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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길에서 팩소주를 마시는 이유

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두 번째 딴짓일지

by 아는언니

저는 제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연기라는 '딴짓'을 시작해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재미 삼아 시작한 연기라는 '딴짓'이 저를 정화시켜줘서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나와 상대배우에 집중하는 것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었었나 봅니다. 그해의 아마추어 뮤지컬 동호회에서 연말 공연으로 올리는 <싱글즈> 오디션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신청했고, 제가 지원한 역할은 그야말로 30살 생일에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전화로 통보받고 미쳐 날뛰는 노처녀, 돌아이의 정석, 원맨쇼로 시작하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런데 이 배역에 왜 그렇게 꽂혔을까요? 저는 오디션을 위해 A4 한 장의 대사를 외웠고 동선도 머릿속으로 수십 번 연습했습니다. '이 대사에서는 이런 제스처를, 여기서는 이 톤으로, 여기서는 머리 한번 쥐어뜯고.'



장진영,엄정화, 이범수, 김주혁 주연의 동명 영화 <싱글즈>를 모티브로한 창작 뮤지컬.
사랑과 우정 그리고 꿈에 대해 이야기 하며 젊은 친구들이 사회 속에 뛰어들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스물아홉 네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극중 나난은 스물아홉, 일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자신을 찾기 위해 일을 택하는 당당한 싱글여성. 특별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남자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는 당돌하고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다.


뮤지컬 <싱글즈>의 줄거리



오디션


수없이 연습하고 대기번호를 받고 오디션을 기다릴 때, 사람들이 저와 같은 배역을 지원한 'xx가 너무 잘한다'며 이미 연습한 게 오픈됐는지, 그녀에 오디션에 대한 기대감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날 오디션 본 네 명이 순서를 사다리 뽑기로 정했습니다. 제 차례는 두 번째였고, 그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은 제 뒷번호였습니다. 총 4명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연출과 캐스팅 디렉터가 뽑기 순으로 연기를 보았습니다. 당연히 앞사람 연기를 나머지 지원자가 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호명자가 연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너무 긴장한 게 뻔합니다. 두 번째로 제가 호명되었습니다. 카메라가 앞에 돌아가고 있었고, 저와 함께 연기하고 간식 먹고 웃고 떠들던 동호회 친구들이 심사위원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연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연습했던 대로 첫 대사를 토해냈습니다. 그다음엔 여기저기 동선을 밟으며 왔다 갔다 거렸고 미친 절규를 할 때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 순간에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A4 한 장 분량을 대사를 다 치고 나서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박동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이 심장이 뛰다 뛰다 티셔츠 밖으로 튀어나와버릴 것 같다는 느낌만이... 다음 오디션은 그 주목받는 기대주의 연기였고 그녀의 연기를 내 눈앞에서 보았지만 뛰는 심장 때문이었는지 긴장한 채 오디션을 마친 직후 미친 텐션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는 '그냥 생각보다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데?' 하는 느낌뿐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오디션 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미친 노처녀 역할에 딱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환호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했습니다. '음... 그 역할은 당연히 내 거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디션 합격을 정말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시작은 그때부터였으니까요.

대본 분석

우선 카페에 앉아 대본의 구성을 살폈습니다. 우리 극은 20분짜리였고, 총 6개 공간에서 장면 변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장에서 저의 원맨쇼로 등장해서 절친 3명과 함께 술 취해서 이별통보를 하소연하고, 2장에서는 일터에서 우연히 한 남자와 실랑이를 하면서 그가 저에게 반한게 아닌지 착각하는 자뻑에 빠져서는 신나게 솔로곡을 부릅니다. 3장에서는 술 취한 손님의 시비에서 구해준 썸남이 취객을 쳐서 결국은 경찰서로 갑니다. 경찰서에서도 썸이 알콩달콩 피어납니다. 4장에서 헤어진 전 남자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집니다. 5장에서는 썸남에서 연인이 된 남자 친구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습니다. 6장에서는 프러포즈받은 남자를 따라 뉴욕에 가는 것보다 자신의 커리어 성공을 선택하고, 친구와 우정을 확인하는 내용입니다. 각각의 장면에서 어떻게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구분을 주는 것부터 상황 파악을 해보기로 합니다.

