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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통장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며

                                                      
얼마 전 시댁 먼 조카의 결혼식이 있었다. 신랑과 신부를 축복하듯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마스크를 쓰고 큐알코드를 찍는 번거로움을 뺀다면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의 백년가약을 축하하는 하객들로 예식장은 붐비고 있었다. 신랑 어머니는 옥색치마저고리를 입고 신부 어머니는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서 두 사람의 행진에 앞서 당당하게 걸어가 촛불에 불을 붙였다. 자식을 낳고 오늘을 길러낸 어머니의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한 발걸음이었다.


신랑 친구의 사회로 결혼식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고 잔잔한 축가 속에 마주 본 신랑 신부는 연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특별한 주례 순서가 왔다. 신부 아버지가 새 출발하는 딸에게, 사위에게 그리고 사돈에게 보내는 편지글이었다. 딱딱한 주례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가슴 뭉클한 글에 조금은 소란스러웠던 장내는 숙연해졌고 그 사연은 내 눈물샘을 자극했다. 엄마 없이 나를 시집보내시던 아버지 생각과 잊지 못할 나의 결혼식 장면이 떠올라서였다.

사내연애 2년 끝에 나는 결혼을 했다. 그때 예단이며 결혼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잘 몰랐고 벌어 둔 돈도 없는 가난하고 어린 신부였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한 오백만 원을 쥐어주며 결혼식 준비에 보태라고 했다. 그런 남편이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이다음부터였다.
남편의 고향은 땅 끝 마을인 전라남도 여수였고 그는 장남이었다. 시아버님은 장남의 결혼은 반드시 여수에서 해야 한다고 못을 박으셨고 고향에서 동네 하객들을 모시고 내려와야 하는 우리 집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서울에 사는 직장동료들, 지인, 그리고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 또한 무척이나 번거로웠다. 지금은 KTX를 타고 3시간이면 여수엑스포역에 닿을 수 있었지만 그때는 새마을호를 타고 거의 6시간이나 가야 하는 거리였다. 나는 그 거리가 끝도 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중간지점에서 하면 좋을 텐데 말할 수 없는 저항만 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여수의 돌산에 있는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이었다. 예식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아버지가 대절한 관광버스가 오질 않았고 신부 대기실에 있던 나는 안절부절 이었다. 주말이라 차가 막혀 결국 열 시간 만에 도착은 했는데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버스 안에서 동네 사람들을 대접하느라 술을 드셨고 옷은 꼬깃꼬깃해져 있었다.  엄마도 안 계신데 그 모습을 보자 눈물이 나와 화장한 눈은 판다가 되기 직전이었다.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을 해도 예견했던 순간이 왔고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혼자 앉아계신 아버지를 향해 키워주셔서 감사한 인사를 드리는 순간에도 아버지를 보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시댁 쪽으로 가득 찬 하객들을 향해 가식으로 웃고 행복한 척을 했다.


짧은 예식이 그렇게 끝나고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실은 관광버스와 기차는 서울로 바로 올라가야 했다. 버스에 올라타는 아버지의 손을 잡자 아버지는 해준 게 없다며 내 손에 통장과 도장을 쥐어주셨다.  나는 아버지가 그러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농사일하느라 갈라지고 터진 아버지 손을 보니 가슴이 더 아팠다. 어서 가라고 손짓하는 아버지의 시린 어깨를 실은 관광버스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낯선 시댁에 혼자 남겨진 듯 서운하고 되돌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랜만에 촌스럽고 보기 싫어서 이사 박스에서 꺼내지도 않은 결혼식 앨범을 펼쳐보았다. 7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얀 드레스 입은 내 옆에 환히 웃고 서계셨다. 돌이켜보면 혼자 계신 아버지를 더 헤아리지 못하고 너무 빨리 시집을 간 것이 죄송스럽다. 엄마의 빈자리도 서러웠고 꼬깃꼬깃하게 입은 옷차림으로 서 있는 아버지가 시댁 식구들에게 잠시나마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던 철부지 딸이었다. 내 손 잡아주시고 내 옆에 서 계셨다는 것, 딸 걱정할까 봐 씩씩하게 살아가시려고 했던 아버지, 몰래 통장에 돈을 모으고 있던 아버지. 신부의 아버지가 읽어 준 주례 편지글보다 엄마 몫까지 다하려 했던 아버지의 깊고 소중한 사랑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그 날 만큼은 나보다 더욱더 엄마 생각이 간절했을 아버지가 그립고 생각나는 겨울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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