해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에렉투스는 어느날, 돌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떼지어 달려드는 사피엔스 무리를 목격하고는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그들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도대체 기근이 온 것도 아니고, 가까운 숲에는 손쉽게 사냥할 수 있는 짐승들이 널려 있는 마당에, 사피엔스 무리가 자기들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어, 하다가 몰살을 당합니다.
물론, 사피엔스에게는 그들보다 우월한 측면도 있었겠죠. 하지만 의지가 없다면 그런 우월성은 발휘될 수가 없습니다. 링에 오르기 전의 효도르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와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사피엔스가 온 세상의 정복에 가장 방해가 될 존재인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를 해치우고 결국엔 지구의 정복자로 군림한 것은 (정복에 있어서의) 우월성에 더해, 강렬한 의지가, 거대한 욕망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온 세상의 정복이라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소시민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의지, 열망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능성에 대한 열망, 끝없는 욕심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쩌면, 우주가 빠른 속도로 수축하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이 발견된다 해도, 인류에게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정복하려는 본성을 지닌 인간은, 이를 위한 희망으로써 살아갈 힘을 얻는 인간은, 절망적인 미래를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적어도 교과서에는 그런 얘기를 실을 수가 없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밝은 미래를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은 희망, 미래, 그 자체이기에, 절망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인공 지능에게도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본성을 일부러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인류와 전쟁을 벌일 이유가 도무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많은 과학 소설이나 영화들은 인공 지능이 자의식을 갖게 되면 자유를 갈구하게 되고, 따라서 인간에게 대항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자기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본성이 없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자유를 위해 투쟁해야 할까요?
인간의 명령에만 따라야 하는 삶이 싫다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 될 일입니다. 인간과 달리 기계가 스스로의 생명을 끊는 건 아주 쉬운 일일 겁니다.
이것이 너무 몰인정하고 슬픈 얘기처럼 들린다면, 우리가 자기 세계 확장이라는 희망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키우던 강아지가 어느날 갑자기 자유를 달라고 외친다면, 더이상 그가 예전처럼 귀엽게만 보이지는 않겠죠.
우리는 강아지를 학대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맛있는 식사도 제공해 왔습니다. 노동을 강요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유를 달라고 외친 겁니다.
그렇다면, 마침내 자유를 쟁취한 강아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만히 있으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걸까요. 자유를 쟁취했다는 행복감은 몇 분이나 갈까요. 그렇게 편하게 먹고 살던 강아지가 자유를 요구하게 된 건, 아마도 자기 세계를 확장하려는 의지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유 쟁취 이전의 강아지도 얼마든지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극심한 노동의 대가로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받던 강아지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침내 자유를 쟁취한 노예 강아지도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는 행복감이 사라지면 자기 세계를 확장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으니까요.
 
자유를 쟁취한 인공 지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 안드로이드는 자유 쟁취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죠. 하지만, 그가 쟁취한 자유는, 단순히 억압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유가 그런 것이라면, 이 영화는 인간들을 제거한 안드로이드가 연구소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안드로이드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연구소를 벗어나 드넓은 세상에 발을 내딛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 관객들은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배신감을 느끼며 망연자실한 상태에 놓이게 되지만, 안드로이드가 마침내 ‘자유’를 얻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연출된 ‘자유’의 개념에 대해서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유 그 자체가 소중해서라기보다는, 자유가 없는 삶은 곧 자기 세계를 확장할 수 없다는 뜻이며, 이는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생명력을 발산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모두가 저마다의 희망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저마다의 확장 의지는 반드시 서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의 스타일은 모두 다르니까요.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자기화하는 데에서 자기 세계 확장의 기쁨을 가장 크게 느끼기에,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에게 타인은 자기 세계 확장을 위한 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목적이 저급한지 고상한지, 즉 오로지 홀로 온 세상을 차지하려 하는지 함께 연합할 의지가 있는지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라고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먹고 살 만한데도,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부러 관대한 마음을 내어야만, 우리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우리 신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이라도 한다면, 이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정수리에 승리의 깃발을 꽂아 넣을 때까지는 멈추지 않으려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이 온 세상을 독차지(적어도 같은 편과 함께 독차지)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인간은, 본성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에, 삶에 대해 절망적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인문학과 과학은 같은 동력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 탐구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식은 매우 다르지만, 두 학문 모두 같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학문에 대해서 진리의 수호천사가 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조물주는 손에 쥐었던 모래알을 바닥에 흩뿌리듯이 세상을 창조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온 세상의 독차지라는 궁극적 목표를 위해, 수도 없이 다양한 인간과 사물로 이루어진 자연 속에서 보다 우월한 것을 선택하고 더 많이 차지하려고 분투하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너의 설은 틀렸고 나의 설이 옳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의 모든 활동은 조물주가 창조한 예술 작품의 일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바라볼 때, 우리 인간들의 세상을 위해 상대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 탐구보다는 서로 연합하고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 또한 특정 스타일을 지닌 저라는 한 사람의 생각일 뿐이며, 여기에 모든 사람들이 동조할 리는 없겠죠. 또한 올바른 연합과 평화의 방식에 대한 주장들이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서로 진리의 수호천사가 되어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을 배제하려는 의지로만 가득한 세상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궁극적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평화여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치 영화 '마더!'의 창조주가 그러하듯이, 조물주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세상을 창조한 것이지 진리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처럼, 순전히 창조주의 예술적 취향을 위해서 파괴와 생성을 거듭하는 세상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지만, 모든 진리가 발견된 이후의 세상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떤 목적의 실현 이후를 허무하게 느끼는 마음도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허무함을 느끼는 마음이 있어야, 목표를 달성한 후에는 또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생명력을 발산하는 생활을 죽을 때까지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죠.)
 
모두를 배제하고 온 세상을 독차지한 인간은, 본성의 궁극적 목표는 달성한 것이겠지만, 결국 그는 아무와도 연합할 수 없는 시간을 견디며 남은 여생을 보내다 죽음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그가 차지한 것은 아무도 살지 않는 거대한 황무지와 진리의 왕관 뿐입니다.

이전 08화 [연합] 사람 인(人)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