대본이 닳도록 쳐다보며 장면과 문장과 쉼표까지 읽으며 분석했던 흔적

신별 포인트를 살린 연습

우선 첫 장의 첫씬에서 그야말로 '내가 주인공이다!' 임팩트를 관객에게 남겨줘야 합니다. 왜냐면 시련당한 후, '괜찮아!' '괜찮지 않아ㅠㅠ'를 반복하며 오락가락하는 심경을 보야줘야 하는 그야말로 명장면이니까요. 이 장면을 처음 연기할 때 밑 밑 했던지, 지인의 조언을 듣고는 '지킬 앤 하이드'처럼 보여주기로 연습했습니다. '오른쪽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줄 때는 맘 여린 실연당한 여자, 왼쪽을 관객에게 보여줄 때에는 미쳐서 분노하는 여자' 이렇게 제맘대로 설정하고는 긴 대사를 치면서 왼쪽 여자를 보여줄 때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서 절망하고, 오른쪽 여자를 보여줄 때는 관객이 이별을 통보한 전 남자 친구인 양,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고 x큐를 날리는 제스처를 취하도록 연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연습한 것을 막상 연습시간에 동료 연기자들 앞에서 보여주기까지는 매번 입술을 꼭 깨물고 마음의 다짐을 해야 하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실상의 저는 극속의 여주인공과는 달리 그리 대담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두 번째 장은 맥주를 마시던 손님이 매니저인 저를 불러서 맥주 맛이 이상하다고 클레임 하고 그것이 결국은 저를 꼬시려고 말 거는 장면이었습니다. 자아도취해서 '저 사람 나한테 반한 거 아니야?'를 연발하며 혼자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그야말로 신이 났던 것 같습니다. 노래하면서 내내 가사에 맞춰 연기하고 가사를 잘 들리도록 안무로 표현하는데 너무나 신났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보일 때 여자들은 얼마나 행복했던가요. 당시에 상대배우와 연습실 밖에서 대사 연습을 따로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뭔가 정말 심장이 간질간질했었거든요.


무대공포증

그런데 이 과정이 진행되면서 신나고 즐겁기만 한건 아니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그저 신이 났는데 어느 순간부터 공황장애 같은 게 오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떨리는 거죠.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렵지 않을 때는 내 맘대로 막 했는데, 어느 정도 올라오니 훈수를 두는 연출과 선후배 구경꾼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꽂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선이 의식되더니 갑자기 상대배우의 눈을 쳐다보기도 떨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면 안되는데 그냥 맨 정신에 연기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상대의 눈을 보고 연기할 자신이 안 생겨서 연습 전에 몰래 향한 곳은 편의점.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참이슬 팩소주(빨간색 오리지널) 박힌 걸 확인하고 사서는 가방에 넣습니다. 어디 앉아서 먹어도 될 텐데, 막상 그것도 걸릴까 두려워서 길을 걸으며 조심스럽게 빨간 오리지널 표시를 손으로 감싸서 가리고는 빨대로 쪽쪽 빨아먹습니다. 그렇게 해서 급 취기가 오르고 연습실에 들어갔는데 같이 연기하던 동료와 대화를 연기할 때 '아우, 술냄새!'하고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때의 저는 진짜 역할에 미쳐있었습니다. 술에 취해서라도 떨리는 무대공포증을 극복하고 진짜 돌아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극복

그렇게 혼자 미친놈이 되는 장면은 어느 정도 극복했는데 이번에 난관은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눈을 맞추고 입맞춤을 하는 장면입니다. 연출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공연하면 우리 부모님도 오시고 친구들도 오는데, 나 어떻게 해. 아무리 연기지만, 연인과 침대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키스하는 장면... 나는 못한다..." 그때 연출이 딱 한마디 했습니다.


그거 언니 아니에요.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언니 자신이 아니라

나난(극 중 배역 이름)이에요.


그 말에 참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연기하는 무대 위에서 나는 '회사의 X선임'이 아니라, '엄마 아빠의 큰딸'이 아니라 그냥 '이별을 통보받고 힘들었지만, 새 사람과 사랑을 시작하려는 그저 행복한 나난'이라는 것을 진짜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들에게 이쁘게 보여야 하는데... 그들을 위해 내가 잘 해내야 하는데'가 아니라 진짜 사랑과 일을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난'이 그 무대 위에 있는 것이란 걸 깨닫고 나서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짧고도 길었던, 술을 마셔야만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고 나니 그야말로 무대에서 뛰어놀 수 있었습니다.

본 공연

공연은 총 4번. 첫 번째에 보통은 실수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여 무사히 지나갔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극을 반복하면서는 점점 무대 위에서 즐기고 있는 '나난'을 느낄 수 있었고 마지막 공연 때는 정말 하얗게 불태웠습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나를 응원하러 온 엄마가 어떻게 봤을지 조심스레 물었을 때, "야~ 너 무대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더라~아주 시원했겠어!"라고 엄지 척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물론 오랜만에 공연을 보러 와 준 제 대학교 친구들도, 회사 생활하면서 이렇게 준비해서 공연한 저를 부러워하기도 축하해주기도 하며 대리 만족했다는 피드백을 해주었습니다.

벌써 삼 년 전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보니 이것도 어느새 3년이나 전의 일입니다. 그 삼 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고 지금은 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때의 사진을 보며 그때의 감정이 세포처럼 되살아나고, 그때의 감정을 글로 옮기며 짜릿하기도 뭉클하기도 눈물 글썽하기도 한걸 보면 꽤나 좋았던 모양입니다. '나난'으로 살았던 그때가... 어느덧 저는 팩소주를 마시지 않고도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내공 있는 신여성이 되어있지만, 소주를 먹어야만 할 말을 하던, 무대 위에서 돌아이가 되고 싶었던 삼 년 전의 젊은 제가 몹시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모든 젊음과 열정은 그 자체로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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