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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호랑 Jan 10. 2019

[확장] 마음의 동력

마음은 의지가 아니다


욕심의 끝

학생은 방학을 기다린다. 방학을 기다리며 수업을 인내한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오지 않을 것 같던 방학식은 분명히 온다.
방학식 날은 일찍 끝나서 더 좋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간다. 집에 돌아와서는 눈누난나 뒹굴거리며 티비도 실컷 본다. 집안 일을 돕거나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속 편한 학생은 신나게 놀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 자유를 만끽하다 보면 딱히 할 게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차라리 학교에나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들지만,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개학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 이제는 티비가 지겹다. 티비는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거지. 세상에 티비도 못 보고 사는 사람도 있나. 무언가 더 즐거운 걸 하고 싶다. 오락실에 가서 실컷 게임을 하고 싶다.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가서 새로 생겼다는 놀이기구도 타고 싶다. 다행히 할머니께 용돈을 두둑이 받아서 친구들과 놀러 나간다. 매일 매일 오락실에 가고 놀이공원에도 간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그렇게 영원히 즐거울 것만 같던 방학 생활이 일주일 만에 시시해진다. 아직도 개학까지는 한참 남았다. 그러는 와중에 같은 반의 누구는 가족들과 해외 여행을 갔다는 소문을 듣는다. 자, 이제는 해외 여행이다! 그런데 해외 여행을 실컷 하고 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계 일주를 하고 온다 해도 새로운 즐거움에 대한 열망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이 학생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신나는 생활을 계속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세계 일주에 싫증이 나면 우주 여행도 하고 시간 여행도 하고 마법의 세계도 여행하는 등 온갖 신기하고 재미난 것들을 다 즐기고 누리는 생활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러다가 특정 순간에 도달하면, 별안간 모든 것을 통달한 표정으로 이제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은 이제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젊음이 있고 시간이 남아 있다.
만약 이 학생이 별안간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는 출가를 한다고 해보자. 물론 속세의 생활과는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출가를 한 상태에서도 특정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완전히 차단할 수가 없다. 또한 살아 있다면 무언가를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출가 후 은둔 생활 중인 그 학생을 찾아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자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자기가 받아들인 세계, 자기가 받아들인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기 세계를 확장하게 된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을 확률이 백 퍼센트인 곳으로 출가하여 아무도 모르게 혼자 사는 사람은, 출가와 동시에 사회적으로 사망한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시간과 생명력을 부여 받은 인간이라면, 인간 사회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는 이미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사람들은 제각각 서로 다른 삶의 목표를 추구한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어떤 사람은 명예를 위해,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아간다. 구체적인 목표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에게 시간과 생명력이 주어져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사람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백 살까지 장수한 사람이라 해도, 백한 살까지 살 수도 있고, 백열두 살까지 살 수도 있다. 마음속 가능성은 언제나 최대치를 가리킨다. 살아 있는 한 시간은 언제나 인식된다. 그래서 시간은 끝없이,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으로 느껴진다. 생명력이 있는 존재, 살아 있는 존재는 움직일 수밖에 없고, 움직임에는 방향이 있으며, 방향이 있는 움직임들에는 지향점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시간이 가고 있는 한,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지향점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려 한다.

말이 쓸데없이 어려워진 듯한데,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렇다.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듯이 누워 있기만 하지만 않는다. 당연히 사람들은 목표가 크든 작든, 달성하기 어렵든 쉽든, 저마다 원하는 것이 있고, 그런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뚜렷한 목표를 마음에 품고 움직인다. 그런데, 이미 성취한 목표는 당연한 과거로 여겨지기에, 다가오는 시간(미래)을 살아 내야 하기에, 곧바로 더 큰 목표를 향해 움직여야 하고, 이런 과정은 죽을 때까지 되풀이된다. 그렇기에 사람 욕심에는 끝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선택의 자유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들은 인간을 건전지와 같은 에너지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매트릭스라는 시스템을 건설한다. 건전지처럼 매트릭스에 연결한 채로 생명 활동을 지속시켜야 했기에, 기계들은 인간을 가상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함으로써 삶의 의지를 갖도록 한다.
최초의 가상 세계는 완벽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속에서 삶을 지속하지 못한다. 계속되는 실패 끝에 기계들은 매트릭스에 불완전성과 직관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마침내 성공적인 시스템을 이룩해 낸다. 결국 매트릭스의 가상 세계는 1990년대의 실제 인간 세상과 비슷하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매트릭스의 가상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삶의 의지를 갖게 된 것이, 선택의 자유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택의 자유는 실질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해진다.

일단 선택의 자유가 일회성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만약, 선택의 자유가 인생을 시작할 때 한 번만 주어진다면, 삶의 의지를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번 주어진 선택의 자유로 인한 즐거움이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마치기 직전에 주어진다면, 선택의 자유로 인한 기쁨을 누릴 수 없으므로 인간에게 삶의 의지를 갖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선택의 자유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여러 번 주어져야 할 듯하다. 그런데, 실제 인간 세상에서 그런 기회는 기계적으로 공평하고 완벽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최초에 기계들이 설계한 완벽한 가상 세계에서나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완벽한 가상 세계가 인간에게 삶의 의지를 갖게 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택의 자유가 언제 주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주어질 가능성은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바라보면서 삶의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즉,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은, 선택의 자유에 대한 기대감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선택의 자유는 동등한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는 게 아닐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인간의 기이한 식탐에 주목한 기계들은, 인간에게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가상 세계를 만들어 준다. 그 세계에서는 인간들이 거대한 식당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 식당에서는 십만 가지 이상의 메뉴를 제공한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약 백 년의 시간 동안 매일 하루에 세 번씩 메뉴를 선택할 자유를 누린다. 죽을 때까지 같은 메뉴를 먹을 일은 없다.
과연 인간이 그런 세계에서 선택의 자유를 충분히 누린다고 볼 수 있을까? 백 년 동안 삶의 의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 최고의 요리사들이 최고의 식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를 매일 대접한다 해도, 선택의 자유가 오로지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상태로 백 년이나 되는 삶을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자유는 대등한 것들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보다 강한 삶의 의지를 갖게 하려면, 선택 가능한 것들 사이에는 분명한 우열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보다 우월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우월한 것을 선택할 기회가 언젠가 오기를 기다리며, 백 년의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선택의 자유는, 보다 우월한 것을 선택할 기회에 대한 기대감이다.


요약

첫째, 방학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한 학생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과 생명력을 부여 받은 인간은, 시간이라는 끊임없는 인식,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하려는 존재가 된다.
둘째, 선택의 자유가 인간에게 삶의 의지를 갖게 한다는 가정 하에서, 선택의 자유는 그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므로, 선택의 자유에 대한 기대감이 인간에게 삶의 의지를 갖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선택의 자유는 대등한 것들 중에서, 그리고 정해진 범위 안에서, 단지 선택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 중에서 우월한 것을 선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은, 보다 우월한 것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주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두 가지를 종합하자면, 인간은 보다 우월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하려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아주 간단히,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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