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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언니 May 25. 2021

냉면 줄기에 따라오는 아빠와의 추억

장충동 <평양면옥>을 매해 여름마다 찾는 우리 가족

평양냉면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던 꼬맹이 시절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엄마, 아빠, 여동생과 함께였는데 아빠는 얇은 냉면의 면발을 들어 올리며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그 냉면이 어떤 맛으로 다가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희미한 맛'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빠는 장충동 근처의 대학교를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아빠의 대학시절 추억을 돌아볼 수 있는 학교 근처의 장소에 함께했습니다. 아빠가 돈 없던 학생 시절 술 마시고 꼬장 부린 사연을 이야기해주신 것은 두고두고 가족들 사이에서 웃음의 소재로 회자됩니다.


여름이 되면 우리 가족은 늘 그 장충동 <평양면옥>에서 평양냉면을 먹습니다.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해서도 그 행사는 변함없이 진행됩니다.


장충동에서 냉면을 먹는 풍경에 생경한 감정이 추가되었던 것은 여동생이 결혼을 하고 제부와 함께 평양냉면을 처음 먹던 날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아빠의 취향에 꼭 맞게 제부는 아빠와의 술친구가 되어주었고 아주 기분 좋게 평양냉면에 곁들인 수육, 만두를 소주와 함께 즐기던 가족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난 주말 아빠 엄마가 가족 모임을 소집하셨습니다. 장충동 평양냉면집에서 말입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그 맛, 투명하게 시원한 냉면 육수를 들이켜는 것으로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번 모임에는 재부가 해외로 발령을 받아 나가 빈자리도 느껴집니다. 아빠가 술을 함께 드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마친 아빠는 얼른 계산을 하러 가십니다. 자식들에게 도움을 안 받으려고 하시는 그 마음, 식사 한 끼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는 마음이 감사하게만 느껴집니다.


어버이날 이후로 2주 만에 뵙지만, 아빠는 볼 때마다 저를 꿀 떨어지게 바라봐주십니다. 오늘도 원피스 색깔이 이쁘다고 말씀해주시고, 함께 맨 가방이 이쁘다고 얼마나 하냐고 물어보십니다.


"아빠, 가방 얼마인지는 왜 물어봐?"

"우리 딸한테 아빠가 가방 사주려고 그러지~"

"ㅋㅋㅋ 아빠 말 안 믿어!!!! 나 가방 말고 차 사줘~~~"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어버리지만,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하게 와닿습니다. 다 늙어가는 딸이 아빠 눈에는 세상 이쁘게만 보이는지 이렇게 애정을 주십니다.


아빠의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져 드립니다.

"우리 아빠는 탈모도 없네~~"

라고 말하지만 회색빛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아빠의 머리카락이 안쓰럽습니다. 저도 너무 많이 늘어버린 새치 때문에 고민인데, 우리 아빠랑 저랑 같이 늙어가나 봅니다.


독립해서 산 이후로 아빠와 저 사이에도 웃지 못할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평생 누군가의 보좌만 받아보신 분이라 은퇴 후 온 가족이 아빠에게 일일이 보좌를 해야 했을 때 너무 피곤해서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늘 남들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위치였기에 남들의 사건, 사고를 다 돌봐주시던 분이 정작 당신 딸자식의 마음을 몰라주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철없이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아빠는 지금도 대학에서 강의를 하시기에 늘 강의 준비로 책과 글을 가까이하십니다. 일 때문만이 아니라 항상 즐기어 책을 가까이하십니다. 젊은 시절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 책을 읽으시며 자식들을 곁에 불러 안마를 시키시고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었습니다. 아빠의 모습 하나하나가 요즘 들어 더욱 생각나고 소중해집니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노화의 순간을 늘 경험하는 간호사분께서 그런 환자분들을 보며, 정신을 잘 부여잡고 우아하게 늙어가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신다는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아버지의 모습. 아빠는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으시고, 일기를 쓰시고, 메모를 하십니다. 아빠는 늘 본인의 정신을 가다듬고 자식들에게 남길 말을 일기장에 적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농담으로 "아빠의 필체를 아마 알아볼 수 없어서 못 읽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웃어버리지만, 사실 마음 깊숙이 책과 글을 함께하는 아빠의 모습을 평생 봐온 저는 늘 그분을 존경해왔습니다.


아빠와의 시간이 이렇게나 소중하고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존재일 따름입니다. 아빠는 언제나  마음속의 자랑이고 자부심이고 사랑입니다. 아빠와 엄마를   집으로 돌아온 저는 이상하게  부모님이 보고 싶습니다. 가족과 함께  때마다 제가 아픈 모습을 많이 보여서 죄송스러운 마음 때문인  같습니다.


아빠에게 카톡을 보냅니다. 괜히 아빠를 불러봅니다.

"아빠~"

"왜?"

"그냥~~"

"좋은 일 있어?

"그냥... 일이 좀 한가해서 냉면 사진 보다가 연락해본겨~"

아빠가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에 연락한 것인데 괜한 쑥스러움에 냉면 핑계를 댑니다.

"언제든 냉면쯤이야!"

"오예~ 냉면이면 충분(하트)"


아빠가 보고 싶을 땐 맛난 걸 사달라고 졸라야겠습니다. 이제는 뭐든 다 알아서 하고, 필요한 것은 스스로 사는 딸이 못내 아쉬우신지 가방이며 옷이며 사주시겠다는 아빠의 애정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따뜻한 밥 한 끼 함께하는 것이니까요. 그중에서도 여름의 별미, 평양냉면을 오래도록 같이 먹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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