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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통달 Jun 03. 2022

좌절의 시대, 다시 성공을 꿈꾸다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 3

토요일 밤에 아내에게 허락을 받고 혼자 영화관에 갔다. 혼자 티켓을 끊고 조용히 맨 뒤 줄 구석 좌석에 앉았다. 영화관람을 하는 내내 답답하고 분해서 큰 숨을 내쉬었다. 영화 중간에 주인공이 혼자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혼자 계란 프라이를 하고, 김으로 맨밥을 싸 먹는 장면에서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은 해가 떠오르는 산에 올랐다. 갑자기 무서웠다. 혹시 위험한 결정을 하지 않을까 섬뜩했다. 그렇지. 순간 내가 영화라는 것을 착각했다. 다행히 그는 떠오르는 태양을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봉하 집은 길에서 마당이 다 보인다. 마당에 나갈 수가 없다. 마당에 안 나가니 부엌 건너편 산에 진을 친다. 그곳에서는 안방에서 부엌으로 가는 것까지 환히 들여다보인다. 밥 먹으러 가는 모습까지 찍어서 내보낸다. 준비 안 된 풀어진 표정이 보도된다. 인권이고 뭐고 없다. 겁이 나서 마당에 나갈 수가 없다. 몇 날인지 몇 주인지 알 수도 없다. 몇 달을 갈 것 같다.”
<성공과 좌절>_71쪽


노무현은 집이라는 감옥에 갇혔다. 검찰은 시민들과 함께 소통하던 사저를 감옥으로 만들었고, 언론은 스스로 감옥 지킴이를 자처하며 노무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기자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는 총보다 무서운 흉기가 되었다. 사자바위에 올라 사저의 마당까지 고성능 카메라로 노무현의 얼굴을 찍었다. 시민들과 만나며 즐겁게 웃던 그 얼굴에는 깊은 골의 주름과 희뿌연 구름이 가득했다. 그렇게 노무현은 죽어가고 있었다.



노무현은 집권 초 검찰개혁을 위해 직접 나섰다. 하지만 검사들은 그런 대통령을 조롱했고 퇴임 후 그를 죽였다. 마치 검찰개혁한다고 하는 사람의 최후는 이렇게 끔찍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노무현을 죽였다. 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문재인 대통령의 오랜 숙제도 검찰개혁이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였던 조국은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2019년까지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교수 시절부터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해온 인물로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검찰개혁을 완성시킬 적임자로 생각해 2019년 법무부장관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검찰은 반발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조국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윤석열은 집요하고 쪼잔했다. 조국의 모든 것을 털고 또 털었다. 사상검증을 비롯, 위장전입, 친인척 비리, 자녀들의 입시 문제까지 탈탈 털었다. 조국이 검찰개혁을 막기 위해서 조국과 연관된 70여 곳을 압수수색하고 가족, 수많은 지인들이 윤석열과 그의 부하의 손에 괴롭힘을 당했다. 이번에도 언론은 검찰의 충직한 개 노릇을 자임했다. 다시 검찰은 조국의 집을 감옥으로 만들었고, 기자들은 그 감옥의 지킴이가 되었으며 수많은 카메라는 총보다 무서운 흉기가 되었다. 그렇게 윤석열과 검찰은 검찰개혁을 시도하는 정권과 조국을 죽여가고 있었다.

“큰 틀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언론이 국가권력인가, 시장 권력인가 아니면 시민 권력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과거 시장 권력과 봉건귀족 권력 간에 갈등이 있을 때 언론은 시장 권력, 시민 권력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장 권력이 이처럼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당신의 위치는 어디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지면 뭐라고 답할지 의문입니다. 시민 권력이 정치권력, 국가권력, 시장 권력을 제어하고,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와 가치가 침해되지 않도록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언론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진행 과정에서 공정한 게임의 장을 열고 그 장을 공정하게 관리하는 것이 언론의 책임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하는 역할입니다.”
<성공과 좌절>_215쪽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과 싸울 때의 언론환경과 지금 시점에서의 언론은 과연 어떤 차이일까? 노무현이 말한 시민 권력이 정치, 국가, 시장 권력을 제어하고,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와 가치가 침해되지 않도록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일까? 공정한 게임의 장을 열고 관리하고 있을까? 혹시, 아니 공공연하게 특정 정치권력을 옹호하며 그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장하고, 국가권력에 기대어 언론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광고와 기사를 맞바꿔 가며 시장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언론에게 시민의 권리와 가치는 몇 번째 고려 대상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언론개혁은 여전히 저 멀리 있다.



깊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한 시기에 시민들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간다. 내비게이션이 알아서 길을 안내해 주고, 노래방 기계는 노래 가사를 암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상당 부분 빼앗아 갔다. 포털 사이트의 특정 언론과 보고 싶은 기사만 나오게 하는 기술은 가치관의 편협함을 강화하고 내 편이 아닌 것은 모두 나쁜 놈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레거시 미디어가 영향력을 많이 잃어간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하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유튜브와 각종 SNS 등 1인 미디어가 활성화되었지만 여론에서 의제 설정의 힘은 언제나 조중동이다.



이 책의 제목은 “성공과 좌절”이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라는 말이다. ‘좌절’이란 말의 뜻은 마음이나 기운이 꺾인다는 뜻이다. 실패가 객관적이고 일반적 단어임에 반해 좌절은 주관적이고 개념적이며 슬픈 단어다. 노무현에게는 성공보다는 좌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많은 것을 이루어냈고 성공했지만 결국 앞서 말한 검찰과 언론에 의해 좌절했고 목숨까지 버렸다. 10년이 훨씬 지난 2022년 노무현을 좌절시켰던 검찰은 정치권력까지 장악했고, 언론은 여전히 그 권력을 ‘추앙’하며 시민들을 조롱하고 있다.



권력은 다시 검찰과 언론에게 갔다. 아니 검찰과 언론은 언제나 권력이었다. 단지 그 권력의 칼을 감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검찰 개혁을 시도했던 노무현은 죽었고, 노무현의 친구였던 문재인이 부여한 검찰개혁의 사명을 수행하던 조국은 죽음보다 못한 수모와 조롱을 당하며 법의 심판대에 서 있다. 불공정과 비상식이 공정과 상식으로 변질되고 절반의 시민들은 무감각해지고 절반의 시민들은 좌절했고 이어진 선거에서 또 좌절했다.



비료를 많이 준 벼는 겉으로 보기에 잘 자라고 풍성해 보이지만 비바람에 쉬이 쓰러진다. 하지만 스스로 태양에서 얻은 빛으로 광합성을 하고 물에서 영양분을 얻으며 자라는 벼는 땅 깊이 뿌리를 내리고 옆에 있는 벼의 뿌리까지 서로 엉키고 설키어 함께 자란다. 그래서 비바람에 쉬이 쓰러지지 않고 견디어 낸다. 이것이 연대다. 벼도 연대를 해야 쓰러지지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좌절의 시대, 비바람의 시대에 견딜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연대뿐이다. 그리고 좌절의 시대일수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성공’을 이야기할 수 있다.



“노사모와 같은 시민적 활동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국민들의 의식이 민주주의에 대해 아주 민감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의 의식이 역사, 정의, 민주주의 같은 가치에 대해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그 사람들의 희망에 불을 댕길 수 있는 정당과 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을 때 노사모 같은 사회적 현상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성공과 좌절>_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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